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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좀, 덥지 않아요?]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느라 늦은 오후가 되도록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승주의 투정에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던 중이었다.
“안 더운데?”
미루를 백허그한 승주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미루가 승주의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내내 그녀의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승주였다. 처음에는 승주의 넓은 가슴이 그녀의 등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녀가 가는 곳마다 등짝에 붙어서 따라다니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까지 했다.
[난 더워요.]
가지런히 썰어 놓은 샌드위치 재료들을 식빵 위에 차곡차곡 쌓던 미루가 갑자기 손을 씻더니 그녀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승주의 팔을 잡아 떼어냈다. 제법 힘을 주어 반항할 줄 알았던 승주는 미루가 하는 대로 순순히 손을 풀었다.
“......싫어?”
하지만 곧 승주의 풀죽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미루는 얼른 승주에게로 돌아섰다. 누가 저 표정을 보고 서른아홉의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미루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잠깐 그녀가 방심한 사이에 그녀의 마음이 툭하고 나와 버렸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응.”
미루는 당연히 농담이었다. 첫 만남부터 알 수 없이 서로에게 끌렸고, 그래서 일주일간 매일 만났고, 하루의 반을 함께 보냈고, 서로를 오래도록 껴안고, 어제는 첫 키스도 나눴지만 말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물어 볼 엄두도 나질 않았다. 그에겐 조용하고 적막한 이 심심한 시골 마을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를 데리고 심심풀이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차라리 묻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을 확인 하고 싶은 마음에 끝까지 가지 말라고 붙잡는 동완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한 걸음에 달려왔지만, 미루는 묻지 못했었다.
[뭐...뭐야...장난치지 마요.]
승주의 순순한 대답에 미루는 금세 부끄러워졌고, 고개를 숙인 채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승주는 미루의 얼굴을 보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손을 뻗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승주가 말했다.
“나, 장난치고 그런 사람 아닌데.”
[내가, 어떤 애인지도 모르잖아요. 우린 만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고.]
“나는, 너를 알아.”
우리가 만난 건 아주 오래 전이야.
승주는 마지막 말은 마음에 담아 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미루가 승주에게 확신을 가질 때까지 승주는 기다리기로 했다. 미루가 정말 ‘루’라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좋아해. 좋아해. 그러니까......”
[......]
승주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자 미루의 시선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러니까, 빨리 샌드위치 좀 완성해주라. 배고파 죽겠어.”
승주는 정말 아사 직전이라는 듯 불쌍한 표정을 해보였다. 미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가 놨다가 제멋대로여서 혼을 쏙 빼놓는 승주였다. 당황스런 표정을 숨기려 얼른 뒤돌아 샌드위치를 마저 만들고 있으려니 스르륵 다시 그녀를 안아오는 승주였다. 그녀의 등에 맞닿은 승주의 가슴에서 가볍게 뛰는 심장고동소리에 미루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퇴원할래.”
간신히 스케줄을 정리하고 녹초가 되어 도연이 있는 병실로 돌아온 김실장에게 도연이 첫 번째로 한 말이었다.
“안 돼.”
김실장은 소파에 앉아 답답한 힐을 벗어 던지고 탁자위에 발을 올렸다.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는
지, 김실장은 더 이상 입을 벌리기조차 귀찮은 지경이었다.
“갈래. 여기 있기 싫어.”
“너 진짜!”
김실장은 소파에 기대던 몸을 돌려 도연을 째려봤다. 혀가 말려들어 갈만큼 기운이 없었지만, 김실장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귀신 같애. 그 꼴을 하고 퇴원하겠다는 소리가 나오니? 하루만이라도 더 있어. 내일 일정은 취소도 못했어. 영화 크랭크 인 제작보고회라. 니가 주연인데 빠질 수도 없고. 그러니까 여기서 하룻밤만이라도 푹 자고 좀 사람 같은 얼굴로 나가자.”
“......어디, 있는지도 모른데?”
주어가 없는 문장이지만 김실장은 도연이 누구에 대해 묻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몰라.”
