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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묵상글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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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내가 바라는 사람보다
나를 바라는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내가 함께하고픈 사람보다
나와 함께하고픈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내가 받아들여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품는 사람보다
내가 품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내게 베푸는 사람보다
내가 베풀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살리는 사람보다
내가 살려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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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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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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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 월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09473
김레오나르도 2022.09.26 03:36
- 사탄도 이용하시는 하느님
오늘 욥기를 보면 역시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사탄에게 지지만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사탄마저 이용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과 고통을 압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보다 강하고 고통보다 강합니다.
오늘은 이점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스콧 팩이라는 심리 정신과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제가 알기로 개신교 신자이고 대부분의 심리 정신과 전문가들과는 달리
악령의 세계를 인정하고 심리와 정신과 영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루는 분입니다.
그분의 주장을 제가 다 그리고 잘 소개할 수 없지만
제가 이해한 한도에서 말씀드리면 악령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을 숙주 삼고 자기 하수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분입니다.
이는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뚫지 못하지만
약한 사람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리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누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일까?
이에 대해 그는 사랑이 강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그분의 주장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강한 사람은 악령이 고통으로 공격해도 너끈히 방어하는 데 비해
사랑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조그만 고통에도 쉽게 악령에게 굴복하고,
악령이 아니더라도 고통에 의해 쉽게 그의 인생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자신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이 약한 사람은 고통 때문에 아주 쉽게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 사랑도 의심하니 이웃의 사랑은 더 쉽게 의심합니다.
나의 고통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표시라고,
하느님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믿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욥기 1장에서는 욥이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작고 약하기에 하느님 사랑처럼 자신 있게
그리고 모질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단련하지 못하지만
앞서 봤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욥의 이러한 믿음을 믿고
사탄을 도구로 고통을 가지고 담담하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합니다.
사랑하기에 마음이 아파도 매를 대고,
더 사랑하기에 이 정도면 됐다고 하며 매를 멈추지 않고 더 매를 대는
아비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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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연중 26주 월요일-영적 밴댕이 속알딱지
http://www.ofmkorea.org/428588
김레오나르도 2021.09.27.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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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볼 때, 모든 유다인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역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어린이를 순진, 소박, 겸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 또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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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누구의 인생이든 절정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절정기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격려를 통해 찾아온다(조지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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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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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마음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 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 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 해도 안 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 된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 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글/허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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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9월에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3일에는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가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함께 했습니다. 점수를 계산하는데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순위가 바뀌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드리고, 상패를 전달했습니다. 일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상패를 받은 분들도 이해해 주었고, 기뻐하였습니다. 10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4년 전에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 어머니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이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2일에는 ‘본당의 날’ 잔치가 있었습니다. 2012년에 본당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었고,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12년 만에 본당의 날 잔치에 함께 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함께 모여 사는 것, 오직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본당의 날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우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9일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었습니다. 미카엘은 사탄을 물리치는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라파엘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천사입니다. 사탄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아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천사입니다. 저의 축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순교자성월인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 영성의 시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 곧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기 이전의 삶에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은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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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가에 관해 논쟁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런 논쟁을 했을까요? 그 안에는 어떤 욕심이 있었던 것일까요?
가끔 뉴스를 보다 보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특히 국회에서 싸우는 모습이 방송으로 송출되어 제 눈 앞에 펼쳐지면 저는 그 순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본 것에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에 실망한 것입니다. 국회에 모여있는 그 사람들은 모두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서로 의논해야 하는 대표들인데 그러고 있으니 갈 곳을 잃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누군가 갈 곳을 잃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갈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의미와 목표가 아닌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가지 방향만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목표는 바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표는 잃어버린 채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누가 더 큰가에 대해 말입니다.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으면 어떻습니까? 모두가 하늘나라를 위해 걷는 사람들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그 크기를 상관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을까요? 누가 더 큰지에 대한 논쟁 말입니다. 누가 더 신앙생활 오래 했는지, 누가 더 단체의 높은 자리에 앉았는지에 대한 논쟁 말입니다. 높은 사람은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그 생각.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하늘나라. 그 방향을 잃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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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훌륭한 의사이자 약초 학자 등으로 알려진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는 쉼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한숨을 내쉬세요. 그것은 가장 짧은 쉬는 시간입니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숨 쉬는 것은 복 나가는 일이야.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은 늘 제 한숨을 막고 숨죽이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녀의 말은 제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한숨은 가장 짧은 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제게 쉼을 주고 싶습니다. 짧게라도 말입니다.
