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도에서 보길도로 들어가는 청해진 페리호. 바다 앞에서 서면 사람들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듯 누구나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마음도 들뜨는 것 같다.
ⓒ 김형순
보길도를 가기 위해서 드디어 완도 화흥 선착장에 도착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바다구경이다. 파도를 가르는 배를 타고 보니 마음은 소년처럼 설레고 속은 확 터진다. 바닷바람이 얼마나 센지 내 몸이 날아갈 것 같다. 파도의 하얀 살결은 관능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여행은 배가 바다에 몸을 맡기듯 시간과 마음을 놓아야 더 깊은 맛이 나는 법, 시간에 얽매이면 여행의 흥은 떨어진다. 도시에서 묻은 떼를 털어 내고 우리를 원점 혹은 영점으로 돌아가게 한다.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살며 만물과 나는 하나이다"라는 장자의 말이 여기에선 알 것 같다.
보길도는 이번이 두 번째, 아무리 봐도 또 보고 싶었던 섬이다. 이곳에서 환경운동을 한다고 해도 개발주의 위세는 꺾기 쉽지 않으리라. 10년 전에 비해 자연의 풍광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안타까움도 없지 않으나 보길도는 역시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으로 사람을 끈다.
▲ 세연정 입구로 들어서니 이정표와 함께 노란 코스모스를 연상시키는 꽃들이 만발하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이 꽃의 이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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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 돌과 바위
보길도는 자연의 빼어난 풍물도 정취도 넘치지만, 고산문학을 낳은 문화유적지가 있어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는 것 같다. 꽃과 나무, 바다와 해산물도 좋지만 가볍게 등산하기도 좋은 섬이다. 특히 돌과 바위는 자연이 빚은 조각품처럼 멋지다.
남도의 햇살은 남다르다. 특히 보길도의 햇살은 더욱 그렇다. 동백의 붉은빛은 찬연하다. 검은 피부처럼 그렇게 반짝거린다. 여기선 동백나무가 소나무처럼 무리로 피어 우람해 보인다. 작렬하는 태양이 없다면 이렇게 나무가 자라지는 못할 것이다.
보길도 청별 선착장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부황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까지 가는 길목에 오솔길 분위기를 내는 목기로 된 새 길이 생겼다. 나같이 걸어 여행하는 자에게는 고단함과 피곤함을 훨씬 덜어준다.
두 연못, 세연지와 회수담
▲ 고산이 나라를 생각하면서 무(武)를 닦고 화살 쏘는 연습을 했다는 '사투암(射投岩, 오른쪽)'. 세연지에 있는 바위로 속이 움푹 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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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지는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위하지 않았다'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7년(인조 13) 이곳에 들어온 뒤 1671년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드나들면서 13년 동안 산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세연지(洗然池)'가 보이고, 그 가운데 '사투암(射投岩)'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이 비록 유배자의 입장이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위기를 맞은 입장에서 무(武)를 등한시 할 수 없어 이 바위에서 건너편 산중턱 '옥소암(玉簫岩)'에 과녁을 설치해놓고 활 쏘는 연습을 했다고 전한다.
세연정 입구 동쪽 축대 밑에는 세연지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연못인 '회수담(回水潭)'이 있다. '오입삼출'이라 하여 물이 들어가는 구멍은 5개, 연못 쪽으로 나가는 구멍은 30cm 아래에 세 개를 만들었다. 농민들이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방법을 응용한 건축조형물이다. 이 역시 고산다운 발상이다.
마음도 씻어주는 세연정(洗然亭)
▲ 왼쪽에 자연 연못인 세연지(洗然池)와 오른쪽에 인공연못인 회수담(回水潭)이 태극무늬로 휘감아 돈다. 그 가운데 현판이 붙어있는 방향으로 본 세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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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洗然亭)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유쾌한 뉘앙스를 준다. 세면정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정자 말이다. 아니 경관이 우리의 혼까지도 씻어준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오역인가! 하여튼 이곳에 오면 도시의 먼지뿐만 아니라 마음의 먼지까지 깨끗이 세면시켜줄 것 같다.
인공미와 자연미가 만나 빚어낸 풍경은 신선의 놀이터 같고, 너럭바위들은 휘휘 하늘의 구름처럼 날고 들길에 확 핀 꽃잎 같다. 그래서 사람들을 붙잡아두고 떠나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마치 애인을 보듬어도 또 보듬고 싶듯이 세연정은 그런 여인처럼 만나도 또 만나고 싶고 봐도 또 보고 싶은가 보다.
▲ 무희들도 춤추었다는 서대(西臺)와 동대(東臺) 사이에서 본 세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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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인은 숨어있다고, 명소는 이렇게 숨겨져 있었다. 주변의 대나무 숲, 바위에 흐르는 물, 신령한 동백나무, 돌멩이 하나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물과 바위와 나무, 정자와 연못과 현판까지 모두 다 잘 어울린다. 이런 곳에서 시와 춤과 노래와 풍류가 안 나온다면 오히려 어색할 것이다.
바다가 그린 모래 추상화
갑자기 바다냄새가 그리워져 통리, 중리 바닷가로 향한다. 소금기가 묻어나고 비린내까지 나는 갯내음은 내 코를 콕콕 찌른다. 날 기절시킬 듯 강력하다. 삶에 힘과 의욕과 열정이 솟는다. 몸과 마음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휘휘 날아간다.
▲ 중리 해수욕장과 방파제 속 고깃배들. 파도가 모래위에 만든 자국들이 추상화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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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마냥 걸어본다. 걷다보면 내 몸이 바다의 기운으로 충전된다. 이런 접촉은 나를 키우고, 나를 낫게 한다. 모래 살빛이 여자의 뽀얀 얼굴보다 더 예쁘고, 여자의 살결보다 더 부드럽다.
그리고 바닷가 모래사장은 현대 추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보길도는 톳나물 성수기라 아낙들의 손길이 너무 분주해 송구했다.
세연정을 나와 '동천석실(洞天石室)'로 가려고 부용동으로 향하니, '고산문학 체험공원'이 보인다. 부대시설로 '어부사시사 산책로'와 '죽림욕장' 등도 있다.
사실 난 아쉽게도 중간에 길을 잃어 동천석실에 가질 못했다. 난 이걸 "당신이 나 보길도를 정말 사랑한다면 다시 오시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 고산문학 체험공원 입구 다리. 오른쪽은 어부사시사 산책로 숲, 산책로 안에는 어부사시사가가 사계절로 나뉘어 나무로 된 단 위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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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만큼 산도 일품
보길도는 세연정이 다는 아니다. 낙서재(樂書齋), 옥소대(玉簫臺), 백도리의 송시열 글씨바위, 흑자갈 예송해변 등 볼거리가 많다. 게다가 섬답지 않게 적자산, 수리봉, 광대봉, 뽀족산 등 명산도 많다.
보길도에서 어디를 가나 만나게 되는 숲과 계곡, 돌담길은 바다 못지 않다. 폐가까지도 정겹다. 한눈에 전경을 볼 수 있는 동천석실이 생긴 것은 괜한 일이 아닐 것이다.
보길도를 둘러보니 보길도시인 강제윤이 왜 이런 시를 썼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우리 사랑은 몇 천 년을 참아왔느냐/참다가 병이 되고/사랑하다 죽어버린다면/그것이 사랑이겠느냐/사랑의 독이 아니겠느냐/사랑의 죽음이 아니겠느냐//사랑이 불꽃처럼 타오르다/연기처럼 사라진다고 말하지 마라…
첫댓글 세연정 문이 특이하군요. 무희들이 춤출만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