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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강석경의 「인도기행」
30년 전쯤에 이 책 작가가 쓴 〈능으로 가는 길〉이라는 산문집을 읽은 기억은 나지만, 독후감은 썼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녀는 신라 능이 좋아 아예 경주로 내려와 산다는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글을 계속 쓰는지는 모른다. 「인도기행」이라는 이 책도 아마 그 무렵 그녀가 한창 글 쓰던 시기에 인도를 다녀오고 쓴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인도의 역사와 여행의 재미를 느끼게 하고, 오랫동안 여운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혼자 조용히 기억해 두고 싶은 부분만을 옮겨볼까 한다.
열차표를 사고 개찰구를 나오니 아득한 불빛 아래 낯선 사람들이 피난민처럼 기차에 앉아 있었다. 나는 비로소 멀리 떠나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어깨를 흠찔 떨며 돌아서야 했다. 그때 한 노파가 차창 가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눈물을 닦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손주들을 배웅하나 보다. 그 광경이 마치 한국의 어머니들과 같았다. 그것은 내게 안도감과 용기를 주었다. 어디서나 인간은 같다는 것, 그러니 낯선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 말 것, 차 안에서 인도 남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고는 신상에 대해 물어 와 대답해 준 뒤, 평소부터 궁금했던 인도인의 내세관에 관해 사전까지 펼쳐 보면서 물었다.
“당신들은 전생과 업보에 대해 믿느냐?”
“그렇다. 인생이란 탄생으로부터 죽음으로의 여행이며 죽은 뒤에 환생한다. 현생에서의 행위는 내생의 형태를 만든다.”
“인과 관념은 불교와 같구나”
“붓다의 부모는 흰두였다. 흰두이즘은 곧 인생의 길이다. 흰두는 종교가 아니다”
“붓다가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업을 벗어나려고 했다. 붓다는 생의 굴레를 끊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초월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나는 붓다를 믿는 무신론자지만, 흰두신에도 흥미를 느끼며 공부하고 싶다고 애기하고는 ‘다우리’에 대해 불쑥 말을 꺼냈다. 다우리는 인도의 악명 높은 지참금 제도로 2년 전에도 여대생 자매가 목을 매달고 죽은 사건이 보도됐다. 결혼지참금이 인도 여성의 삶을 조이고 있음은 인도에 있는 동안 내내 피부로 느꼈다. 나는 화랑에서 보았던 포스트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건축 공부를 한다는 대학생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내게 보여준다. 그는 기호까지 그려서 인도 여성과 다우리를 관념적으로 연관시켰다. “인도에서 여성은 곧 지구이다. 지구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극도의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내와 사랑 보호의 상징이다. 인도인 여자는 받지 않고, 오직 주는 것만 안다. 다우리는 가정을 세우는 선물로써 주어진 것이고 그것으로 새 인생이 시작된다.”
나는 인도인들은 시인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현실에 눈감고 있는 인도 남성의 무지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생화장시킨 적도 있고, 과부의 재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루다’라는 여성의 은둔 관습도 있어서 간디도 개탄했다. 기성세대도 아닌 대학생이 여자는 대지처럼 오직 주는 것만 할 수 있다며 다우리를 합리화하는 것을 보고 인도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기우일까. 인도인들은 주어진 생명력을 다 쓰지 않고 깨우치려는 노력을 포기한 듯한 인상을 받노라고 하자 현실에 만족하므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단다.
이상하다. 인도의 땅은 사람으로 하여금 체념케 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밤새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거대한 땅이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일깨워 주는 것일까. 무한정 대기하고 있는 포스트 속 소녀의 동자 없는 흰 눈이 망망한 바다 같기도 하고 빈 하늘 같기도 하다.(62쪽)
“오백 루피를 빌려달라”
“많은 돈이다. 인도 남자들은 여자에게 돈꾸기를 좋아하는구나”
경멸의 표정을 지었지만, 또 한 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잠시 후 이백 루피를 꺼내놓으며 갚을 필요는 없다. 네 친구에게 달러를 바꿨으니 그건 커미션이다. 무표정하게 말했다. 존이 주춤하니 주머니에서 스위스제 등산용 칼을 꺼내 보였다.
