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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안내] 스크랩 [경북] 울진 왕피천
박충식 추천 0 조회 21 09.06.29 23: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산 깊은 강
▒ 울진 왕피천
▒ 태고의 숨결 서린 산중 명경지수

경상북도 울진(蔚珍)으로 가는 길은 참 멀다. 섬 지방을 제외할 때 서울에서 차편으로 닿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울진이다. 서울은 그만두고 대구에서 울진을 다녀올 경우에도 하루 온종일의 시간을 길바닥에 쏟아야만 한다.

강릉에서 삼척을 거쳐 울진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와 영주·봉화를 경유해 울진에 이르는 36번 국도가 뻗어있지만 높은 산들로 가로막힌 국토의 변방이라는 지리의 숙명 탓에 도통 접근이 수월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엔간히도 떠돌아다니길 즐기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울진과 늘 교제를 하며 친숙하게 지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울진의 경개에 취해본 이라면 두고두고 오랫동안 울진의 여운과 매혹을 반추하게 마련이다.

창망한 동해, 시정(詩情)이 흐르는 쓸쓸한 어항(漁港), 시원(始原)의 비밀에 휩싸인 깊은 계곡, 맑고 고운 강물, 그리고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들이 써늘히 우거진 산들이 거기에 있기에. 빼어나고 장하고 서정적인 자연경관에 앞서 울진 땅에 박힌 역사와 민풍(民風)부터가 특유한 것이라는 점 또한 기억할만하다. 울진이라는 지명을 지어 붙인 사람은 신라의 김유신이었다. 이전까지 우진(宇珍)이라 부른 이 고장을 여행하던 김유신이 ‘초목이 우거지고((蔚) 진귀한(珍) 바다의 물산이 매우 풍부하다’며 이름을 갈았던 것.

그런데 울진의 향토사는 이 고장에서 벌어진 수난과 저항의 사실들을 증거함으로써 주민들의 토착 성정에 스민 의기와 절조(節操)를 통기해준다. 울진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왜구들의 노략질로 주민들이 매양 신산스런 세월을 살아야만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엔 울진 읍내 고산성 안의 주민과 병사들이 몰살당했는데 지금도 그곳을 ‘피골’이라고 부른다. 그런 수난 속에서 왜에 대한 저항심은 일종의 체질처럼 굳어졌다. 일제 때 울진사람들의 항일운동이 유독 격렬했던 데에는 그런 역사의 뒷배경이 걸려 있다. 울진의 가장 서글픈 역사의 페이지는 조선 개국과 함께 쓰였다. 조선 창업자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민왕을 삼척에 유폐시켰다.

이에 고려의 무신 장천영과 임제 등이 뒤집힌 고려 왕조를 다시 세우기 위해 울진 삼척 등지에서 수천의 유민을 규합, 군사 행동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전에 들통나고 말았다. 이른바 고려 복벽(復酸)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의 실패는 울진에 엄청난 재앙을 몰아왔다. 거사를 꾀했던 많은 반항아들이 참살되었고 울진은 군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아울러 ‘반역향’이라는 도장이 찍혀 조선조 5백여 년 동안 울진 사람들의 벼슬길 경주가 원천 봉쇄되었다. 그래서 울진 출신으로 조선 때 군수나 현령 이상의 고위직에 오른 인사가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수난과 저항과 희생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울진 특유의 개성과 기풍이 형성되었을 터인데, 이 고장의 유식한 이들은 간단히 뭉뚱그려 울진을 ‘충절의 고장’이라고 표현한다. 아무려나, 국토의 후미진 변방이라는 지리의 팔자 따라 울진의 역사 역시 매우 스산하고 우울한 색조에 물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지금 순례에 나선 왕피천(王避川)의 지명 유래 역시 서글픈 야사 한 토막에 박혀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오늘에 이르는 얘기에 따르면 이렇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대륙에서 냅다 쳐들어온 홍건적에 쫓기고 쫓겨 영주와 영양을 떠돌던 고려의 공민왕이 마침내 이 고장 산간으로 피신, 가파른 고개를 넘어 오지 강물가에 이르러 마침내 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래 왕이 피난한 강이라는 뜻에서 왕피천이라는 이름표가 붙게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신라의 망국 직후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모후 송씨와 함께 왕피천의 강변마을 왕피리에 은신했다가 모후가 작고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야사도 전해진다.