그대도 그대에게 쉼을 주세요.
짧게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찰나의 한숨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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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찬미
“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 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교황님의 제46차 해외 사목 방문중 루벵 학생들에게 한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권력의 도구가,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나가라. 이념들의 이분법에 들어가지 마라.”
엊그제 수도원 ‘자캐오의 집’, 피정집에서 단체 피정지도중 제의방에서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에 행복했습니다. 흡사 주님 앞에 서있는 듯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당분간 10월은 이 시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지인에게 시화(詩畫)를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불암산 바라보기에 전망좋은 ‘자캐의 집’ 3층에서 탄생된 시입니다. 아마도 성인들 역시 주님 앞에서 늘 사랑의 찬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역시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 역시 앞서의 코헬렛 못지 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욥의 시련에 앞서 똑같은 그에 대한 묘사가 2회 나옵니다.
‘그 사람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하느님도 인정한 욥이었고 시련에 앞서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고, 사탄은 이의를 제기하자 하느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새삼 우리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음을,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1차 사탄과의 게임은 극한의 고난과 시련중에도 솟아난 욥의 다음 감동스런 찬미의 고백으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평소 사랑의 찬미로 일관된 삶임을 입증하는 고백입니다. 더불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오늘 9월 순교자 성월 마지막날 9월30일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런 성인 예로니모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역시 순교적 삶에 한결같았던 성인으로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하는 분입니다. 당대 성인의 학문의 깊이는 성 아우구스티노 외엔 아무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합니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불가타(일상적, 대중적이라는 뜻) 성서 번역이요 391년부터 406년까지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하니 성인의 진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끈기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이 뜨거웠습니다. 성인의 편지에 나오는 권고가 심금을 울립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다가 420년 오늘 9월30일, 72세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욥의 경천애인의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제자들에게 유언같은 교훈 둘을 선물하십니다. 동상이몽,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중인 철부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가장 취약하고 약하고 무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사랑의 환대로 맞이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며 궁극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 아버지를 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무력하고 불쌍해 보이는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며 우리의 전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얼마전 공동체 회의 결과에 ‘신의 한수’라 감탄했고 민심은 천심임을 확인하고 기뻤습니다. 엄격한 비밀투표를 통해 이심전심 가장 약해 보이나 실상은 똑똑한 수도형제를 총회대표로 선출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주님의 가르침도 소중합니다.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막았다는 기고만장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과 같은 내용의 어제 마르코 복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진리앞에 일체의 기득권이나 엘리트주의는 모두 배격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진리의 주님을 그들만의 소유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리앞에 지극히 겸허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사랑과 찬미의 겸손한 이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이신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작은 이들’을 사랑하며, 진리의 사람, 찬미의 사람, 겸손의 사람, 경천애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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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6-48)
단순함과 순수함의 본보기
주님께서는 아이의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어린이를 세우셨을까요? 그분은 어린이를 순수함과 겸손함의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어린이는 속이려는 마음이 없고 순수합니다. 생각이 단순하지요. 어린이는 높은 지위를 탐하지 않고,남보다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함과 순수함의 본보기로 어린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 아이를 실례로 삼으시어, 아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 발자취를 따라 결을 만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태양은 하느님과 같습니다. 태양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들이 있습니다. 태양의 가장 높은 부분은 겸손이라는 가장 낮은 심연에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께 구걸할 필요도 없고,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은 신성은 겸손이라는 심연 이외의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하느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강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모든 천사와 성인들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차지합니다. 하느님과 겸손한 사람은 완전히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행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랍니다. 하느님이 하나의 생명이자 하나의 존재이듯이, 겸손한 사람도 그러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졌다면, 하느님도 어쩔수 없이 그와 한패가 되어 지옥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지옥마저 하늘나라와 같을 것입니다.(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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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1.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떼이야르 드 샤르뎅
존재가 발원한 샘, 그것은 불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불이 땅덩이 깊숙이에서 솟아오른다는 착각에 붙들려, 생명의 빛나는 궤적을 따라 그 불길이 댕져진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자비로이 저희의 이 생각이 거짓이요 착각임을 알게 해 주시고, 당신을 발견하려면 저희가 이 착각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태초에 지성과 사랑을 갖추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은 물질 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것들을 다 지배하고, 그것들에 꼴을 갖추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초에 차가움이나 어두움이 아니라 〈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에서 빛이 서서히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빛〉이 있어서, 끈질기게 그러나 어김없이 저희의 어두움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저희로 말하면, 저희 자신은 어두움이요 허공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의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한 중심 영역의 바탕이시며 그것을 와해되지 않게 잡아 두고 지속시키는 분이십니다.
