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garden-변이적 외피
정찬부展 / JUNGCHANBOO / 鄭贊富 / sculpture.installation
2008_0910 ▶ 2008_0916
정찬부_in the garden_스트로우, 오브젝트_가변크기_2008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41125b | 정찬부 조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9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성보갤러리_SUNGBO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4번지
Tel. +82.2.730.8478
인공정원, 상실된 정원의 역설적 표현 ● 누구나 한번쯤 조화를 생화로 착각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조화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물을 주지 않아도, 분갈이를 해주지 않아도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발산하는 이 식물(?)은 처음엔 변두리 다방이나 레스토랑을 장식하더니, 지금은 일반 가정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다.
정찬부_in the garden_스트로우, 오브젝트_가변크기_2008_부분
조화는 꽃이나 식물의 가장 생기롭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서 영원히 고정시켜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이로써 모든 존재가 생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무로 되돌려진다는 삶의 덧없음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흐르는 시간을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에 고정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자연의 섭리마저 비켜간다. 그렇게 이 식물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마저 바꿔놓고 있다. 그러니까 조화를 생화로 착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생화를 조화로 착각하거나 혼동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사물에 대한 인지능력의 기준을 전도시키고, 이렇게 전도된 기준은 현대인의 의식 속에 생각 이상으로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풍경 앞에서 흔히들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표현을 써는 것도 그러한 경우이다. 이 비유에선 분명 그림이 풍경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이미지가 실재의 모본(母本)이 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화를 생화의 원본이나 모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의식의 층위에서만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정찬부_in the garden_스트로우, 오브젝트_가변크기_2008_부분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조화 자체는 전혀 낯설지가 않은데,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이라는 장 보드리야르의 전언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정작 실재를 결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재와 동일시되는 가상, 실재의 태를 완벽하게 닮아있는 가상, 실제로는 없는 것이지만 있는 양하는 가상, 즉 시뮬라크라는 이제 생화와 조화가 혼동되는 것만큼이나 현대인의 삶 속에 특히 의식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은 결정적으로 향기를 결여하고 있다. 그런데 가상은 존재의 생기에 해당하는 이 향기마저 자신의 것으로 가로챌 수 있을까. 실재와 일정정도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유사(類似)에 비해, 실재와 어떠한 차이도 찾아볼 수 없는 상사(相似)에 대한 미셀 푸코의 전언에 견주어 볼 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정찬부_in the garden_스트로우, 오브젝트_가변크기_2008_부분
정찬부의 작업을 가상현실이나 더욱이 그 극단적인 경우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문제의식의 핵심 부분에서 실재와 가상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욱이 조화를 소재로 해서 사실상 이를 생화와 비교해볼 수 있게끔 유도한다든가, 이를 통해 일종의 가상정원 내지는 인공정원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식의 접근방법이나 해석에 대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주제 자체가 이미 『정원에서』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관엽식물 산세배리아 화분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 영락없이 작은 정원 같다. 적당히 도톰하고 세로로 길게 뻗은 잎(관엽식물인 산세배리아는 잎 자체가 몸통인 대표적인 관상식물이다)의 맵시나, 잎의 가장자리를 따라 구획된 선, 그리고 여기에 얼룩무늬 문양 등이 어우러진 산세배리아 정원. 그렇다면 작가는 화랑에다 작은 정원을 옮겨놓음으로써 자연을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경각심과 함께 자연의 한 자락을 향유토록 배려한 것일까. 단지 그뿐일까.
