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1915~2000)은 우리 문학사에 매우 독특한 자취를 남겼다. 단편 「소나기」로 대표되는 그의
제1기 작품은 순수한 서정성을 띠고 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시작된 제2기 작품 「카인의 후예」
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상과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짙은 좌절이다. 제3기 문학의 대표작이 되는 장편
「일월」에서 주인공은 좌절을 극복하고 구원을 추구하는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일월」은 또한
해방 후에도 남아있는 신분의 벽이 차츰 새로운 현대질서에 희석되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반상(班常)의 차별이 일부 남아 있었다. 동네에
‘소임’이라는 직책을 가진 60대 노인이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 동넷집에 살면서 동네 소유의 전답을
붙여서 먹고살았다. 대신 동네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의 신분은 조선조 신분제도의 잔재에
따라 우리 동네 소유의 公노비였던 것이다. 마침 사촌형님이 동네 이장이라 소임은 매일 우리집에 들
렸는데, 형님은 아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반말로 일을 시켰다. 소임은 내게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서 존댓말을 썼고, 나는 60대 노인에게 하대를 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선배인 소임의 아들한테 된
통 혼이 난 다음부터 소임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었다.
백제 유물을 찾아 분디나뭇골을 찾아간 지 교수는 백정인 김본돌 노인을 만난다. 지 교수는 딸 다혜
와 사귀고 있는 제자 인철에게 김본돌 노인의 사진을 보여준다. 인철은 김본돌 노인이 백부이며, 자
신도 백정의 자손임을 알게 된다. 인철은 우연히 사귄 기룡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자신의 사촌형
이며, 백부인 김본돌 노인이 소를 잡던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인 아들 기룡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뿌리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인철의 가정은 파탄이 나고, 인철 역시 신분
으로 인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소설 「일월」에서 분디나뭇골로 나오는 경기도 광주시 서부면 춘궁리 버구리마을 사람들은 자신들
의 동네가 백정마을로 둔갑한 데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아무리 시절이 바뀌었어도 상놈 중의
상놈인 백정에 대한 인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황순원이 쓴 소설 「일월」도 읽어보았고 영화 《일월》의 촬영 광경도 지켜보았소. 이 동네는
역사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백정마을이 있었던 적도 없고 있을 만한 이유도 없는데, 황순원이가 무슨
이유로 우리 동네를 백정마을로 설정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서부면 농협조합장을 오래 했다는 박용학 씨는 입에 침을 튀겨가며 비분강개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반기는 여느 동네와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1962년 소설 「일월」이 발표될 당시 이 동네는 매우 목가적이었다. 그러다가 동네 옆으로 중부고속
도로가 뚫리고 하루가 다르게 신시가지가 개발되더니, 1989년에는 서부면 전체가 하남시로 편입되었
다. 소설에 나오는 백제시대의 탑과 저수지는 상굿도 그대로 남아있지만, 뗏장도 입히지 않은 백정의
붉은 무덤이나 동네 어귀에 몇 그루 서 있다는 분디나무는 처음부터 허구였으므로 찾아볼 필요도 없
다. 황순원도 우연히 백제시대의 유물을 구경하러 왔다가 이 마을을 배경으로 설정했을 뿐 별다른 연
고는 없었다.
황순원은 신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지 교수를 앞세워 백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백정의 신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한때 귀족이었다가 나라가 망하면서 백정으로 전락했다는 가설도 삽입해놓았지만,
결국 주인공들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절망적인 현실을 맞이한다. 백정 문제
에 관해 역사적‧민속학적으로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고 백정의 장인정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백정은 조선시대에도 팔천(八賤. 공장(工匠)‧광대‧기생‧노비‧무당‧백정‧상여꾼‧
중 등 여덟 가지 천한 신분) 가운데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황순원은 1920년대에 백정들의 민권운동
이 일어났던 진주에 내려가 취재도 해봤지만, 그 또한 신분의 벽을 허무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
다. 백정이라는 신분의 벽은 몇몇 주인공들의 깊은 고뇌로 해소되기에는 아직까지 요원하다.
마장동도축장은 현재 하루 200마리의 소와 2000마리의 돼지를 잡아 서울시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작업장에서는 매일 100여 명의 기술자들이 소와 돼지를 잡아 해체한다. 모두
회사에 소속된 사원들이다. 해체된 소와 돼지들은 1층에 있는 경매장으로 옮겨진 후 정해져 있는 각
종 공급루트를 통해 시민들의 입으로 들어간다. 가정에서, 식당에서, 술집에서, 펜션에서, 야외에서.
“요즘 우리 직원들을 백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직원 가운데 이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걸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마장동도축장 사장의 말처럼, 앞으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백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에 맞서 방송작가 김은숙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주목할 만한 시
도를 했다. 거기서도 백정의 아들 구동매는 노비의 자식인 유진초이에게조차 ‘나으리’라고 부르며 최
하층민의 자세를 유지하지만, 함께 의병활동을 하는 애신 아기씨와 장포수의 관계에서 극적인 신분
의 화해를 시도한 것이다. 아기씨 집안은 황제가 문상을 다녀갈 정도로 선말 최고의 명문가다. 반면
장포수는 아기씨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던 상놈의 아들이다. 장포수 역시 다른 사람의 이목에 노출
되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아기씨에게 깎듯이 극존칭을 쓰고 아기씨는 하대를 한다. 그러나 둘만의 장
소에서는 아기씨가 총포술을 가르쳐주는 장포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존칭을 쓰고 장포수는 같은
신분의 제자 대하듯 하대한다. 드라마는 이 밖에도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특히 상굿도 엄존하
는 신분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전쟁 불안으로 부터 벗어난 남북협상이 이루워 지고 있지만 온 나라정책이 여기에 올인하는 안달이 내수.수출 경기가 날로 쇠퇴하는 나라경제에 부채질하고 있는듯 합니다. 외신이 전하는 웃지못할 논평, 문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 되다 였습니다. 이런 정도로 이끌어 나가며 또한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자칫 평화를 집권당 지지 정책으로 악용해서도 안됩니다. 낮동안 좋은 날씨, 기분좋은 하루를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