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하락 신도시에 가압류 속출
금융권 "빌려준 중도금 당장 갚아라"
2008년 일산 덕이지구 신동아아파트를 분양받았던 주부 오모(39)씨는 최근 주택금융공사로부터 “남편 급여를 가압류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분양 계약 이후 우리은행에서 빌린 중도금이 모두 4억7000만원. 시행사와 계약해제 소송을 벌이고 있는 오씨가 중도금을 갚지 않자, 대출 보증을 선 주택금융공사가 가압류에 나선 것이다.
오씨는 이미 시세 3억원대의 서울 충정로 빌라도 가압류당했다. 그는 “담보가 있는데도 급여에 또 다른 주택까지 가압류하다니 은행이 너무 하는 것 아니냐”며 “급여가 묶이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빚을 내서라도 중도금을 일부 상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2기 신도시 분양자들 사이에서 가압류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분양자들이 “집값이 떨어져 입주를 못하겠다”며 건설사를 상대로 줄소송을 벌이고, 중도금을 빌려준 은행은 “중도금을 당장 갚으라”며 재산 가압류에 들어간 것이다.
중도금 연체 이자만 '수천만원'
사태의 발단은 부동산 경기 침체다.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 단지 매매 가격은 3~4년 전 분양가보다 적게는 5%에서 많게는 40%까지 내렸다. 계약자들의 분양 포기나 분양가 인하 요구는 물론 관련 소송이 줄을 잇는 것도 그래서다.
집값 하락이 본격화한 2008년 이후 2015년까지 경기도 판교ㆍ동탄ㆍ김포ㆍ광교ㆍ파주 등 5개 신도시에 들어서는 새 아파트는 모두 12만2860가구. 이들 중 상당수가 이런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올들어서만 이들 단지에서 “계약 내용과 다르다”며 제기된 손해배상 및 분양계약해제 소송이 90여건에 달한다.
소송이 진행 중이란 이유로 중도금 대출을 연체하는 계약자가 늘자 은행은 분양 계약자에게 “일단 중도금을 상환하든지 연체 이자를 내라”며 가압류에 나서고 있다.
소송이 벌어진 주요 단지의 입주예정자협의회에 따르면 김포 한강신도시, 일산 덕이지구, 파주 운정지구 등 6개 단지에서만 450세대가 넘는 가구가 부동산ㆍ은행 통장 등 재산을 가압류 당했다. 일산 덕이지구 신동아아파트에선 급여를 가압류 당한 세대도 6가구나 된다.
가압류를 당한 대출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아파트를 담보로 잡아두었으면서도 은행이 무리하게 대출을 회수하려 든다는 것이다. 김포 한강신도시 우미린아파트를 분양받은 김영배(53)씨도 그 중 하나다.
최근 중도금으로 빌린 2억원을 갚지 못해 충북 청원군의 다른 주택을 가압류 당했다. 그는 “아파트 분양가가 4억원이 넘는데 중도금 2억원의 담보로 부족하다는 말이냐”며 “입주 예정자 중엔 은행 통장이 5개 넘게 가압류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단체 금융소비자원의 조남희 대표는 “분양 예정 아파트를 담보로 제공한 대출을 빌미로 다른 부동산은 물론 급여까지 가압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자칫 부동산 침체기 서민의 삶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처럼 특정 담보를 바탕으로 제공된 대출은 그 담보를 넘어서 채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제도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몇 신도시 분양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한 변호사는 “입주 예정자들이 중도금과 잔금을 치르지 않고 버티면 은행들도 건설사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게 된다"며 "건설사에 빌려준 자금 회수를 위해 계약자 압박용으로 가압류를 진행하는 것 같다”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일부 단지는 2년이 넘게 소송이 진행중이서 중도금 연체 이자만 수천만원에 달한다”며 “이자를 내지 않고 버티면 은행으로선 가압류 외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