“날이 곧 더워진다. 마두라이는 남쪽이라 더욱 덥다. 난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오백 루피 정도는 필요한데 다른 친구에게 꾸겠다. 그럼 이걸 가져라”
“미리나가 준 거니? 난 필요 없어”
치사한 인간, 소리가 뱃속에서 올라오는데 존은 돈을 주머니에 넣더니 난 널 잃어버렸어! 눈을 번뜩이며 내뱉었다. 그것은 거의 절망적인 어조였다. 아메리카 대학생 존은 인도 청년의 갇힌 현실을 보여준다. 이국 여자와의 여행계획은 가난과 더위로부터의 멋진 도피가 될 것이다. 간디 동상이 이 불쌍한 청년을 굽어보고 있었으나 나는 간디도 마리아도 아니므로 자존심마저 내팽개친 한 인간의 천박함과 염인증을 느꼈다.(78쪽)
그뿐인가. 주마다 언어가 달라 영어를 공통어로 쓰는 나라면서 그 흔한 팝송 한번 듣기 힘들다. 텔레비전에서, 버스에서, 상점에서도 힌두 음악이 귀 아프게 울린다. 이에 비하면 한국에는 자기 것이 없다. 지상의 모든 것이 걸러진 가장 아름다운 불상을 가졌고 생명을 사랑하여 나뭇가지처럼 왕관을 만들 줄 알았으며, 중국도 탐내는 고려의 비색을 불 속에서 창조했으며, 맑은 민족성이 조선의 백자에서 우러나왔다. 그러나 지금 어디서 그 맥을 찾아야 할까. 내 것은 다 아궁이에 버리고 인정스럽던 표정마저 살벌한 이기주의의 얼굴로 변했다. 옛 문화가 찬란하다 한들 오늘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무슨 소용이랴. 고귀한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우리 후손들은 단 한 길만을 따르는 인도인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 헤세도 그것이 바로 흰두교의 절대적인 힘이라고 확언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애기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113쪽)
사원 전체에 새겨진 조각들은 흰두의 신들, 무용사와 악사, 남녀신의 포옹, 남녀가 얽혀 있는 애욕의 모습들이다. 고개를 쳐들고 위를 올려다 보면 거의 인체 크기로 조각된 교합하는 남녀 입상이 눈에 띄고 기단부에 장식된 스물네 개의 수레바퀴 살 속에도 성교 장면이 양각되어 있다. 그것은 밤을 표현한 것으로 절반은 일하고, 거울을 보면서 화장하는 낮의 모습도 양각돼 있다. 수레바퀴는 스물네 시간을 표현하며 또 윤회사상을 상징한다. 세월에 부서져 나간 수레바퀴를 바라보는데 주황색 천을 두른 인도인이 스쳐 가다가 기단부의 양각 하나를 보란 듯이 가리킨다. 코끼리들의 성교 장면이다. 긴 머리 흰두교인이 두 번째 내 앞에 나타나 기분이 상해 자리를 뜬다. 인도인들은 인간의 본능을 표현하는데, 나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노골적이다. 카주라호에서 이미 에로 조각을 보았지만 코나락의 태양 사원 조각은 부분적으론 보다 거칠고 조잡하다. 혼음과 자위 장면, 갖가지 자세의 에로 조각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양적으로도 넘친다. 모두가 신화나 전설,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표현이 철저히 사실적이어서 혀를 내두르게 한다.(122쪽)
인도의 젖줄 갠지스강은 깨달음을 얻는 성자들과 순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성지다. 예로부터 철학과 종교사상의 중심지였으며 산스크리스터어로 ‘빛이 비추인다’는 뜻을 가진 ‘카시아’라고도 불리는 도시다. 바라나시는 카투만두에서 곧장 날아와 첫발을 디뎠던 곳인데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공포를 느끼다시피 했다.
길에 늘어앉아 구걸하는 거지 때와 몸에 뱀을 휘감은 쉬바신, 시체들이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화장터, 불결해 보이는 강물에 목욕하는 힌두교인들, 이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한 성지의 거룩함을 뒤엎는 것이었다.