춘양목 빼곡한 산중 소로

이른 아침 길을 나서 다섯 시간쯤 차를 몰아 울진에 닿자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로 오른 해가 사납게 이글거린다. 전면의 차창으로 줄곧 7월의 뙤약볕이 들이친 바람에 핸들을 쥔 두 손은 잘 구워진 빵처럼 붉게 그을려 있다. 하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상쾌하고 달콤하다.

봉화군 현동을 거쳐 울진땅 옥방에 들어서자 이내 불영천(佛影川)이 얼굴을 내밀고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는데 그때부터 몸으로 배어드는 대기의 촉감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불영천의 호쾌하고 영롱한 물줄기는 내내 국도 오른편을 따라 솰솰 흘러 내렸다. 그렇게 불영천과 동행하는 중에 산은 점차 깊어지고 하늘의 면적은 한결 옹색해진다.

통고산(通古山), 천축산(天竺山), 세덕산(細德山)이 그 장엄한 동체를 늘어뜨린 채 제각각 위용과 미색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울진군 서면 면소(面所)인 삼근리는 이 세 산의 뿌리가 발생하는 진원이라 해서 지명을 얻은 마을이다. 지금은 ‘삼근(三斤)’이라고 적지만 원래엔 ‘삼근(三根)’이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왕피천 상류로 통하는 출입구인 삼근리는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동네다. 면사무소 농협 우체국 외에 몇몇 민박집과 구멍 가게가 듬성듬성 늘어서 있을 뿐이다. 동네를 통째 저울에 올려놔봤댔자 그저 서 근(斤) 정도 나갈 뿐이라는 비유법으로 삼근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둘레둘레 동네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렵사리 식료품 가게를 겸한 간이식당을 찾아내어 간단히 요기를 한 뒤 국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비포장 소로를 따라 왕피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산중 소로는 연방 휘어지고 굽어졌으며 오르락내리락 거듭 고개를 타고 넘는다. 길가의 숲은 짙푸르게 우거지다못해 동혈처럼 어두컴컴하다. 거기에 춘양목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나무 하나에서 전봇대 세 개를 너끈히 잘라낼 수 있을 지경으로 바르고 길차게 자라는 명목(名木)이다.

공민왕 야사 서린 지명들

정토마을을 지나 박달재를 넘고 곡내동을 거치는 삼십 리 산길을 달려 톱거리에 이르자 갑자기 풍경의 색감이 밝아진다. 헌칠한 왕피천이 시야의 전면으로 가득 차 오른 탓이다. 강이라기 보다는 계곡에 가까운 산협 사이의 밝고 푸른 물줄기. 괴수처럼 기이하고 거대하면서도 한 점 서슬조차 없이 미끈하고 정교하게 수마(水磨)된 암반 사이를 수천 수만의 옥구슬이 구르듯 하염없이 곱살스레 미끄러져 흐르는 저 눈부신 청류…….

한여름의 더위에 시달리며 천릿길을 달려온 피로가 가뿐히 가시고 기쁜 강 풍경이 안겨주는 은은한 감동이 가슴으로 번진다. 등줄기로 흐르던 땀이 식고 묘약을 먹은 듯 전신에서 원기가 솟는다.

강물가에 어린 향기로운 대기 속엔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함유되어 있는 것일까. 강물이 연주하는 야생의 음악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 청량제란 말인가. 사람은 밥이나 반찬과 함께 햇볕 대기 향기 같은 자연이 제공하는 원소들을 제대로 섭취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건강을 누릴 수 있는 존재다. 그 고귀한 자연의 보약들이 여기 왕피천가에 무진장한 분량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세례처럼 엄습해 육신의 감각을 쾌락처럼 일깨우고 급기야 메마른 영혼에 따뜻한 숨결을 불러 넣는다. 그리하여 억누르기 힘든 존재의 기쁨을, 주체하기 벅찬 충일한 행복을 경험하게 만든다. 강의 힘, 강의 뜻이 이와 같다. 워낙 멀고 깊은 산간에 은밀하게 숨은 강인 탓일까. 피서철이 시작되었지만 왕피천은 텅 비어 적막하다. 한전 직원들 몇몇이 전신주 꼭대기를 잔나비처럼 부둥켜 앉고 매달려 뭔가 부산히 작업을 하고 있는 게 보이지만 고요한 강변 풍색에 동화되어 마치 무성영화의 장면처럼 한정없이 고즈넉할 뿐이다.

