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역사, 도시로서의 시작은 길이 열려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교통수단인 경부선 철도와 부관 연락선이라는 바닷길이 생기면서
결국 동래가 아니라 부산이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부산은 근대 도시가 되기 전부터도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고
그중 부산은 영남 대로와 연결돼 있었다.
영남 대로에는 좌도, 중도, 우도로 갈라지는 길이 있었고, 부산과 이어지는 중도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했던 길이었다.
이 길은 동래에서 시작해서 밀양, 청도, 대구, 선산을 지나 열흘 정도면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특히 부산에서 밀양까지 연결된 길은 황산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시대의 큰 도로들은 도중에 역참을 두고 있었는데, 황산도는 양산의 황산역에서 온
이름이다. 동래의 휴산역에서 시작해 밀양의
무흘역까지 이어지는 길이라고 보는데
지금의 부산 시내에서 말하자면,
황산도는 동래경찰서 근처의 휴산역에서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 곳에서 동래 향교, 명륜초등학교를 지나서 온천 입구 사거리로 이어지고, 이후 부곡동의 공수물 소공원, 기찰을 지나 금정구 하정 마을에 있던 소산역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 길은 한양으로 가는 길일 뿐만 아니라, 물자들이 오가는 길이기도 했는데
지역 주민들이 한양의 임금에게 세금으로
물건을 바치기 위한 조운로였고, 초량의 왜관에서 거래된 물자들이 유통되는 교역의 길이기도 했다
부산에는 육로뿐만 아니라 수로도 교역이
이뤄졌다.
즉 구포 나루에서 낙동강을 통해서 내륙으로 물류가 이동한 이후 충주에서 한강으로 연결되어 한양까지 갔다
구포 나루에는 조선 후기 세금을 징수하던
남창도 있었고 이런 옛길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예를 들어, 기찰이라는 이름이 대표적인데
기찰은 지금 말하자면 검문소 같은 곳으로,
조선 시대에 기찰포교가 상주하면서 통행자나 물품을 검문하던 곳이다. 부산 지역에는
십휴정 기찰과 구법진 기찰이 있었다.
십휴정 기찰은 금정구 부곡동에 위치해 육로를 통해 오가는 사람들과 물자를 검문했고
구법진 기찰은 북구 덕천동에 있어서 낙동강을 감시하며 물길로 이동하는 사람들과 물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기찰은 지금의 경찰과 세관을 합친 개념이라서, 부산에 두 군데 기찰이 있었다는 건
왜관 같은 일본과의 교역 물자가 왕래하며
밀수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걸 단속하기 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만큼 부산은 육로와 수로가 연결되면서
조선과 외국을 잇는 중요한 장소였다
오늘날 기찰이라는 이름은 공적 행정 구역에서는 사라졌지만, 기찰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고, 최근에는 십휴정 기찰 지역에서 생산되는 기찰 막걸리란 이름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https://youtu.be/J3VZ78hWhQ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