루즈벨트는 연방대법원과의 5년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나 [124] -3
특히 루이스빌 조인트 스탁 은행 대 래드포드의 위헌판결은 미국민들을 좌절시켰습니다. 대공황 당시 은행 대출을 못갚은 농부들이 토지와 집을 차압당하고 노숙자가 되는 일이 너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해 루즈밸트 행정부는 농부들이 법원에 5년간 차압중지를 신청할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1934 Frazier-Lemke Farm Bankruptcy Act).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돈을 빌려준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법”이라고 위헌을 때려버렸습니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의 주인공 역시 은행에 땅을 차압당해 쫓겨난 날품팔이 농부였습니다.
언론은 “루즈벨트의 뉴딜, 사법부가 사형선고” “좌파 경제정책 좌절” “루즈벨트 레임덕”이라고 대서특필하죠. 연방대법원이 위헌판결 3건을 때린 1935년 5월 27일을 미국사에서는 ‘검은 월요일’(블랙 먼데이)라고 부릅니다. 뉴딜 정책이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라는 뜻이었죠.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만평.
'좌파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위헌을 때린 연방대법원을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요새'로 미화한 당시 만평.
그러나 연방대법원과 언론이 “좌파 빨갱이 뉴딜 정책이 좌절됐다”라며 기뻐하는 그 순간에도, 길거리에는 대공황으로 집과 땅을 빼앗겨 노숙자가 된 시민들이 무료급식을 받으려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해졌는데도, 대기업 및 사법부는 기득권사수에 급급해 경제개혁을 거부한 것이었죠.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간판 밑에서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실업자들.
특히 연방대법원은 루즈벨트에게 안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루즈벨트가 집권후 ‘고통분담’ 차원에서 대법관을 비롯한 고위공무원의 연봉과 연금을 ‘절반’으로 깎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법관의 ‘밥그릇’을 건드린 괘씸죄가 작용한 것이었죠.
언론의 루즈벨트 융단폭격과 민중의 지지
분노한 루즈벨트는 1935년 5월 31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대법원을 비난합니다.
“대법관들은 지금 미국경제가 말타고 마차끌던 헌법 제정 시절 수준인줄 알고 있나? 미국의 사법제도는 우상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수많은 병폐를 보여주고 있다. 대대적인 사법 개혁이 필요하다. 만약 사법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헌법 개정까지 고려해야 한다.”
물론, 언론은 ‘얼씨구나’ 루즈벨트의 이 발언을 신나게 두들겨팼습니다.
“사법부와 헌법을 무시” “오만한 독재자”
독재자 루즈벨트가 재무장관, 농무장관을 '코드인사'로 다해먹는다는 내용의 만평
좌파 루즈벨트가 막대한 국가예산을 퍼주기하고 있다는 만평.
어찌나 언론에게 두들겨맞았는지 루즈벨트는 한동안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사석에서는 "늙은이 9명(연방대법관이 나라를 망치는구나"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목소리는 달랐습니다. ‘세처 가금류공장 대 미국’ 판결 후 농부들은 닭대가리 허수아비 5개를 세워놓고 ‘대법관’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루즈벨트의 ‘말타고 마차끌던 시절’ 발언을 인용해서 보수파 대법관 4명을 ‘말대가리’(The Four Horsemen)라고 불렀습니다.
대법관이 몰고있는 느려터진 마차가 뉴딜 개혁입법 자동차를 가로막고 있다는 만평.
그 이후에도 연방대법원은 루즈벨트의 뉴딜 경제개혁법 수십건에 대해 줄줄이 위헌을 때려 무력화시킵니다. 이처럼 루즈벨트는 첫 임기의 황금 같은 4년을 경제개혁 대신 연방대법원과 법정싸움에 허비해야 했습니다.
연방대법원이 루즈벨트 뉴딜에 정의의 법봉을 내려치는 만평.
여당내 포퓰리즘 세력 ‘발목잡기’
게다가 의회과반을 차지한 여당 민주당도 일사불란하게 대통령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부 총질’이 일어났습니다. 상원의원 휴이 롱이 그 주인공이었죠.
좌파인 그는 193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루즈벨트를 열렬하게 지지했으나, 루즈벨트 집권후 아무런 자리를 얻지 못하자 “제왕적 대통령”이라며 루즈벨트 비난에 나섭니다. 그는 대공황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겨냥해 실현가능성 없는 포퓰리즘 막무가내 정치를 펼칩니다.
“루즈벨트의 개혁은 노동자들에게 한참 모자란다. 부자들의 돈을 세금으로 뺏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부자 과세를 해 한 가정에 5000달러씩 나눠주자.”
휴이 롱은 대통령도 우습게 봤습니다. 백악관에서 루즈벨트를 만날 때도 모자를 벗지 않았고 “미스터 프레지던트” 대신 “프랭크”라고 부르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지요.
포퓰리즘 정치를 펼쳐 높은 인기를 누린 휴이 롱은 마침내 ‘대통령병’에 걸려 1936년 대통령선거에 루즈벨트를 제치고 자기가 민주당 후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됩니다.
