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가 왔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자신의 때를 다소곳이 받아들이며 순순하게 오는 봄에 길을 내주는 겨울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멈출 때와 쉴 때를 익힌다.
머지않아 따사로운 아침햇살이 비치면 장독대에, 분리수거통에, 산과 들과 내에 쌓인 눈이 녹아 땅으로 스며들 줄을 나는 안다. 저 눈이 녹고 대지로 스며들어가 겨우내 숨죽이며 기다리던 씨앗에 싹을 틔우고 잠자던 생물을 깨워 이내 생동하는 봄을 수놓아 가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오고가는 계절은, 쌀쌀한 북서풍에 섞여오는 훈훈한 이 바람은 내 삶을 끌고가는 엔진에 부어지는 윤활유인가?
30년 넘게 혼탁한 세상을 헤쳐가며 무수하게 쏟아지는 일거리에 녹초가 된 사내가 대충 뭉뚱거려 제껴 놓았던 소망더미를 뒤적거리며 몽실 피어오르는 기억 속에 빠져보기도 하고 혼미하게 드러누웠던 자리를 홀연히 박차고 일어나 기약도 없이 처박아 두었던 꿈 속으로 진입하면 숨조차 멎어버린 듯 잠자던 이상과 예지, 그리고 둔해졌던 감성에 날이 서며 더불어 힘찬 날개를 펼치고 사월의 아지랑이처럼 스물스물 기억이 피어오른다.
인정머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냉혹하게 객관성과 합리성만을 내세웠던 이윤추구의 싸움터에서 벗어나 경쟁이라는 단어마저도 닁큼 지워버린 오늘, 마음 가벼이 맞아들이는 봄이 지난날 그 어느 때보다도 아늑하고 정겹다.
이런 날이면 으례 그날의 완산칠봉이 그때의 그 자태로 봉우리와 골짜기를 펼치며 파노라마를 연출하곤 한다. 나의 태를 묻은 외막실로부터 시작하여 아중저수지,기린봉,오목대,중바위,남고산,고덕산,구이저수지,모악산,금산사,중인리,신리수원지,관촌의 강,남관의 감나무.. 내를 따라 내려가며 일별하는 서방바우,각시바우,애기바우,병풍바우,한벽당,다가산,삼례뜰... 고산저수지,화심,대야와 오산의 들판과 방앗간,무주,진안,장수,김제,부안,고창,정읍,남원,순창,장성,곡성...끝도 없이 펼쳐지는 고향의 산하를 둘러보며 나의 발자취를 살핀다. 아버지 따라 산비탈을 살펴 고사리와 취를 뜯으며,마대를 지고 칡덩쿨을 당기며, 투망 짊어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공기총 메고 새를 쫓으며,물안경 끼고 물밑 바위를 뒤지며 신들린듯 고향산천을 섭렵하던 정경이 필름처럼 이어진다.
봄햇살 아래 꿈꾸는 고향에는 사계절이 섞이고 소년소녀의 웃음이 창공으로 흩어지며 꽃과 새와 나무와 바위가 사뭇 정겨운 자태로 추억들을 불러내어 알콩달콩 영롱한 구슬을 엮어간다.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하얀 얼굴로 맑은 눈을 반짝이며 마냥 무언가를 애틋이 그리워하는 가운데 안개처럼 동화처럼 몽실~ 펼쳐지는 미래를 꿈꾸는 소년이다. 이럴때면 나는 눈을 뜬 채로 마냥 꿈을 꾼다. 꿈꾸다가, 꿈에 몰입하다가 이내 한웅큼의 꿈을 쥐어 손을 펼쳐 올리고 마냥 흔들리는 바람에 후우~ 불어 보낸다. 저 하늘에, 산과 들에, 고향의 산하에, 정겨운 친구들에게.....
일본낙엽송 훤칠한 숲 아래로 스며드는 햇빛을 받아 고비가 자라고 셋째봉우리 아래 비구니들의 산사로 내려가는 비탈에 봄마다 산비둘기 알 품던 자리가 보인다. 촘촘한 가지 사이로 푸드득 장끼가 날아오르면 저 아래 숲사이로 새끼를 인솔하고 종종걸음치는 까투리가 있다. 그 언저리로 여름날이면 자색 반점을 찍고 안으로 붉게 열을 들이던 산나리들이 함초롬하게 물기를 머금은 채 그들만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투구봉 기슭 무성한 숲을 오르면 서걱서걱 밟히며 서릿발 같은 소리를 내지르던 낙엽 아래 어딘가에 봄바람 타고 집으로 날아들던 노란 송충이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음을 누구든 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아래 초가로 이은 지붕 아래에서 허여멀건한 얼굴로 봉우리를 올려다 보는 중학생이 아직도 눈 큰 여자애를 생각하고 섰다.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서울로 전학간, 누이동생의 소꿉장이 동무를 가슴 속에 그리며 서있다. 도립병원 마당에서 장난치며 놀던 옆집의 경원이 누나를 회상하며 서있다.
화면이 바뀌면 서울에서 주인집으로 놀러 내려온 쌍둥이 여자애 둘이서 펄시스터즈의 노래를 중창으로 부르며 나를 손가락질한다. "쟤는 중학생이라는데 덩치가 커 우리 또래처럼 보이는구나. 너 이름이 뭐랬지?" 롯데껌을 씹으면서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껌'임을 각인시키던 걔들의 엄마가 여태도 껄쩍지근하게 느껴진다. '초가삼간 셋집에 사는 나도 롯데껌 씹는데...'
초가집 문간채에 사는 나를 사뭇 으스대는 그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나도 늬들한텐 관심 없어. 경원이 누나가 훨~씬 예쁜걸...." 요즈음에도 때때로 누이동생은 한반 동무와 방에 엎드려 숙제를 하며, 경원이 누나는 깔깔대며 풀밭을 뛰어다니고 쌍둥이자매는 한국에서 제일 좋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여전히 펄시스터즈를 부르곤 한다. 화음이 제법 잘 맞던데 걔들도 하마 인기있는 듀엣이 되었을까?
이윽고 아이는 뒷문을 열고 투구봉에 올라 이르게 피어난 진달래꽃을 보며 바위에 걸터앉아 소월을 읊는다.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든 살풋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이어 박재란의 누래를 부른다.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끊임없이 노래가 이어지다 이내 뜨뜻한 바위에 누워 잠이 드는 아이를 본다.
봄은 잠자던 것을 깨운다. 잊혀진 듯 아스라한 기억의 창고에 잠자던 기억을 깨우고 어린날의 친구들을 미소짓게 하며 제껴두었던 꿈들을 새로이 각색하여 다시 꿈꾸게 한다. 객지에 터를 잡고 창으로 들이는 햇살조차 고향을 일깨운다. 사거리에 살던 상규네 집엔 여전히 그 가족이 살고 매곡교 건너까지 주욱 노점이 펼치며 광주리에 채소와 과일과 봄나물을 한줌씩 쌓아놓고 백원을 외치는 아줌마들이 입을 모아 고향을 연출한다. 그 곳으로 허연 얼굴에 초롱한 눈매를 반짝이는 아이가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까,내짝은 누구일까, 내 아이들도 쟤들처럼 예쁠까 온갖 상상을 하며 하교길을 걷는다.
봄이 살아 있다. 봄이 숨쉬고 있다. 봄이 고향의 깊고 너른 품으로 나를 부른다.
- 2007.3.8.고향맹물
고향맹물
첫댓글 이날 저는 삼촌을 무덤에 묻고 마음아픈날인데 오후에 하얗게 눈이불을 덮어주시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