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긴 왜 울어 - 3 -
골짜기는 수만 년전 미줄라호수에서 수차례 났던 빙하기 홍수가 워싱탄주 동부까지 남쪽으로 쓸고 내려오면서 만들어졌는데, 이때 비옥한 흙과 화산암이 함께 쓸려 내려온 덕분에 별의별 농사를 다 지을 수 있는 지금의 광활한 충적평야가 발달할 수 있었다.
도시는 녹지로 덮여 있다. 녹지는 강둑을 감싸안고 사방으로 펼쳐지며 오리건주 중부의 바위투성이 언덕과 소나무숲으로 이어진다. 날씨는 1년 내내 온화하고 흐리고 가랑비가 내리지만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서 사방에 싱그러움이 넘친다. 시도 때도 없이 부슬부슬 비가내려도 오리건 사람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건 본 적이 없다.
유진 사람들은 풍부한 자연 농산물을 자랑스러워하고, 자기 고장에서 수확한 유기농 제철 농수산물을, 지금처럼 이런 게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열정적으로 사고팔아왔다. 낚시 꾼들은 강에서 봄에는 큰 누치코 연어, 여름에는 무지게송어를 잡느라 바쁘고, 강어귀에는 일년 내내 달콤한 대짜은행게가 넘쳐난다.
지역 농부들은 일요일마다 시내에 모여 자기 집에거 키운 유기농 농산물이며, 꿀, 야생 버섯, 산딸기 따위를 판다. 주민 다수가 히피로, 이들은 훌푸드[유기농 식품을 파는 미국의 슈퍼마켓 체인]를 배척하고 지역 조합을 옹호하며, 버켄스탁[가벼운 코르크 소재를 써서 편안한 신발의 상징이 된 독일 부랜드로, 1990년대 들어서 여러 친환경 정책을 펼쳐 친환경 주의 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슬리퍼를 신고 다니고, 색색의 실로 헤어랩을 만들어 야외 시장에 내다팔고,집에서 직접 너트잼을 만들어 먹고,남자아이에게는 포리스트나 오로라 같은 이름을 태명으로 지어준다.
내가 열 살 때 우리는 도시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크리스마스트리 농장과 스펜서 뷰트 피크 하이킹 코스를 지나,6천 평에 달하는 숲속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집이었다. 야생 칠면조떼가 돌아다니면서 풀을 헤집어 벌레를 쪼아먹고, 내 키면 아빠는 벌거벗고 잔디 깎는 기계를 몰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집이 수천 그루의 폰제로사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을 뿐아니라 반경 수 킬로미터 안에 이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집 뒤에는 엄마가 철쭉을 키우고 잔디를 단정하게 가꾸는 공간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거친 잡초가 무성한 황토 언덕이 있었다. 인공 호수도 하나 있었는데, 바닥에 부드러운 토사가 깔려 있어 호수 물은 흙탕물이었다. 나는 거기서 도룡뇽이나 개구리를 잡았다가 놓아주면서 놀았다.
숲에는 블랙베리나무가 무성하게 자랐고, 초여름 버닝 시즌[다음 농사를 위해 불을 놓아 땅을 정리하는 일이 허용된 시기]이 오면 아빠가 큰 전지가위를 들고 나가서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을 냈다. 산악 오토바이를 탈 길을 만들기 위해서 였다. 장작 밑에 착화유를 뿌리는 것은 내가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아빠가 멋지게 쌓아놓은 2미터 높이의 장작더미가 불길에 휘싸이는 걸 보면서 연신 탄성을 질렀다.
나는 우리의 새집을 사랑했지만 나중에는 원망도 했다. 이웃에 같이 놀 친구도,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 편의점도 공원도 없으니까. 나는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외로운 신세에, 이야기를 나누거나 의지할 사람이라곤 달랑 엄마 밖에 없는 외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