"내가 바로 대통령 후보다"
결국 휴이 롱은 너무 포퓰리즘 정치를 하며 ‘어그로’를 끌다가 대통령 후보경선을 앞둔 1935년 정적의 아들에게 총으로 암살당하고 맙니다.
즈벨트를 배신한 또다른 측근 중 하나는 레이먼드 몰리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 교수였습니다. 그는 루즈벨트 집권 전부터 각계의 전문가 학자들을 모아 싱크탱크 ‘브레인 트러스트’를 만들고, 뉴딜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주인공이었습니다.
몰리는 루즈벨트의 유명한 그 취임식 연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를 집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몰리 교수 역시 루즈벨트 집권 후 이렇다할 자리를 얻지 못하자 섭섭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루즈벨트가 좌파로 나아가고 있다”며, 루즈벨트와 결별을 선언하고, 우파잡지를 창간해 루즈벨트를 공격하는 글을 잇달아 씁니다.
루즈벨트의 압도적 승리
이렇게 사법부의 훼방과 여당내 비토세력에도 부딛혀 루즈벨트의 뉴딜은 예상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것을 1차 뉴딜 (1933-1935)이라고 합니다.
1차 뉴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35년 ‘2차 뉴딜’을 발표하고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야말로 ‘절대적 지지’를 밀어줍니다. 루즈벨트는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60%를 득표, 48개주에서 승리하는 압도적 득표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1932년 58%득표, 46개주 승리를 뛰어넘는 대승리였죠. 루즈벨트의 득표율 60%는 미국 역사상 두번째로 높은 대통령 선거 득표율이었습니다.
미국 50개주 가운데 무려 48개주에서 승리한 루즈벨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은 민주당에 상원 과반, 하원 3/4의 의석을 화끈하게 몰아줍니다. 첫 임기에서 사법부와 재계의 방해로 뉴딜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루즈벨트는 절대과반의 민심과 절대과반 의석을 살려 반격에 나섭니다.
1936년 루즈벨트의 민주당은 하원 3/4를 싹쓸이(파란색)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그러나 3권 분립에서 2개인 행정부와 의회 권력을 장악했는데도, 나머지 하나인 연방대법원 개혁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헌법상 대법관을 비롯한 연방판사는 모두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죽거나 스스로 은퇴하지 않는 한 대법관을 바꿀 수가 없었죠.(이건 2020년 현재도 변함이 없습니다.) 헌법을 뜯어고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건 여론의 눈치가 너무 보였습니다.
루즈벨트의 폭탄투하 : 연방대법원 포위작전
루즈벨트는 재집권한지 3개월도 안돼 1937년 2월 5일 갑자기 사법절차 개혁법안(Judicial Procedures Reform Bill of 1937)을 내놓습니다. 루즈벨트 본인과 호머 스미스 법무장관 2명이 비밀리에 준비한 기습공격이었죠.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습공격"을 알리는 당시 신문 1면.
루즈벨트는 법안에서 대놓고 “법관을 짜르거나 탄핵하자”라는 식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1기 때 물론 언론과 사법계에 호되게 두들겨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죠. 법안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러했습니다.
“아이고, 대법관 어르신. 요즘 눈도 침침하시고 몸도 예전같지 않죠? 게다가 사건은 와장창 밀려있구요. 제가 그 심정 다 알죠.”
“나이기 70 넘어가니까 좀 그렇지.”
“어르신 모시는건 제가 잘하죠. 이렇게 하죠. 앞으로 대법관 어르신이 70살이 넘으시면, 젊고 팔팔한 새 대법관을 추가하는 겁니다. 대법관 어르신을 잘 모시고, 일도 잘할 겁니다.”
“말도 안돼. 대법관은 9명인데 또 추가한다구?”
“헌법에는 대법관을 둔다는 말만 있지, 대법관을 꼭 9명으로 한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는데요.”
“!!!”
“그리고 제가 대법관 어르신 월급하고 연금을 깎아서 맘이 상하셨죠?”
“당연하지. 감히 내 밥그릇을 건드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대법관 어르신께서 70살 넘어 은퇴하시면, 연금을 두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화끈하죠! 제가 한다면 합니다. 이제 맘편하게 은퇴하시죠.”
루즈벨트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대법관을 바꿀수가 없으면, 대법관 숫자를 늘리고 우리편을 더 많이 넣으면 된다는 것이었죠.
루즈벨트의 ‘기습 폭탄 투하’에 물론 언론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루즈벨트가 행정, 의회에 이어 사법부까지 장악하려 한다며 “독재자”라고 두들겨팼습니다. 하버드대 교수의 이름을 빌어 이런 기사도 썼습니다.
“사법부를 장악하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다. 독일 히틀러가 한 것처럼 판사를 쏴죽이거나, 아니면 자기편 판사를 많이 넣어서 사법부를 장악하거나. 루즈벨트는 히틀러다!”
루즈벨트가 경제걔혁의 항해를 하고 있다는 만평(왼쪽)과 루즈벨트가 의회, 행정부를 장악하고, 사법부까지 장악해 독재자의 길로 향한다는 만평.
루즈벨트가 '예스맨 대법관'을 동원해 사법부를 장악하려 한다는 만평.
3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