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열 손가락이 나의 시봉일세” 치열했던 불교정화운동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이 새롭게 태어난 이후 1963년, 1973년. 그리고 1979년 세 번에 걸쳐 총무원장에 오른 스님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경산스님이었다. 경산 스님은 1917년 6월 21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 1936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홍수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고 1945년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1956년 정화불사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62년에는 ‘재단법인 동국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그 후 세 번에 걸쳐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맡아 대한불교조계종단의 기틀을 탄탄히 다져놓고 1979년 12월 25일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서 홀연 열반에 들었다. 경산 스님은 불교계에서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일찍 오른 셈이었다. 불교계가 설립한 동국대학교의 재단이사장을 거쳐 1963년에는 통합 조계종단의 총무원장 자리에 올랐으니, 말 그대로 경산 스님은 한국불교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셈이었다. 그러나 경산 스님은 수행자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겸양의 미덕’을 변함없이 실천하고 보여주는 그런 스님이었다. 경산 스님은 20년 연하인 후학들에게나, 자식과도 같은 상좌들에게 단 한번도 “이래라, 저래라!”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왔느냐, 갔느냐”고 묻지도 않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오셨는가?” “가셨는가?” 존댓말을 쓰셨고 “이렇게 하시게나”, “저렇게 하시는 게 좋을 듯 하오마는..”하는 식으로 늘 경어(敬語)만을 사용하였다. 경산 스님에게 하심(下心)과 겸손은 그야말로 기본이었고, 누구를 만나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지극정성으로 모시기를 즐겼다. 그래서 경산 스님의 그 꾸밈없는 ‘겸양의 미덕’은 경산 스님의 대명사처럼 따라 다녔다. 총무원장 자리는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일과로 꽉 짜여져 있다. 그런데도 경산 스님은 당신이 총무원장으로서 종무처리에 바쁘다는 이유로 예불을 단 한번도 빠진 일이 없었다. 심지어 경산 스님은 종무로 지방에 출장을 가든, 해외 불교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을 하든, 호텔방에서라도 부처님의 탄생지 인도 땅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참선 정진을 빠뜨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산 스님은 사찰의 청규를 철저히 지키는데 모범을 보였고, 총무원장으로서 종무를 처리하다 공양시간을 놓치게 되면 어김없이 ‘때 아닐 때 먹어서는 안 된다’는 청규를 엄격히 지키느라고 굶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경산 스님은 공인(公人)으로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 심지어 개인적인 용무로 출타할 적에는 총무원장용 승용차를 타지 않고 반드시 버스를 타고 다녔다. 기왕에 배정되어 있는 승용차에 대기하고 있는 운전사가 있으니 승용차를 이용하시라고 제자가 말씀드리면 경산 스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총무원장용 자가용과 운전기사, 그리고 휘발유는 총무원 공무를 보는데 사용하라는 것이지, 내 개인 볼일 보러 다니는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닐세.” 경산 스님은 또한 계율을 지키는데도 스스로 엄격함을 보여주었다. 어쩌다 제자들과 함께 유명한 ‘함흥냉면’집에 간 일이 있었다. 경산 스님이 함경북도 출신인지라 고향의 유명한 냉면을 좋아 하실 거라는 제자들의 생각에 일부러 경산 스님을 함흥냉면 집으로 모셨던 것이다. 그러데 함흥냉면은 육수에 면을 말아 나오거나 회무침에 면을 비벼먹게 되어 있으니 경산 스님은 그런 냉면을 드시지 않고 면(麵)만을 따로 달라고 주문, 기어이 동치미 국물에 면을 말아 잡수시는 것이다. “그까짓 냉면 한 번 잡수시는 데까지 꼭 그렇게 까다롭게 하실 것 있습니까?” 누군가가 곁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지만, 그 때 경산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 말씀 마시게. 사소한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감히 어찌 큰 것을 지킨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 것인가? 원래 저 큰 저수지 둑도 조그마한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고 하신 말씀을 잊어서는 아니 되시네.” 경산 스님은 늘 온화한 얼굴이셨다. 그리고 늘 얼굴 가득히 잔잔한 미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격하시고 칼날 같으셨다. 총무원장을 지내시면서도 스님은 손수 속옷을 빨아 입으시고 구멍 난 양말을 손수 기어서 신었다. 곁에서 보다 못한 제자 자운과 자용이 이제 시봉 아이를 두도록 하자고 몇 번이나 간청하였지만 경산 스님은 고개를 조용히 흔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걸 보시게. 나에게는 이렇게 열 개의 손가락이 있으니 바로 이 열 개의 손가락이 내 시봉(十奉) 이라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을 맡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그럴듯한 큰 사찰이라도 한곳 차지해서 문도들이 기를 펴고 살게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산 스님은 당신이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 살기 좋은 큰 절을 차지하기는커녕 아예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겨우 몸 붙이며 거처하시던 곳이 서울 돈암동에 있는 허름한 암자 적조암이었다. 적조암(寂照庵)은 그 이름에서도 적막함이 느껴지는 원래 강원도 설악산 신흥사의 열반당으로, 그야말로 열반을 앞둔 노스님들이 머무는 쓸쓸한 처소였다. 바로 이 허름하고 쓸쓸한 초라한 암자에 저 쟁쟁한 조계종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격무에 시달리던 육신을 의탁하고 있었으니, 손경산 총무원장은 결코 권승(權僧)이 아니었음을 이 한가지로 미루어 보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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