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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등과 회복 (아4:16-5:6절)
평화의 사람이란 뜻을 가진 술람미 여인은 어떤 경우이든지 주 예수의 백성인 신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연을 타고 길을 갈 때에 포도원에서 일광에 쪼이며 검게 탄 얼굴로 일하고 있는 술람미 여인을 발견합니다. 한눈에 반해 버린 왕을 따라 그녀는 예루살렘 솔로몬 궁에 들어갑니다. 그녀는 솔로몬과 결혼하고 즐거운 신혼부부의 첫사랑을 즐겼습니다.
*아2:4-7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에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이 신혼 사랑의 연속으로 신부는 자기 동산에 신랑을 초대하였습니다.
*아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이 초대를 받은 신랑은 그 동산에 들어가서 몰약 같은 생명과, 향 재료와, 꿀같은 사랑과, 포도주와 젖을 먹고, 기쁨을 누리고,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차원 높은 사랑의 교제요, 영적 교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풍성하고 향기롭고 최고의 아름다운 잔치였습니다. 이 사랑의 잔치는 성도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베풀어지는 최고의 신령한 진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사랑의 달콤한 잔치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성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가슴이 봉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터질 것만 같은 말할 수 없는 진한 감동과 감격으로 구원 받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5: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셔라.
솔로몬 왕은 신부의 초청을 수락하고 그 사랑의 품에서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물론 솔로몬 왕이 취한 몰약, 향 재료, 꿀송이, 포도주, 젖 등은 솔로몬 왕 개인만이 소유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몰약’ 나의 향 재료‘ 나의 꿀송이’ ‘나의 꿀’ ‘내 포도주‘ ’내 우유‘ 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나오는 ‘나의 친구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솔로몬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로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와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성도들을 예표합니다. 그런 후에 그들에게는 불행히도 사랑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랑의 시련이기도 하는데 결국은 사랑의 이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날 많은 사회학자들은 인간 생활을 갈등의 구조 (Struggle Struction) ‘스트라거 스트락션’ 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끊임없는 갈등에 직면하며 또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단한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보다 원숙한 자아를 갖춘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 해서 이러한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연인들은 장미빛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사랑의 황홀을 노래하다가도 불현듯 닥쳐오는 폭풍 속에서 사랑의 갈등과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 갈등은 인생의 삶,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이 불청객은 영적인 사랑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즉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본문을 통해 그 해답을 살피고 우리에게 유용한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1. 갈등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남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의 이기적인 부분들을 공동의 삶 즉 가정의 화목과 화평을 위해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습관, 취향, 생각들을 주장하며 상대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거나 포기하지 않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기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 그 사랑은 갈등과 균열을 가져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a. 신부의 방심입니다.
*아5:2 내가 잘지라도---
본문은 신부의 방심을 “잔다”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의 영적 피곤 혹은 영적 어두움을 말합니다. 잠자는 상태라는 것은 무의미, 무의식, 무감각, 무활동을 뜻합니다. 신자의 영적 수면은 방심(放心)인데 이것은 교만과 방종에 의해 일어나는 심적 상태입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상태이며 눈이 감기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마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술람미 여인도 잠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랑의 음성을 듣기는 들어도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둔한 마음의 이유를 주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신자가 잠을 잘 때에 마귀는 득세합니다. 잠자는 밤에 원수들이 가라지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변화 산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졸다가 사단의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성경 읽기에 등한히 하고 기도 생활, 회개 생활을 소흘히 할 때에 방심은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아는 일에, 증거 하는 일에, 충성하는 일에 태만할 때 방심의 깊은 잠을 자게 되는 것입니다.
b. 직무의 불충실입니다.
*아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방심의 결과는 직무태만으로 이어집니다. 옷은 사람의 신분과 직위와 책임과 예의, 의식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의 의장을 볼 때 그의 직무와 위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제복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직분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하였습니다. 또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는 자라 하였습니다.
*마24:48-51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본문에서 옷이라는 말의 헬라어 ‘쿠타네티’ 는 속옷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한밤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신랑이 입혀준 의의 옷, 성결의 옷을 벗어버리고 육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c. 완전한 결별의 선언입니다.