시간의 흐름도 공간도 없는 이 중심 영역에서 우주는 솟아 나오고 마지막 완성을 향해 성장해 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저희 눈에 아찔할 만큼 거대해 보이는 한계선마저 뛰어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존재입니다. 어디에나 존재들만이 있습니다. 창조물의 붕괴와 그 원자들의 충돌 이외에는, 어디에나 존재밖에 없습니다.
타오르는 영, 위격적이고 본원적인 불, 합일의 실제적 지향점, 범신론자들이 꿈꾸는 멸아적 융합에 비해 이 실체야말로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사랑스럽고 바람직합니다. 그러하오니 영이시여, 불이시여, 다시 한번 내려오시어 새로 만들어진 이 가냘픈 물질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 주소서. 세상은 오늘 이 새로운 피조물로 새 단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저희가 아주 작은 일에서마저 당신께서 하실 일에 참견하거나 미리 내다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께서만 시작하실 수 있으십니다. 저의 기도 역시 그럴 뿐 아니라, 저의 기도야말로 그것을 마음에서 솟아나게 해 주시는 분은 당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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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욕심쟁이 거인」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는 자신이 가꾼 정원에 동네 아이들이 몰래 들어와 노는 것을 싫어하여 아이들을 모두 쫓아내는데 그러자 갑자기 봄은 사라지고 겨울이 계속되며 키다리 아저씨의 마음도 꽁꽁 얼어버리지요. 어느 날 한 꼬마(=예수님의 현신)로부터 봄이 시작됨을 알았고 꼬마의 정체를 알면서 이후에는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정원에 놀러 오는 것을 막지 않자 언제나 봄이 찾아왔지요. 한참 시간이 흘러 그 키다리 아저씨가 죽자, 예전의 그 꼬마가 다시 찾아와 그 키다리 아저씨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니 키다리 아저씨가 꽃밭에 누워 행복한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요?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는 꼬마(=예수님)를 만남으로써 단지 키가 큰 사람만이 아니라 마음도 커졌기에(=회개를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잖아요. 우리 역시도 단지 키만 큰 사람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9,48)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가장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거듭날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 역시도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처럼 마음이 부드럽지도 못하고 따뜻하지 않고 오히려 차갑고 무뎌져 가는 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요즘 제게는 ‘사라짐과 살아짐의 경계선’에서 붙잡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놓아야 하는 것과 싸우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짐의 삶을 살고 싶지만, 마음 한편에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아직도 준동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늘나라로 들어 갈 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낮아지고 작아지려고 하기보다 더 크고 힘 있는 자가 되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자신을 더 낮추고 작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18,3)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담긴 지향처럼 지금껏 자신이 주인처럼 걸어왔던 길과 삶의 태도가 아닌 주님을 자기 삶의 참 주인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했던 높아지려는 삶에서 벗어나 내려가는 삶, 자신을 낮추는 삶, 하느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 온유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요3,3)이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삶입니다.(9,48참조)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48)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은 단지 어린이만이 아니라 최후 심판의 장면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는 말씀에 드러난 것처럼 작은 사람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베풀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며, 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임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마태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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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 /
박윤식 [big-llight] 2024. 09.29.19:49 ㅣNo.176402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혼재하고 타 종교관은 어쩌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마저 옹졸하게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을 그런 편협한 생각이 아닌, 모든 걸 품는 큰마음으로 본다. 큰 건 작은 걸 담기에 그렇다. 예수님 오신 이유는 능력 드러냄이 아닌 우리의 구원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가장 작은 이가 가장 겸손한 이다. 작은 이를 받아들이면, 하느님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라.”라고 하셨다.