김실장은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연이 쓰러졌다는대도 매몰차게 굴었던 차승주도 짜증났고, 그런 차승주를 끝까지 싸고도는 황기풍은 더 짜증났다. 그리고 가장 짜증나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매불망 차승주만을 기다리는 김도연이었다.
김실장은 널부러져 있던 힐에 발을 끼워 넣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난 간다. 승은이 불렀어. 어차피 내일 미용실 가고 어쩌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승은이한테 옷이랑 메이크업 준비 다 해오라고 했다. 여기서 같이 자고, 내일 승은이가 하란대로 준비 하고 있어. 내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김실장의 말에 도연은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김실장 역시 그녀에게서 순순히 그러겠다는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갔다.
김실장이 가고 난 뒤, 도연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촬영장에서 자신이 쓰러지고 벌써 만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도 승주가 자신의 곁으로 달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해도, 그녀에게 이럴 승주가 아니었다.
도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연결음이 흐르는 동안 혹시라도 승주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표정이 없던 도연의 얼굴에 반짝 해사한 빛이 돌았다.
“나에요.”
- 응.
“나, 아퍼.”
- 김실장한테 얘기 들었어.
“......안 와요?”
-......
“나 많이 아프다니까.”
도연의 얼굴에 잠시 돌았던 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젖어 들어갔다.
“언제 올 거에요? 나 내일 제작보고회 있어. 그 전에 올 거지? 응?”
-......
“왜 대답을 안 해! 당장 오란 말이야! 당장!”
- 몸 잘 챙기고. 다음에 보자.
매정하게 끊어진 전화에 도연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는 승주가 완전히 그녀를 떠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도연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승주가 도연의 곁에 있는 것 역시 도연의 의지가 아니라 승주의 의지였으므로. 도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승주가 그녀를 떠날 시간이 되도록이면 천천히,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승주씨, 지금은 아니라구. 난 당신이 필요해. 지금은 너무......아파......아프다고......”
길고 긴 여름 해인데도 벌써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다. 미루는 승주가 통화를 하는 동안 어두워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내 밝았던 승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들으며, 미루는 낯선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차승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차승주가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가야겠다....]
혼잣말이었다. 아니, 승주와 함께 더 있고 싶어하는 스스로를 꾸짖는 말이었다. 승주와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물들이 있었다. 요즘 내내 승주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덕분에 다들 미루에게 삐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벌써, 가려고?”
언제 전화통화를 끝냈는지 한 걸음에 달려와 제 옆에 선 승주를 미루는 창문에 비친 모습으로 보았다. 그녀를 보고 웃고 있는 승주의 표정이 벌써 익숙해진 미루였다.
미루가 대답이 없자 승주는 애가 타는 듯 얼른 미루의 손을 꼭 잡았다.
“조그만 더 있다 가. 데려다 줄게. 영화라도 한 편 볼까? 여기 홈시어터 시스템이 또 죽이거든.”
누구와의 통화였길래, 그렇게나 차갑게 받았던 걸까. 하지만 미루는 묻고 싶은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았다. 오늘은 이런 떼쓰는 소년 같은 승주만으로 족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줬고, 좋아한다고 말해주던 승주만으로도 미루의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미루는 쌩끗 웃으며 승주에게로 돌아섰다.
[영화 좋아해요?]
“몰랐어? 나 영화감독......”
승주는 미루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얼마나 유명한데. 에이, 설마.”
미루의 얼굴에도 승주의 얼굴에도 잠깐, 아주 잠깐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첫눈에 반하고, 아무 것도 상관없었다지만, 이렇게나 서로의 신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자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장난 아니에요. 진짜 몰랐어요. 영화감독이었다니. 무슨 영화 만들었는데요?]
“허, 너무 한다. 나 진짜 나름 잘나가는 감독이었는데. 5년 사이에 이렇게 내 인기가 하락하다니.”
[5년 전이면, 나 열 다섯인데. 모를 수도 있지. 엄청 19금 격정멜로 그런 거 아니에요?]