채소전 앞에 소들이 배회하며 쓰레기를 먹어 치운다. 인도에선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임자 없는 소 떼를 흔히 볼 수 있고 복잡한 도시에서도 차 틈에 끼어 멋대로 다니는 소가 많다. 소의 천국이라 할 만큼 대접받는 것 같진 않지만, 힌두교에선 암소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상징이며 생의 모체이다. 이방인에게 신기한 풍습으로 보이지만 왜 그들은 암소를 숭배할까? 인도엔 많은 암소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지만 숫소는 상대적으로 모자란다고 한다. 인도 숫소는 수명이 다하는 최후까지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밭을 갈고 우차용으로 농부의 손발이 되어 주는 역할을 숫소가 한다. 대신 암소를 보유한 농부는 숫소를 생산해 줄 공장을 갖고 있는 셈이다. 기아를 겪는 동안 농부들은 가축 도살의 유혹을 느끼지만, 소를 없앤 후 비가 오면 토지를 경작할 수단이 없어진다. 암소숭배는 인도 농부들이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 곡물생산에서 고기생산으로 바꿀 경우에는 식비값이 높아지고 가정의 생활수단은 더욱 낮아질 뿐이라는 것도 한 이유다. 미국처럼 기업농이 발달한다면 2억 5천만에 달할 실직 농민들에게 직업과 집을 마련해 주어야 하므로, 현재와 같은 소규모 가축 위주의 농업이 유지되어야 한단다.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소는 인도적인 이유를 보여주고, 이것은 물레와 잘 어울리는 관습이며 채식주의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생의 외경, 엄격한 비폭력주의와 어울리는 풍습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린 헤리스는 이런 것도 간과하지 않으면서 간디가 암소숭배를 열렬히 찬성했던 점을 상기시켰다. 암소숭배는 간디가 대중들을 산업화로 인한 파멸에서 보호해 주기 위한 투쟁방식의 하나였다.(144-145쪽)
화장터에서는 시체가 타고 있는데, 위쪽엔 카핀으로 덮인 시신 몇 구가 놓여 있고 주위론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인도인들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믿기에 이 모든 풍경들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인간이 한 줌 재로 화하는 것을 보면 죽음에 대한 관념조차 부질없이 느껴진다. 허무를 감상 없이 정면으로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인도의 화장풍습은 멋지다. 나도 죽음을 흔적 없이 태우게 하리라. 무덤은 때때로 망자나 살아 있는 자의 삶에 대한 미련 같아 보인다. 캔지스 강가에는 17군데의 화장터가 있고 하루에 2백구 이상을 태운다고 사공이 화장터 가까이로 노를 저으며 일러준다.
(146쪽)
죽음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삶이 운집한 가장 인도적인 도시 바라나시! 카투만두에서 곧장 날아와 첫발을 디뎠던 곳인데 그때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공포를 느끼다시피 했다. 길에 널어선 구걸하는 거지 떼와 몸에 뱀을 휘감은 쉬바신, 시체들이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화장터, 불결해 보이는 강물에 목욕하는 힌두교인들, 이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한 거록함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다시 바라나시로 찾아온 것은 온갖 더러움,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결코 빈곤하지 않다는 것, 들끓는 원형과도 같은 풍경속에 강렬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144쪽)
시체는 물결 따라 흘러가고 노을이 갠지스 강을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옆으로 세 소녀가 탄 배가 지나가고 나는 아이들에게 눈인사를 한다. 셋다 열 살 안팎으로 보이고 수줍은 듯 말을 하지 않아서 순진한 아이들인가 싶었다. 배가 다가오더니 그중 큰아이가 꽃과 불 켜진 심지가 담긴 나뭇잎을 내게 준다. 그 옆의 소녀는 내게 보여주듯 촛불이 켜진 또 하나의 나뭇잎을 강에 띄워 보낸다. 이끼빛 물결과 불꽃은 가물거리며 밀려가고 나는 좀 전에 시체를 본 것도 까마득히 잊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꽃이 담긴 나뭇잎을 받아들고 멍청할 만큼 행복한 표정을 짓는 내게 표정이 돌면한 아이가 루피! 하고 손을 내민다. 그러면 그렇지. 나도 당연한 듯이 동전을 주면서 누가 인도를 이렇게 만들었나 안타까워한다. “소녀들의 가족 중 이날에 죽은 사람이 있었나 보다. 바라나시에서는 꽃과 촛불이 담긴 나뭇잎을 해마다 기일에 띠운다”미끄러져 가는 배를 젖던 노인이 내게 일러 준다.(150쪽)