깊은 계곡이 물을 받아들이듯 깊은 겸손이 모든 이를 포용할 수 있는 힘이다. 교만하면 죄를 짓고 그 죄책감을 무마하려고 다른 이를 심판한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단다. 권력 있는 정치인, 돈 많은 이 곁에 많은 이가 모인단다. 반면 힘없는 순진한 이, 돈 없는 이 주위엔 모여드는 이가 별로라나. 그들은 작은 이이기에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일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다.’라신다. 어린이는 사회의 가장 작은 약자였기에 그들을 가까이에서 껴안아야만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한 어린이를 제대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믿는 이의 공동체는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는다. 어쩜 모든 이들은 저마다 내노라 행세하고픈 욕망을 가진다. 그러나 주님의 공동체는 이런 속물적인 것들을 과감히 털어 버려야 할게다. 그래야만 주님 따라 나설 수가 있다.
사실 힘 있는 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독재주의적인 발상에는 과감히 저항할 수 있는 ‘신앙적 용기’가 실은 필요하리라. 우리가 가진 욕망 중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일 게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이냐?”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어쩜 자연스럽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력 욕심 극복 방법을 알려 주신다. 어린이의 단순함이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가치는 지상의 가치와 매우 다르단다. 하늘 나라의 권력은 인간의 속된 계산법을 넘어선다. 그래서 가난과 겸손 속에 자리 잡는 게 하늘 나라가 지닌 권력이라나. 큰 이 되고자 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 축에도 들 수 없음을 꼭 명심하자. 그분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새겨 두어야할 것은, 가장 작은 이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가 하는 일을 자랑 삼아 하는 그런 이가 아닌, 남을 위하여 봉사하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겸허한 자세로 일하는 이를 말하리라.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우리는 쉽게 사기를 치곤 한다. 우리가 마련한 행사보다 다른 이의 것이 더 성공을 거두게 되면, 마음 한구석 어디 꼭 불편해지기도 하리라. 하느님 일을 하려면 사심 없이 오직 하느님의 그 영광만을 바라봐야 한다.
둘러보면 우리 주위에는 말없이 자기 할 일만 수행하는 이는 어디에나 있다. 어떤 단체든 내색하지 않는 이는 있기 마련이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이다.” 눈앞에만 매달리다보면 아마도 멀리 보지 못하게 되리라. 얕은 강이기에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깊은 강은 언제나 조용히 흐른다. 속 깊은 이는 깊은 강 닮은 이일 게다. 이 땅에 그런 지도자가 많아져야만 한다.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라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꼭 깊이 되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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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욥기에는 몇 가지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고통은 큰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는]”(욥 1,1)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욥기가 던지는 큰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답을 만날 것입니다.
다른 질문들 가운데 오늘 사탄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까닭 없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말에서는 ‘거저, 공짜로’를 뜻하기도 하는 낱말입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은 하느님께, 먼저 하느님께서 욥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부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그럴 때도 인간이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욥기의 사탄이 오늘 나를 이렇게 시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 하여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욥은 아들들과 딸들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수한지를 시험하는 순간들은 계속 주어집니다.
그 시험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나의 경외심의 깊이를 헤아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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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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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카복음은 독특하게 오늘의 말씀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바로 직전에
배치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이 어렴풋이나마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은
이제 왕으로서 다윗 왕궁에 입성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스승님이 이제
세상을 다스릴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서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 배경에서 보면
요한의 말도 이해가 됩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만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이
나중에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면서
한 자리를 요구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예고하셨지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모습과 연결됩니다.