열다섯. 승주는 입을 다물고 눈만 깜박거렸다. 승주가 한참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미루는 그야말로 꼬꼬마였다. 지금도 미루는 꼬꼬마이긴 마찬가지지만. 미루의 나이가 스물, 승주 자신의 나이가 서른아홉. .
언제 이렇게 늙은 거야, 대체.
승주는 푹 한숨을 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미루는 제가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얼른 승주를 따라가 그의 곁에 붙어 앉았다.
[삐졌어요?]
“응”
승주는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차승주가 삐지다니. 참 살다 살다 별 소리를 다 듣는구나 싶었지만, 승주는 그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아서는 난감해하는 미루가 귀여워 놀려주고 싶었다.
[미안. 근데, 이제부터 보면 되지.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 19금 격정멜로도 볼 수 있어요! 다 보자, 지금. 응? 나 봐봐요.]
미루가 양손을 승주의 볼에 대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승주는 미루의 입술에 베이비 키스를 쪽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변태!]
“난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찍고 싶은데. 특히, 격정멜로로. 안될까? 시간도 마침 밤이 되어 가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미루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이마를 맞대는 승주에 미루의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분명 부끄러운데도 미루는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마치 그것이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냥, 승주의 얼굴이 가까워지면 살포시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기다리게 되었다. 승주는 살며시 감긴 미루의 눈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한테 변태라더니. 이미루씨가 더 하네요.”
승주가 미루의 목덜미를 잡았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콧잔등을 톡하고 가볍게 치자 미루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뭐..에요!]
“뭐 기대한 거야, 설마?”
[아, 아닌데! 허, 웃겨. 여, 영화나 봐요. 얼마나 대단하신 감독님인지.]
“집에 간다며.”
[보고 갈 거 에요. 누가 안 갈까봐.]
화내는 모습마저도 너무 예뻐 승주가 다짜고짜 안아오자 바둥거리던 미루는 승주의 끊이지 않는 웃음에 반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지 상상도 못했어요, 정말.]
“......”
[처음에 나 우산 씌워줄 때, 눈 꼬리가 이렇게, 화난 사람처럼 올라가서는 엄청 무서웠는데.]
“무서운 아저씨를 그렇게 단번에 따라 오냐. 꼬맹이가 겁도 없이.”
[그러게요....따라오지 말걸......]
빗속에서 승주를 처음 만난 그 날이 마치 오래 전 일인 것처럼 아련해 웃음 짓던 미루를 품에서 떼어낸 승주는 어느새 웃음이 멈춰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승주의 얼굴에 어쩐지 근심이 어렸다.
“후회해? 나, 만난 거?”
승주는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미루는 그의 눈에 깃든 진심을 읽었다. 그가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듯이,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읽혔다.
미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회할 리가 없었다.
[동완쌤네 엄마가,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된 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다가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자물쇠가 채워진 이 마음의 열쇠를 가진 사람이 꼭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목소리도 열린다고.]
“......”
[당신이잖아요, 열쇠. 내 마음의 자물쇠를 열어준 사람.]
웃고 있었다. 미루의 웃음에는 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승주는 미루를 따라 웃지 못했다. 본적이 있었다. 미루가 짓고 있는 저 웃음을.5년 전에도 스무 살 도연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
무기호입니다.
연재텀이 좀 길었습니다.
다시 힘을 내서 써볼게요.
다음 편은 아마도 도연이와 승주의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것 같네요.
더운 날 건강 조심하세요.
메르스도.
꾸벅.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6.15 19:5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6.24 15:22
첫댓글 승주는 스무살 킬러인가요????
그런가요? ㅎㅎㅎㅎ 승주보다 제가 스무살 킬러인듯요.....^^;
둘사이가 잘되길 바라지만 나이차는 너무 마이 나요...ㅎㅎㅎ
그렇긴 하죠;;; 그래도 눈 감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려용~^^ 댓글 감사해요~^^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려요~!!!
잘보고 가요~
댓글 감사해요~ 앞으로는 조금 더 빠른 업뎃으로 찾아 뵐게요~ 쭉 관심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