강물을 건너 왕피리 인가 속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골목을 걸어다니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왕피분교 운동장에선 제법 많은 아이들이 몰려나와 땡볕에 아랑곳없이 한창 공놀이를 즐기고 있다. 시골 초등학교를 보면 언제나 흥겨운 마음이 된다. 한순간이나마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때문일 테다. 왕피분교엔 35명의 아해들이 공부를 한다.

그중 다만 세 명만이 토박이이고 나머진 한 종교단체 사람들의 자식들이다. 왕피리 일대 여기저기에 사는 주민들의 구성도 그와 비슷하다. 토박이들이 다투어 외지로 빠져나간 한편 무려 1천여 명의 종교단체 사람들이 한꺼번에 유입되었다. 그들은 유기농업을 추구하며 왕피천변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강변 곳곳에 들어앉은 그들의 획일적인 조립식 집단촌이 시각적 불편을 느끼게 하지만 마을의 환경은 쓰레기 한 점 없이 깨끗하다. 한천(寒川), 거리고(巨里庫), 시리들, 포전(飽田), 병위(兵衛), 시목…….

왕피리의 왕피천 상류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차례차례 만나게 되는, 천변의 넓을싸한 둔덕에 자리한 강마을들이다. 대체로 공민왕의 피난 야사에서 비롯한 지명들이다. 그 불운한 왕은 왕피천에 숨어들어 포전에서 모처럼의 포식을 하고 병위에 호위병을 배치했다. 거리고엔 군량 창고를 설치했다. 한천은 피난을 마치고 엄동에 왕피천을 떠나면서 건넌 강이라는 데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물론 고증이 가해지지 않은 전설적 사화들이지만 벼랑에 몰린 고려 최후의 비애와 고초를 감지할 수 있다.

백로가 나는 장려한 강물 풍치

강을 따라 이어지는 소로는 속사에서 끊긴다. 속사. 갈대(속새)가 많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속사 어간에서 왕피천은 어언 어엿한 강의 형색을 띄기 시작한다. 최근 건설교통부는 이곳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강이라서 댐을 막기엔 더없는 적지라고 판단한 것일까.

하지만 그건 중대한 오판이자 단견이다. 왕피천은 공사의 용이성과 댐의 효용성을 앞세워 아무렇게나 훼손해도 무방할 만큼 만만한 강이 아니다. 이 강은 기겁할 지경으로 심원하고 수려하다. 은어와 연어가 회귀하는 모천이며, 천연기념물인 산양과 하늘다람쥐와 수달이 서식하는 생태의 만화경이다. 다행스럽게도 건교부의 발표 즉시 경상북도 당국은 속사댐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단 정부가 눈독을 들인 마당이니 만큼 향후의 진행은 미지수다. 아무래도 두꺼비씨름 같은 왈가왈부 지리한 힘겨루기가 벌어질 공산이 큰데 식은 밥 한 그릇 먹고 서 말쯤 땀을 빼게 되는 식의 이와 같은 코미디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길이 끊기는 속사를 돌아 나와 다시 왕피천을 만나기 위해 임광교를 건너 대령산 기슭을 에워 도는 임도로 차를 몰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험로다.

얼마 전 내린 폭우로 벼랑길 곳곳이 무너져 있고 낙석이 쏟아져 수시로 길이 막혔다. 중도에 차를 돌릴 수도 없어 이 또한 별미일세, 하며 어거지로 산을 넘었다. 그리하여 노음리의 구산교를 경유, 근남면 구산리에서 왕피천과 재회하게 되었는데……. 왕피천을 따르는 강변길은 구고동에서 다시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30여 리 왕피천 가에는 많은 볼거리들이 배열되어 있다.

구산3리엔 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구산리 삼층석탑(보물 제 498호)이, 강의 하류 선유산 자락엔 지하의 금강으로 부르는 석회동굴 성류굴이, 산포리 망양동 동해변엔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절정으로 치닫는 선경(仙境)이 있다. 구고동에서 달호마을로 구불구불 흐르는 왕피천 풍경의 기적과도 같은 태초의 정취! 장려한 풍치! 강변 단애와 강물 속 바위는 자연과 세월이 합세해 빚은 불멸의 걸작답게 신묘하고 우아하다.

