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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왜 인간은 저절로 사탄이 되어가는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기 위해 십자가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으로 죄가 씻겨지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그 ‘성령의 불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어야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오면 비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는 것을 압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이 시기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입니다.
곧 당신께서 성령을 주시는 이때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시기란 이제 우리를 고소한 자에게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라고 하시는데,
합의한다기보다기보다는 수동태로 “풀리도록(to be released) 힘써라!”로 번역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풀려나는 것이지 내 힘으로 능동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인본주의적 생각이 그리스도 피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죄는 내 노력이 아니라 용서로 풀리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다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합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다.”
내 죄책감은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대상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는 시스템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이 넣어주셨고 그래서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심판관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우리 모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됩니다. 양심은 나를 고소하는 알람과 같은 기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나를 고소하기 위해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양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재판관’에게 넘겨지는데 여기에서 재판관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스스로 죄인으로 심판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면 ‘옥리’에게 넘겨지는데 옥리는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죄책감은 나를 사탄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양심의 고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엔 죄와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이 없다거나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를 믿다가 은퇴한 한 아버지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뜯어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친구를 납치하는데, 아버지를 위해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는 아버지가 친구를 죽인 것을 알자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경찰에 걸리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주위의 영향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저런 가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도 원죄의 영향으로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알렉스가 자살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한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자기 힘으로 무마하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양심이 없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기합리화하면 됩니다.
물론 자기합리화가 지나치면 결국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양심의 문제를 내버려 두면 끊임없는 자기합리화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기합리화를 멈추면
그 죄책감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사이코패스가 되었고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굴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탄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물론 자살한다고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쨌건 예수님의 제자들은 용서를 청하고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통해서만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변하지 않는 굴레를 이해하고 빨리 성령을 받고 탈출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이기에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장착해주신 하느님만 다시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 방법은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가죽옷이 성령의 불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으면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죄만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그리스도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받으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자아와 사탄에게 넘겨져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하나의 법칙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는 그리스도로 사느냐 사탄이 되어가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발자인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끌려가 지옥으로 들어가느냐,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2일 [성 요한 바오로2세 축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나라 안팎이 시끌시끌한 요즘 유난히 그리운 한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평화의 사도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20-2005, 재위 1978-2005)입니다.
그분은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소리를 높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은 가장 무거운 죄임을 천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행된 전쟁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생토록 ‘전쟁과의 전쟁’을 주도하셨던 그분의 평화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약해보니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길 내용이더군요.
“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선언합니다. 폭력은 악입니다.
폭력은 결코 건설의 도구가 아닙니다.
폭력만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는 외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간의 품위에 맞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폭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길을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니다.
극단의 야만에까지 떨어진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한국 교회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그분은 순교자들의 땅이자 분단국가, ‘전쟁 발생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을 각별히 마음에 두셨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기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셨던지 교황 재위 시절 두 차례나 방한하셨습니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성체 대회 참석차 방한하셨는데, 당시 주제는 한반도 평화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평화와 정의 속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비극적 분단을 가슴아파합니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고난은 분열된 이 세계의 상징입니다.”
2011년 5월 1일 바티칸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감동 깊게 묘사하셨습니다.
“저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2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저를 로마에 부르셨습니다.
저는 23년 동안 그분 바로 옆에서, 매일 그분을 뵈면서, 그분의 인격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켰고 든든히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복잡다단한 직무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의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하나 그분의 모든 것을 벗기셨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바위로 남아 계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6년 5개월이란 긴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총 104회, 129개국을 방문하셔서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하신 세계 지도자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지구를 서른 바퀴 도는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기록적인 순례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라진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리는 다름 아닌 평화의 다리, 반전(反戰)의 다리, 사랑의 다리,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겹겹이 둘러쳐져 있던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부자와 빈자 사리의 수많은 벽을 허물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정의의 실천, 가난한 이웃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국가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행 위험 지역이라며 측근들이 만류할 때조차도 사랑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 평생은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중단 없는 긴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돌아보도록 이끄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예수님의 한탄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연과 세상 일에 대해서 짐짓 아는 체하면서 막상 지금 어느 "때"가 도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이 세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령의 빛으로 자기네 역사를 통찰하면 예언자들이 남긴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이방 민족들의 연이은 점령과 흥망성쇠, 유배와 귀환, 동방 박사와 세례자 요한의 출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거쳐 이제 이스라엘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백성들을 생명의 나무 아래로 모으고 계심을 눈앞에서 보는 중입니다.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환경이나 능력 탓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무지는 죄가 되지 않지만,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는 완고함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이들은 올바른 일을 판단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는 것이지요.
보지 않으려는 눈, 듣지 않으려는 귀, 열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 앞에서 아무리 진리를 외친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자기 영광과 이익에 털끝만큼이라도 손실이 될 것 같으면 모르쇠가 되어 버리기 일쑤지요. 예수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은 걸핏하면 예수님께 율법과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분의 정당성을 폄훼시키려 애썼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실존 안에 깊이 배어 있는 죄성을 들려 줍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진지하게 영성 생활에 들어선 이들이라면 깊이 공감하는 내용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고자 용기를 내보지만 그보다 자신 안에 스멀대는 욕정과 탐욕, 자기애와 이기심, 자기 영광의 유혹과 타협하는 게 더 쉬울 때가 많지요.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 7,22)
하지만 원래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고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영혼에 스며든 "죄의 법" 곧 "죽음의 법"이 더 손쉽고 가까우며 자극적이기까지 한 건 사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거짓 속에서 진리를 향하려고 고개를 드는 용기는 더욱 가치있고 귀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하는 것, 두려움 속에서 믿음을 붙잡는 것, 절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 우리 육 안에 자리한 죄와 죽음의 법에 절연을 선언하고 선과 생명의 손을 잡는 결단은 참으로 거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자연의 징조 못지 않게 주님의 "때"를 깨닫고 생명의 나무인 그분 십자가 아래로 모여든 이들입니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세상적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죄의 법이 아닌 주님의 법을 선택했기에 주님 곁자리를 떠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이지요.
나약한 죄인인 우리가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은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죄의 짐을 직시하고 벗어버리면서 지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서는 것뿐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욕정과 탐욕, 자기 영광의 죄성을 완전히 탈피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는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영혼 안에서 거룩함의 영역을 넓혀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죄에 떨어지는 회수보다 한 번 더 주님을 선택하고 또 그게 거듭거듭 쌓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흐르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영의 생명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