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조금씩 비를 뿌리던 하늘이 오후 내내 먹구름만 잔뜩 낀 무거운 모습으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아니, 어디가 하늘인지 알 도리가 없도록 하루 종일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네요.
이곳은 남도의 끝, 여수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열차를 타고 내려오며 참 많은 생각을 했었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자부심이 묻어나던 새마을 열차는 이제 철 지난 운동장의 오색 만국기처럼, 이미 끝나버린 연극 무대의 소품마냥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을씨년스러움마저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12시가 되기 전에 이미 동이 나 버린 도시락을 사지 못해 샌드위치 한개와 맥주 한 캔으로 점심을 때우고 자리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 후 비몽 사몽 간에 제 귀에 들리던 하차 안내 방송은 분명히 '구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섬진강가 구례...
그렇다면 아까 전주를 지나서 지리산을 지나왔다는 것인가?
바깥에 보이는 자그마한 강은 분명 언제인가 어린 딸과 집사람을 데리고 찾아왔었던 섬진강이 맞았습니다.
열차를 타며 그 열차의 행로조차 확인 안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요.
십 수년만에 타는 열차, KTX도 운행되지 않는 곳, 어느 선로를 통해 가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목적지 역 이름을 말하고 약간의 돈을 건네주고 받은 승차권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자그마한 가방을 들고는 그냥 올라탔던 열차였습니다.
사막을 떠나올 때 애당초 계획했던 많은 것들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약 1년 정도 연기됨에 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남도의 한 작은 회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연락을 받았고, 막연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그러자고 동의했습니다.
모든 조건도 악착같이 씨름하는 것조차 싫어서 그저 회사에 일임하고는 그냥 열차를 탔지요.
수요일, 목요일 이틀 저녁을 회사 사람들과 술로 보내고 회사차를 몰고 김포까지 가던 길, 순천에서 길을 놓쳐 용담댐이 있는 진안까지 아무도 없는 비오는 산길을 홀로 가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시커먼 공간 뿐, 전조등에 비추이는 것들은 이름모를 산등성이나 오래된 나무들 뿐이었지요.
평소에는 그리도 싫어하던 고속도로가, 옆으로 함께 내달리는 차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습니다.
당분간 이곳 남도에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일단 정리하고, 애당초 계획했던 일들이 다시 풀리기 까지는 별다른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 편으로는 나도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목을 매고 있어야 하는것인지, 아니면 연연해 하지 말고 그저 주어지는 일이나 열심히 처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혼란스럽습니다.
은근히 경계심을 보여오는 비슷한 급의 다른 사람들을 보며 긴장해 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저 무시하고 내 뜻대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혼란스럽네요.
단선 철도, 외줄기 길을 타고 온 이곳에서 첫번째 편지를 씁니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2010. 3. 2. 여수에서
첫댓글 아하! 사막이 아니라 남도로 가셨군요. 아주 먼 곳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도 생활에 잘 적응하시고 소식 종종 주세요.
희망을 접고 다른 곳으로 오기는 처음입니다. 잠시 유보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답답하네요. 이곳에서 뭔가 희망을 찾아 보아야 할 터인데 아직은 힘이 많이 빠져 있습니다. 얼마나 지낼지도 모르면서 답답한 마음에 무조건 숙소에 인터넷부터 연결했습니다. 약정기간을 얼마동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흘려 들으며 그저 그러마고 했다가 오늘 내용을 보니 3년 약정이라 하는군요. 희망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어둠은 아침을 밝게합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그 터널 속의 어두움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을 때가 있더라구요. 남도의 따뜻하고 강인한 생명력 충만한 봄 속에서 민이님 특유의 멋진 희망을 찾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몸 건강, 마음 건강 ~!
멀리도 가셨습니다. 가기전에 연락이나 한 번 하시지... 쐬주나 한잔하게.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