정찬부_in the garden_스트로우, 오브젝트_가변크기_2008_부분
그렇지는 않다. 작품을 멀리서 보면 산세배리아를 닮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실상 음료수를 음용할 때 사용하는 스트로우(일명 빨대) 조각들을 촘촘하게 중첩시켜 만든 인공적인 조형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것이 조형물임을 알고 이를 재차 실제의 산세배리아와 비교해보면, 실물 산세배리아가 주는 인공적인 느낌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즉 산세배리아 자체가 이미 고무나 플라스틱 같은 연성 소재와 그 질감을 닮아 있으며, 더욱이 짙은 색과 엷은 색의 띠가 번갈아가며 중첩된 패턴화된 문양이 자연물보다는 인공물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세상에는 인공물의 생리를 닮은 자연물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종의 인식전도현상이나 인식혼동현상이 일어난다. 즉 실물로 인식한 것이 사실은 인공물임이 드러나며, 나아가 그 기준이 돼야 할 실물 자체도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플라스틱이나 실리콘, 라텍스나 밀랍 같은 인공적인 소재들(하나같이 실물 그대로를 완벽하게 구현해주는 소재들)로 재현된 사물의 상(세계의 이미지)에 우리의 눈(사실상 인식)이 지나치게 길들여진 나머지 마침내 실재와 이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은 아닐까. 실물과 이미테이션이 그저 공존하는 정도를 넘어, 실재의 기준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기묘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천연동굴을 흉내 낸 지하철 역사나, 실제보다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이미테이션 냉면, 그리고 호스를 통해 공급되는 산소방울 탓에 더 실물처럼 보이는 플라스틱 수초가 감각의 생리를 변질시키며, 인식의 생태를 왜곡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정찬부_in the garden_스트로우, 오브젝트_가변크기_2008_부분
이쯤에서 『정원에서』란 주제를 돌이켜보면, 정원은 그러니까 자연정원이 아닌 가상정원이나 인공정원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이 사실상 정원(자연)을 상실했으며, 공공연하게는 실물과 이미테이션을 혼동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렇지 않을 때조차 이미테이션을 통해 상실한 실재를 보상받을 목적으로 기꺼이 혼동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이로써 정원은 상실한 정원(자연)과 이에 따른 보상심리의 역설적 표현인 것이다. 이런 역설적 표현은 작가가 부제로 부친 『변이적 외피』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실물과 이미테이션을, 실재와 이미지를 혼동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물(세계)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미테이션이 실물의 형태를 흉내 낼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생기(본질)마저 가로챌 수는 없는 일이다. 생리적으로 사물의 표면(현상)이 변하지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물의 외피가 사람의 눈(인식)을 현혹시켜 실물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정작 그 본질은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현자들이 감각적인 세계 즉 세계의 표면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도 이 때문이다. 불교는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은 마음(욕망)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마음(욕망)을 죽이면, 내가 실재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불현듯 망상(변이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정작 마음(욕망)을 죽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사실에 아이러니가 있고 부조리가 있다. ● 정찬부의 작업은 (실제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거리감과 이에 따른 착각현상과 관련이 깊다. 멀리서 보면 산세배리아(실물)가 드러나고, 가까이서 보면 스트로우가 집적된 조형물(이미테이션)이 드러난다. 그 착각현상은 인쇄매체의 망점, 그리고 디지털매체의 그리드가 불러일으키는 효과와 같다. 즉 망점이 모이면 형태가 공고해지고, 그리드가 뚜렷해지면 형태가 해체된다. 마찬가지로 스트로우가 집적되면서 산세배리아가 드러나고, 스트로우의 개체성이 두드러지면서 고유의 물성이 강조된다. 일부 평면작업(스트로우 조각을 평면적으로 병치시킨)에서 예시되고 있듯, 작가의 다음 작업은 아마도 이런 형태와 물성 사이, 재현과 해체 사이를 조율하는 인식작용과 그 시지각 효과를 주제화하고 극대화하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다. ■ 고충환
첫댓글 복사된 글이라 이고지고로 옮겼습니다 그 때분 그 분 이시군요 전시 축하드려요
간만에 들어왔네......찬부씨가..득수님에게 도록을 보내고 싶다해서...주소를 알려줬어요.. 그리고 소식도 전하고 싶다해서..퍼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