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옆 산책길 물가에 누군가가 해당화(海棠花) 두 그루를 심어놓았다. 봄마다 거기서 향기와 빛에 취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옛일이 떠오른다.
해당화는 원산 명사십리가 유명하지만, 속초 해당화도 그에 못지않다. 낙산사 홍련암 뜰의 해당화, 수산에서 들어가는 여운포 드라이브길 바닷가 해당화가 아릅답다.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해당화는 양귀비가 술에 취해 몸 가누지 못하는 듯/ 꾀꼬리가 울어대어 단꿈에서 깨어나/ 방긋이 웃는 모습 더욱 맵시 고와라'는 표현이 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좋아하여,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금물 섞인 모래땅에 뿌리를 묻고 산다. 향기도 좋아 향수의 원료가 되고, 꽃잎은 말려 술을 담그거나 우려서 차로 마시고, 향기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 다니기도 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섬 마을 선생님〉 노래 첫 구절처럼, 해당화는 뭔가 애달픈 여운을 주는 꽃이다.
내가 해당화를 사랑하는 건 P교수 덕분이다. 나는 철새 따라 찾아온 섬마을 총각선생님 아니지만, 강원도에서 단일 건물로 제일 큰 20층 건물 백화점 사장이었다. 새벽에 대명콘도 골프연습장 가서, 경찰서 세무서 두 서장과 그곳 P교수해서 네 사람이 운동을 했다. 집이 모두 서울이라 연습 끝나면 같이 동명항 가서 생선 매운탕 먹은 후 일터로 출근했다.
그런데 두 서장은 일과가 바쁘고, 나와 P교수는 시간이 많다. 더러 두 사람만 라운딩 나갔다. 주로 나인 홀인데, 영랑호 골프장, 진부령 골프장, 강릉의 군부대 골프장이다. 안개 낀 영랑호, 코스모스 꽃향기 터널이 하늘을 가리던 진부령, 가지 끝에 빨간 홍시가 탐스럽던 강릉 골프장이 눈에 선하다. 그때 <강릉에서>란 詩 초고를 만들었다. 그 시 볼 때마다 30년 전 P교수 생각이 난다.
강릉에서
立冬 지나 서리 맞은 홍시는 우수 봄비의 부드러움과 夏至 폭염의 강렬함을 겪은 후라서 인지, 果肉의 향기와 빛깔이 농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감나무 이파리는 꽃보다 붉게 창공에서 낙하하고, 뜰 안 이끼 위에 쌓였다가 바람에 날렸다가 하면서, 이별의 美學을 실습하고 있었다. 감나무는 가능성의 종점, 계절의 끝이 더욱 아름다운 나무다.
강릉에 와서 젊은 날 사랑과 절망을 세탁한 한 여교수를 만났다. 철 지난 해변의 여인처럼 그의 시선은 스쳐온 시간 속에 있었으나, 忍苦의 날들이 은백의 머릿결에 아름다웠다. 태백산맥이 파랗게 보이는 골프장 그늘집에서 그녀와 녹차를 한 적 있다.
십육 번 인코스 부근을 지나며 아이언 7번을 멋있게 날리던 그. 그는 강릉의 하현 달빛 아래 낙엽은 보내고 홍시만 단 아름다운 감나무처럼, 농익은 향기와 빛깔 품은 채, 계절 끝에 혼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