바라나시에서 릭샤를 타고 세존이 처음 설법하신 곳 사르나트로 가다. 보드가야에서 대각을 얻은 뒤 일주일 정도 걸어서 당도한 곳. 부처님은 여기서 그와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했다. “비구들이,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고 늙는 것,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증오하는 자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 영락을 잃는 것도 괴로움이니라. 이러한 苦는 我가 근원이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 이 세 가지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느니, 먼저 이 고를 알고 괴로움이 계속하는 집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멸할 수 있는 길을 얻어야 한다. 거기다 도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느니. 苦集滅道 영원히 변하지 않는 네 가지 진리인 四聖諦의 가르침은 바로 이 사르나트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사르나트는 기원전 2500년 경에 형성된 큰 도시였다. 현장은 7세기 중반까지도 1500명의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세운 다메크 탑만 옛 영화를 보여줄 뿐이다. 녹야원으로 불리니 사슴이 뛰놀았을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런데 석가는 이 평화로운 뜰에서 고통을 왜 깨우치도록 설법을 했을까? 행복해 보이는 삶을 누리면서 현실의 허상을 꿰뚫어 보신 분, 생명의 고통을 직시하고 본질을 찾고자 구도의 길에 들어섰던 현자, 석가는 첫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후루’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라후라는 장애라는 뜻이다.(154쪽) 그것이 무슨 뜻일까? 어찌 범인이 성인의 뜻을 알랴.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했을까. 이것은 내가 서울을 떠날 때부터 품었던 의문이다. 나름대로 판단한다면 불교는 인도 민족의 정서에 맞지 않았던 듯하다. 내세에 희망을 거는 인도인들, 생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해탈을 위해 자의지를 강조한 불교는 낙천적인 인도 민중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다. 즐기지 못하므로 혼자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힌두인들, 이지적인 불교는 삶에 맹목적인 의지를 정복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들은 생명의 본래적인 힘을 보다 찬양한다.
아쇼카 왕비가 성장했던 도시 비디샤를 거쳐 우다이기리로 가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세워진 굽타시대 석굴은 절벽 같은 암석을 파 20개의 굴을 만든 것으로 멧돼지로 현현한 비슈누와 힌두신들을 모시고 있다.
창밖을 보니 스투파가 솟아 있는 모습이 정겹다. 싱겁게도 전생에 여길 왔나 하고 생각하다가 그토록 낯익은 이유를 알아냈다. 박생광 선생의 스케치에서 본 장면이었다. 언덕에 감도는 적요까지 선생의 그림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서 스케치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인도, 참 거대한 정신이야, 인도에는 영원이 있어요. 인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 않고 안심하고 삽니다. 태어나는 것은 죽기 위해서고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어요. 나는 신도 운명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인간이 재로 끝난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아. 인도에 갔다 와서 내세가 있다고 믿고 싶어졌어. 후회 없이 죽으려면 인도엔 꼭 가보세요”
“붓다의 고향이다. 보석을 깔아놓은 야경이다. 홍콩과 방콕과는 다르다. 나의 꿈이었기에 그런가?”하고 7년 전 팔순의 나이에 처음 인도 땅 뉴델리에 착륙하면서 되뇌었다는 박생광 노화백, 인도 여행 후 남은 생애에 아름답고 강한 그림을 그리리라 하시더니 쌓아둔 화선지를 다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지만 아마도 단청이 꽃핀 화폭처럼 화려한 내세로 가셨으리라.(176쪽)
샤자한 왕은 힌두교를 박해하고 타지마할을 짓느라 국고를 낭비했지만, 그의 치세 때 아그라의 진주사원, 델리의 자마 마스지드 등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면서 무굴제국에 공채를 더했다.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된 아치형 창으로 외부의 빛이 새어들고 실내 한가운데는 왕가의 대리석 관들이 놓여 있다. 왕의 석관은 크고 정교한 문양이 조각돼 있다. 무슬림 왕족의 묘소는 독특하다. 그들은 왜 방에 관을 모셨을까? 그들이 생전에 살았던 공간이 곧 무덤이다. 코발트 색채가 지워지지 않은 돔 한구석에는 새들이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천상을 향한 드높은 돔을 올려다보면서 죽음을 외쳐보고 싶다. 죽음·죽음·죽음…, 죽음이 응답하듯 메아리치며 허공으로 사라진다.(185쪽)