그들이 생각한 사람의 아들은
화려한 왕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제자들 자신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다른 사람은 제외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 수난의 의미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아의 모습은
수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은
어느 특정 사람들만이 위한 것이 아니기에
누구를 제외하지도 않습니다.
즉 화려한 왕이 아닌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는 것은
모두가 평등한,
더욱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는 곳이
하느님 나라임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의미를 우리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의도가
우리 각자 어느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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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때면 즉시 성경을!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텐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 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동안 한사코 미사 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경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간의 세밀한 번역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서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에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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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절)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절)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를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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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 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은 그의 제국을 심각하게 약화했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추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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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바벨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6-48)”
1) ‘가장 큰 사람’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아직 서열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마태 16,18)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일로는 생각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서열 문제로 논쟁을 한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옳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도’로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표현하는
것은(에페 2,20; 묵시 21,14)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돌입니다.
교회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위치가 아니라 섬기는 위치입니다(루카 22,25-26).
<흔히 교황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일 뿐이고, 교황들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교황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입니다.>
2) 여기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이라는 말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나 권력욕이 더 컸던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냥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래도 그 욕망은 위험한 함정입니다.
더 큰 죄로 인간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욕망대로 높아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보면 하느님의 위치까지 가게 될 텐데, 로마 황제들처럼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 하게 되면 결국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바벨탑으로 만들어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탄은 처음에 하와를 유혹할 때에 바로 그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사탄의 말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으면 선악과를
따서 먹어라.” 라고 유혹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욕망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인간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등은 바로 그 욕망에서, 즉 그 원죄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 위치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욕망은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반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바벨탑이 무너지듯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타이르신 것은, 그런 어리석고 허무한 욕망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그들이 파멸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3)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로서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나를 섬기듯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또는 ‘가장 작은 이’를 뜻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적선을 행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주님을 섬기는 것과 똑같이
‘가장 작은 이’를 섬기라는 뜻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섬길 수 없습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낮춤’과 ‘섬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 말고, 낮은 자리로 가려고 노력하는 ‘선의의 경쟁’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진심으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다 똑같이 하느님께서 높여 주신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만일에 자기 혼자서만 높아지고 싶다고 고집 부린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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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46-50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이 지위가 높아지면 어려울 때 일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잘난 듯이 뽐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지요. 부모는 자녀가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그러려니’하고 이해합니다. 자신도 어린 아이였던 시절 그와 비슷한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었고, 자기 부모님이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셨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서툴렀던 ‘올챙이 시절’을 거쳐 어엿한 어른이 되었기에, 지금 그 올챙이 시절을 겪고 있는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개구리’가 되었다고 해서 자녀를 개구리의 기준으로 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작아짐으로써 자녀와 똑같은 올챙이의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기에, 그들이 부족하고 약해서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만해도 정말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조금 성장했다고 우쭐해져서는, 서로 ‘내가 더 잘났네’하며 되지도 않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이 곧 도래할 거 같으니, 거기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하느님 나라에 기여한 바가 더 큰지를 따져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진짜 열을 올리며 집중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어린이’를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가장 작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어린이는 어른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힘 없고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런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건 작고 약한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수많은 ‘아기 예수님’들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허물과 약함을 지닌 상태 그대로 포용하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함을 가리키지요.
한편, ‘가장 작은 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어린이처럼 작고 약한 이들을 그저 내 안에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가 어린이처럼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며 자녀들과 같은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야 어린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입장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 인간을 더 폭넓게 이해하시고 깊이 공감하시며 제대로 사랑하시기 위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 되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당신 모습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당신을 알아보고 사랑함으로써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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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영국의 철학자이며 정치 이론학자였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절대 권력을 가진 체제에서만
시민을 보호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리바아탄 Leviathan’ (1651년 출간)에 이런 내용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레비아탄’(위키백과 참조)이라말은 구약성경, 이사야 27,1, 시편 74,14; 104,25-26,
욥기 3,8에 나오는 것으로 ‘바다괴물’로 다르게는 ‘혼돈의 힘’, ‘사탄’으로도 표현됩니다.
