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1:1-4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헌금 넣는 것과 가난한 과부 하나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과부가 누구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처럼 스스로 거룩한 척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거룩한 척 연극하던 율법학자들과는 정반대인 과부를 보시고 칭찬하시는 내용이다.
21:1절은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했다. 눈을 들어 보았다는 말은 올려다 보았다는 뜻이기에 헌금궤가 있던 곳은 모두가 볼 수 있는 높은 곳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본래 귀한 문서나 귀중한 재산을 보관하던 방을 뜻하는 말이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한 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헌금궤라는 말이 보물을 보관하는 본래 방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헌금상자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다가 갑자가 헌금하는 방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가르치던 그곳에서 부자들이 높은 곳에 있던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올려다보신 것이다.
2절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가난한 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도 보셨다. 렙돈은 가장 작은 금액의 동전이다. 한 렙돈을 넣는 것은 금지되어있었기에 이 여인이 넣은 두 렙돈은 가능한 헌금 중에 가장 작은 금액이다. 거리가 떨어져있어 정확한 금액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금액이 그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아신 것처럼 예수께서 아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이 여인이 가진 것을 당시 상황에 비추어 짐작하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신 능력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이 여인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신 것이다.
3절은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진리를 말씀하실 때 쓰시던 공식을 사용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것이다. 4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3절의 이유를 설명한 말이다. 모든 사람들은 풍족한 가운데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부족한 가운데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이다. 대조되는 것은 풍족하다는 말과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 과부는 자신이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두 렙돈 뿐이었는데 그것을 전부 다 넣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의성경 해석자들은 20:47절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는 증거가 바로 과부의 두 렙돈을 빼앗은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도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기사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렇게 해석하면서 이 헌금이 바로 가진 자들이 과부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라며 그의 글 마지막을 "니가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본문의 종교 지도자야 짜샤!" 라며 끝을 맺는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다며 흥분해 한다. 그러나 이 헌금은 율법학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이 헌금은 성전과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본문의 문맥이 말하는 의미는 이 여인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어 자신이 가진 두렙돈을 드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은 예복을 입고 거짓으로 거룩한 척하며 장터에서나 회당에서나 잔치 자리에서나 높은 자리에 앉아 존경을 받으려던 율법학자들과 가장 부끄럽고 가장 낮은 신분을 나타내는 과부의 옷을 입고 가진 전 재산을 진심으로 드리던 진실된 거룩을 비교하신 것이다. 율법학자들을 부르조아의 대표로 보고 과부를 프롤레타리아의 대표로 보아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회 계급을 타파하는 혁명가라는 색안경을 끼고 잘못해석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은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 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이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거룩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헌금은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이다.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온 정성을 다해 드리는 헌금은 그 액수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금액의 많고 적음을 보시지 않고 그 마음을 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