*아5:3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이러한 선언은 자신을 사랑하여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온 신랑의 방문에 대한 노골적인 거절이요, 아무런 감정이나 연민의 정도 없는 냉정함입니다. 자신의 직분을 떠난 신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사랑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무사안일을 위하여 신랑에 대한 수고를 포기하는 신부의 어리석은 행동인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선지자들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호7:13-14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 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암6:4-6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발을 벗고 누워있는 상태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사랑의 필요성이나 중대함을 모르고 아무런 생각이나 지각이 없는 무관심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현실주의요 무사 안일주의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나태와 게으름의 표상입니다.
d. 기회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5: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예수님께서 감람산 교훈에서 기회를 잃어버린 신부에 대하여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마25:10-13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은총의 축복은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비밀스러운 역사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반대로 저주의 길을 걸었던 야곱의 장자인 에서를 성경은 망령된 자라 한 것같이 육신의 온갖 방심과 안일과 기회 상실은 술람미 여인에게 사실상 사랑의 단절과 이별을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죄인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망각한 죄입니다. 은혜가 없어지므로 장래에 대한 소망도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도, 하늘에 대한 기대도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신랑 외에 분명히 다른 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성경은 이런 자를 “간음하는 여자들이라.” “세상과 벗하는 자” 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 망, 애는 신자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이별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사랑의 회복
일제시대 때 등단한 한용운 시인의 시 중에 “님의 침묵”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애창하든 시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 ‘님’이란 일본에게 빼앗긴 조국 대한민국을 의미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 날카로운 첫 입맞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 사랑은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어떤 경우든지 이별은 슬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특히 성도에게 비극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이별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성도에게 소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단절된 이별에서 다시 사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떤 기회가 왔을까요.
a. 첫째--신부를 애타게 찾는 신랑의 음성이 귀에 들려지는 기회가 왔습니다.
*아5:2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뿐 아니라 발걸음 소리까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2:8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지금은 비록 누워서 방심과 안일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분별할 정도로 그 소리에는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의 주님은 목소리를 발하십니다. 이 목소리는 계시의 말씀이요, 이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생 구원을 위하여 목소리를 발하십니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주님은 회당 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하여 “소녀야 일어나라” 고 말씀하셨고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청년아 일어나라” 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 땅의 모든 죽은 자를 향하여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누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슬람미 여인을 찾아와 네 가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나의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성과 지위에 있어서 자기와 동등한 자격자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나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교제의 대상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불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연인의 관계입니다. 혼인을 약속한 사이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나의 비둘기”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순결한 자로, 정결한 자로 인정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 사함을 받은 순결한 주의 백성입니다. 다시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완전한 자야”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헌신자란 뜻인데 신랑만을 위한 동정녀적인 신앙의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b. 둘째--신랑의 통곡과 절규의 모습이 보여지는 기회가 왔습니다.
*아5:2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주님은 자신의 머리털에 밤이슬이 가득 맺히도록 오래 기다리시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를 가시든지 주님을 따르겠다던 서기관을 향하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요7:53-8:1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시더니...
주님의 지상 생애는 온몸에, 온 머리에 이슬을 맞고 사셨던 생애요, 또한 눈물로 이슬 맺힌 삶을 사신 생애였습니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 보시면서도 한없이 우셨던 주님입니다. 그의 삶은 이렇듯 이슬과 눈물의 삶이었습니다. 신랑의 이 모습이 보여 질 때에 신부의 사랑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c. 셋째--신랑의 사랑과 희생이 모습이 보여지는 기회가 왔습니다.
*아5:4-5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신자를 깨우는 주님의 간절함이 피 맺힌 사랑과 희생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양손과 양발에 흘리신 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을 열어 달라고 강청하고 있습니다. 그 피가 대문과 대문의 빗장에 묻어 신부의 손에 묻혀온 것입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전부가 동원된 문 두드림입니다. 전 인격적인 두드림입니다. 이 두드림은 하늘로부터 나를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시는 계시의 음성이요, 그의 삶은 나를 위하여 눈물과 간구로 밤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신 삶이며, 그의 마침은 피 흘리시며 고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의 마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방심은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들의 육신주의와 안일과 무사주의는 부셔져야 합니다. 찬송가 535장을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이 열려야 삽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리고, 회개의 문이 열리고, 기도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나아가 신령한 말씀을 들을 귀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증거 하는 입술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문이 닫힌 세계는 이미 죽은 세계입니다. 잠자는 세계입니다. 이별의 세계입니다. 망각의 세계입니다. 영원한 종말의 세계입니다. 신자가 영적 잠을 잘 때에 주님과의 영적 교제가 단절되는 사랑의 이별이 생기고 맙니다. 이것은 무서운 시험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은 우리의 깊은 잠을 깨우고 계십니다. 나의 누이야! 나의 사랑아! 나의 비둘기야!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오. 내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주님은 주님이 몸 찢고 피 흘려 세우신 자기 교회에서 찬송과 영광과 경배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주님은 예배 중에 드리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회개의 기도와 예물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신자들이 교회에 다 모여서 날마다 성찬식을 베풀고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는 잠자는 자들이 아닙니다.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일에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고 영적 흑암이 우리 머리 위를 덮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갈등을 회복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신랑과 함께 하는 신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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