이 레비아탄이 하느님의 창조물로 표현하는 시편저자의 노래를 잠깐 볼까요?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크고 작은 생물들이 우글거립니다.
그곳에 배들이 돌아다니고 당신께서 만드신 레비아탄이 노닙니다.”(시편 104,25-26)
그래서 그는 인간이 권력을 가지려는 본능에 대해서 이렇게 홉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권력 중 최대의 권력은 다수의 인간들이 동의하여 오직 일인의 자연적
또는 사회적 인격(person)에 그 권력을 집결시키고 그 일인의 인격이 그의 단일 의지에
의거하고 따르는 그들 모두의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곧 국가의 권력이 바로 그 경우이다.
또는 당파(faction) 내지 당파 연합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권력 사용은 개개인의
복수 의지에 의거하고 따른다. 따라서 하인을 소유하거나 친구를 갖는 것은 권력이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결합된 힘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을 갖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그 힘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특히 정치꾼과 장사꾼에게서도 흔히 보는 현상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제배대오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 권력의 자리를 청할 때
타이르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던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 권력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제자들도 길에서 자기들 중에 누가 제일 높은지에 대해서 이미 다투었거든요.(루카 9,46)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예수님께서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어린 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가장 작은 사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바로 이런 어린이들 것이라고 하시지요.
인간은 흙에서 태어났고 또한 먼지와 같은 존재이지요.
구약에서 부의 상징이던 욥은 마귀의 농간으로 자신의 받았던 모든 것을 잃고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0)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재물과 친구와 이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합니까!
사실 거기에는 질투도 미움도 고통도 없는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빈손의 아름다움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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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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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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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이키는 삶
<2024.9.30>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5:23~38절)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이키는 삶❞
❚ 믿음의 초심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 끝까지 믿음의 길을 하루하루 걸어가야 합니다.
✔ 돌이키는 삶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마음의 변화를 결단해야 합니다(23~26절).
유다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브가히야가 므나헴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위에 올라 이 년간 다스렸습니다(23절). 그 역시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24절). 왕위에 오른지 이년 되었을 때, 베가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고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25절).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습니다(26절).
죄는 마치 구름이 태양의 빛을 가리는 것처럼 그리고 안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것을 그냥 방치해 두면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의 무성한 가지처럼 여러 방향으로 퍼져 나아가 삶을 혼란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햇볕이 나면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내 안에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면 죄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변화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변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마음을 찢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온전히 씻어 내므로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경고에 민감해야 합니다(27~31절).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렸습니다(27절). 그 역시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28절).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앗수르로 사로잡아 갔습니다(29절).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르말랴의 아들 베가에게 반역하여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습니다(30~31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우리의 중심이 흔들리면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욕심과 탐닉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탐욕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잠시 성공하는 것 같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기준으로 평가하시기에 죄를 짓는 일에 습관화되지는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말씀을 깊이 깨닫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영적인 경고에 민감하여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끝까지 초심을 지켜내야 합니다(32~38절).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담이 이십오 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립니다. 그는 아버지 웃시야가 한 것을 그대로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을 하였습니다. 요담 왕의 업적 가운데 성전 일부를 건축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담의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고, 이 때부터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담 왕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 드리고 분향하는 문제로 인해 주변 국가들을 통해 유다를 징계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요담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완벽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분 앞에서 정직히 행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끝까지 신앙의 초심을 잃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풍성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품었던 소명을 끝까지 지키고자 애쓰되 무엇보다 오랫동안 묵인된 채 방치되어 있는 죄악의 찌꺼기들을 온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온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열정을 알아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초심이 삶의 중심이 되어 믿음의 길을 걸어가므로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죄악을 방치해 두지 말고 회개하여 영적 충만한 삶을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초심이 삶의 중심이 되어 믿음의 길을 하루하루 걸어가므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5:23~3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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