유리처럼 투명한 강물은 차마 범하기 두려울 지경으로 신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강물 위론 백로가 날고 강숲에선 작은 새들이 귀여운 합창을 한다. 이 모든 경탄할만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 스민 조화와 질서의 느낌을 반추하는 사이 어쩔 수 없이 마음은 겸손해지고 소음처럼 들끓던 내부의 욕념들이 저절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이 순간 자연의 한 부속으로 순수하게 회귀하고 있다는 벅찬 감흥이 번져 오르는 게 아닌가. 문득 강물가에 살았던 옛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자연의 언어에 귀기울이며 사는 일의 참됨을 예찬했던 옛사람들의 지혜가 새삼스런 무게를 가지고 마음에 스미어 온다. 비록 나물 죽을 먹고 흐린 술을 마실지언정 신성한 강물가에 박혀 살며 자연에 동화되어 우주와 세상의 비밀을 직관으로 간파하기를 꾀했던 선인들의 산수관은 얼마나 참된 것이었는가. 인간과 자연을, 삶과 우주를 본질적으로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로 바라볼 줄을 알았던 현자들의 전통가치는 얼마나 고매한 것이었는가 <글|박원식 사진|안찬호 기자>

동해로 들어가는 80리 물줄기 왕피천은 영양군 수비면 장수포천(일명, 수하계곡)에서 시작, 울진의 왕피리 구산리 노음리를 거쳐 오로동에서 불영천을 합수한 뒤 바로 동해로 들어가는 80 리 물줄기다. 동해로 진출하는 강물 가운데에 가장 긴 강이다. 왕피천의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살피기는 어렵다. 원체 산중 오지를 굽이치는 강이라서 도처에서 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최상류인 장수포천을 답사하려면 영양군 수비면을 통해 입장한다.

왕피리로 들어가려면 울진군 서면 삼근을 들머리로 삼는다. 차를 가져가지 않을 경우엔 많은 수고를 감수해야한다. 삼근을 드나드는 왕피리 주민들의 차를 얻어타는 방법을 취할 것. 왕피리엔 민박집이나 식당은 없다. 대신에 강변 야영지는 많다. 왕피리 속사에서 강길이 사라지므로 답사를 계속할 경우에는 돌아나온 뒤 근남면에서 왕피천을 다시 만나야 한다. 여기엔 두 가지 길이 있다. 삼근으로 다시 복귀하는 방법과 대령산 기슭을 넘는 임도를 타는 방법이 그것. 임도를 따를 경우 각별한 조심 운전을 해야 한다. 악천후 땐 아예 진입을 삼간다.

오프로드를 즐기는 이라면 일부러 찾아들만한 험로로 승용차 통행은 금물이다. 산꼭대기에선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정표가 없어 헷갈린다. 왼쪽으로 꺽어들어야 근남면에 닿는다. 오른쪽 길을 타면 장수포천에 도착한다. 왕피천의 백미는 월호에서 구고동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로 사정이 다소 복잡하므로 구산리 주민들에게 귀뜸을 받는 게 현명하다. 보물로 지정된 구산리 삼층석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하나도 없어 군청 사람들의 무신경을 짐작케 하는데 그 아담한 석탑은 왕피천 농원 바로 옆댕이에 있다.

주변의 볼거리

불영사/ 울진군 서면 하원리. 40리 불영천 계곡의 중간부에 위치한 천년 고찰로 비구니 도량답게 정갈하고 은은한 운치가 흐른다.

울진 오일장/ 2자, 7자 붙은 날에 선다. 재래 시장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덕구온천/ 울진군 북면 응봉산 덕구계곡 부근에 있는 국내 유일의 자연 용출 온천.

정보 울진21닷컴(www. uljin21.com) 김태광.

↑ 안내도
승용차/서울⇒강릉,삼척⇒울진(335km) | 서울⇒제천,영주⇒울진(310km) | 서울⇒충주,안동⇒울진(410km)

대중교통편/동서울터미널(☎02-446-8000)에서 08:15부터 15:15까지 1일 7회 울진행 버스 운행. 약 6시간 30분 소요.

왕피천 일대엔 영업집이 별로 없다. 근남면 구산3리 왕피천 휴양농원(☎054-783-0625) 정도가 있을 뿐인데 콘도형 방갈로와 야영장이 마련되었다. 농원 앞으로 흐르는 강 풍경이 압권. 왕피천과 가까운 울진읍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도 괜찮다. 알프스여관(☎054-782-3411) 외 깨끗한 모텔이 많으며, 식당은 남양숯불갈비(☎054-783-2357)와 구이 전문집인 늘푸른목장식당(☎054-783-4143)이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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