사람이 수양을 많이 하면 짐승의 경지에 가고, 거기서 더 가면 나무의 경지에 이른다더니 낙타를 보니 알겠다. 뙤약볕 아래 사명인 양 묵묵히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사막을 건너는 법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인생의 사막을 건너는 법 그것은 순명하듯 견디는 것, 자연법에 따르는 것, 그것뿐이다. 4월부터 더위가 시작되어 등엔 땀이 흐르고 맨발이 따가워서 다시 양말을 신는다. 주변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원이 있어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선다.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신을 모셔놓고 맨 안쪽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우리가 인사하니 오라고 손짓하여 차를 대접한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지만, 그의 덤덤한 표정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이따금 씩 낙타를 탄 여행자들이 지나갈 뿐 아무도 없는 황야에서 그는 오직 신만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일까.(196쪽)
1395년에 지어진 원래의 목조사원은 두 번이나 불탔다는데 사원 뜰에선 두건을 쓴 여성들이 기도하고 있다. 회교 규칙상 여자들은 신전 안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남자들만 안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고 있다. 마호멧(숙소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여자들은 달거리를 해서 더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건 자연이라고 반박했지만, 마호멧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네팔에서도 그것은 불결하게 여겨져 네팔 여성들은 월경 때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
축복이기도 하고 고통의 씨앗이기도 한 여성의 생리,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신비이지만 회교도들은 그것을 미개한 것, 죄로 파악하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낳아 죽이고 착란에 빠진 수녀 이야기〈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여자의 원죄에 대해 생각한 것이 기억난다. 신상이 많은 힌두사원에선 무신론자로서 관조하게 되지만, 상이 없는 회교사원에 오니 어딘가 신이 있는 것만 같다.
석가도 열반 뒤 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실존을 그리워한 후세들에 의해 수없이 불상이 만들어졌고, 교회도 마리아와 예수상, 십자가가 있다. 회교 사원엔 상이 없으므로 신에 대한 상상의 공간이 그만큼 커지는 것 같다. 회교에서 카페트가 발달한 것도 그 같은 이치하는 데 뜰에선 수십명의 무슬림들이 열광과 경건심으로 하늘을 향해 일제히 절하고 있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저들의 신에 대한 영광도 상상의 힘이 아닐까. (228쪽)
- 뉴델리로 돌아와서
투어리스 호피스를 찾아갈 때 기대 반 체념 반이었지만, 편지를 받곤 상반된 감정에 사로잡혔어. 아름다운 혼의 편지를 받았기에 행복했고 초록 색연필 스케치 속에 질척거리는 서울의 겨울이 떠올라서 괴로웠어.
잊고 싶은 서울.
한국은 내게 개인적으로도 상처의 나라여서 난 늘 도망치고 싶어했지. 어느 땐 내가 모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작가라는 것이 야릇한 올가미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러나 나는 용감하게 돌아가야겠지. 지하철을 오가며 읽은 김광섭의 시처럼(나는 종처럼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라고 말할 순 없지만 업 같은 내 짐을 다시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번 여행으로 인도를 잃었어. 나는 자신을 변화시킬 그 어떤 것을 찾으러 목마른 순례자처럼 길을 떠났지만 어떤 것도 결국은 내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냉혹한 진리에 다시 부딪쳤을 뿐이야.(243쪽) - 1990.5.20. 초판이 나온 이래 거의 32년 만에 읽어본 「인도기행」- 202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