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1913~1995)는 「무녀도」의 지리적‧정신적 배경이 되는 경주의 예기소(藝妓沼) 인근에서 나
고 자랐다. 예기소는 경주 토함산에서 발원한 남천과 북천이 서천과 만나 형산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소(沼)는 대체로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이 깊이 고인 곳을 말하는데, 예기소는 강폭이
각중에 넓어지면서 물의 흐름이 느려져 생긴 늪지대다. 사람들은 이 늪을 바라볼 때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유혹을 느끼곤 했다. 김동리도 「무녀도」 서문에 ‘어릴 때 개천가에서 그 수렁을 바라보면
모든 과거와 죽음이 그 속에 다 들어가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했다.
「무녀도」는 김동리의 나이 23세 때인 1936년에 발표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예기소는 유구하고
안타까운 샤머니즘의 사연을 간직한 채 상굿도 옛 모습 그대로 느릿느릿 강물을 끌어안았다가 다시
흘려보내고 있다.
<뒤로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질펀히 흘러내리는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엔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무녀도」의 첫머리에는 무당의 딸인 귀머거리 소녀 낭이의 눈을 통해 예기소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굿 풍경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예기소에는 해마다 사람이 하나씩 빠져죽는다는 어둡고 불길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경주사람들은
지금도 그 전설을 이성적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주인공인 무당 모화는 예기소에 몸을 던져 비명에 간
어느 부잣집 며느리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다가, 종당에는 자신도 예기소의 전설을 확인이라
도 하듯 숱한 원귀의 뒤를 따른다. 예수교도였던 아들 욱이의 죽음과, 아들을 빼앗아간 예수귀신에
대한 복수를 다음 生으로 미룬 채.
김동리는 무속을 기독교와 대등한 위치에서 대결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무녀도」를 썼다고 밝힌 적
이 있다. 모화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초월을 상징한다고. 김동리는 어릴 때 잠시 교회에 다닌 적이
있지만, 왜놈들의 한글 말살정책에 저항하면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 고유의 민
속신앙에 대한 이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각성에서 허황한 예수교를 버리고 무속을 공부하게 되었
다. 왜정으로부터 민족혼을 살리는 일은 ‘죽음과 신앙을 통한 부활’이라는 서구적 종교관으로는 극복
할 수 없는 민족적 존재가치와 자긍심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무녀도」는 이승과 저승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지극한 염원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는 한국적 샤머니즘의 가치관을 담고 있다. 무속을 공부하면서 김동리는 생성과 소멸이 하나라는 철
리(哲理)를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각성을 통해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오류를 인식하고 죽음을 초월하
는 모화의 모델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음산한 전설이 감돌던 예기소는 500m 떨어진 산기슭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들어서면서 이미지
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밤중에도 낚시꾼들이 몰려와 도깨비 전설을 주고받으며 붕
어‧잉어‧메기 등을 낚아 올린다. 예기소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면 2㎞가량 떨어진 곳에 기와집이 듬성
듬성 들어선 경주시 성건동이 건너다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김동리의 생가가 있던 마을이다. 그 중
퇴락한 어느 기와집이 작가가 모화의 무가(巫家)로 묘사했던 모델이었다.
김동리의 생가는 헐려나가고 그 주변에는 1960년대식 개량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골목 안으로 50
m쯤 들어가면 작가가 성장기를 보낸 개량주택이 있다. 전국의 어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성건동도 심
각한 이농현상을 면치 못해 마을 전체가 폐가 직전의 집들뿐이다. 김동리는 「무녀도」를 집필하기
위해 제자인 시인 서영수와 함께 이 마을에 들려 자신의 생가와 자란 집을 차례로 둘러본 뒤 모화의
집을 찾아봤는데, 흔적은커녕 위치마저 가물가물하여 반나절 만에 돌아갔다. 김동리의 옛집에서는
상굿도 예기소가 저만치 내다보였다.
김동리가 「무녀도」에서 화자(話者)의 집으로 그렸던 기와집은 친구 최아동의 집이었다. 이름난 경
주 최부자 댁이었던 것이다. 최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에는 웅장한 규모의 기와집 10채가 남아있는
데, 그 중 6채는 ‘경주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한 기와집은 고급요정으
로 바뀌어 클럽과 룸살롱이 번창하는 시대에 외딴섬처럼 저항하고 있다. 김동리는 실재하는 한 마을
에 화자의 집과 모화의 집이 이웃해 있도록 묘사해놓았다.
김동리는 초기의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자신의 마을과 그 주변을 그대로 그려놓았다. 마을 뒤에는 소
설 「바위」에서 문둥이 어머니와 착한 아들 술이가 간절하게 어머니의 치유를 빌던 바위가 있고, 강
건너 경주남산 기슭에는 소설 「황토기」에서 두 장수가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는 마을이 있다. 그 밖
에도 「허덜풀」「을화」「만자동경」 등이 고향 경주를 무대로 쓴 김동리의 초기 작품들이다. 좌파
들의 사상성 짙은 작품들이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던 해방 이후에, 홀로 순수문학을 고수하며 맞섰던
김동리의 고집스런 특징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쌀쌀한 밤공기 이지만 하늘 높은곳 보름달의 밝음까지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어 가을철 이란 이토록 좋은 계절 입니다. 다녀올곳이 몇군데 있어 자동차 동선을 셈하고 있는데 홍도.흑산도 여행을 제안한 친구의 성화로 3가족이 함께 1박2일의 일정으로 10월초 예약을 하였습니다. 기회되면 친구와 함께 다니는 여행도 무척 즐거우리라 여깁니다. 많이 걸으시며 즐거운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