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46:6]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금을 쏟아 내며 - 여기 사용된 동사 '줄'의 문자적인 뜻은 '흔들다', '풍부하게 붓다' 등이지만 '탕진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우상 숭배자들은 천하고 무치한 신상을 만들기 위하여 아낌없이 금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은을 저울에 달아 - 저울에 무게를 다는 행위는 대체로 신중하고 사려깊은 정서를 반영한다.
그러나 낭비하듯 값비싼 금을 사용하는 우상 숭배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 바로 앞 구절을 중시할 때, 본문은 '그들은 정확히 그 눈금을 보지도 않고 값싼 금속을 취급하듯 되는 대로 양을 달았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장색에게 주고 - 정확한 원문 지역은 '대장장이를 고용하고'이다.
[사 46:7]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 우상 숭배자들은 고용한 대장장이가 제작한 우상을 그들의 어깨에 메어 신전 혹은 그것을 고정시켜 둘 자리로 옮겨간다. 이 같은 묘사의 목적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어깨에 메여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에게 복종을 표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의 처소에 두면 - 본절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대조시키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므로 영원하시며 무소 부재하신 반면,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그 처소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우상은 누가 옮겨가기전까지는 전혀 움직일 수도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구하거나 그들의 소원을 들을 능력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다.
[사 46:8]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패역한 자들 - 문자적인 뜻은 '범죄한 자들'인데, 문맥상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던 자들'을 지칭한다. 장부가 되라 -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로서 어렵지만 '이쉬'로부터 파생된 '남자처럼 행동하라'의 의미를 지닌 용어로 보면 무난하다.유사 용어인 헬라어 '안드리제스데'가 고전 16:13에서 사용되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남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문맥상 어리석고 무가치한 우상 숭배 행위를 과감하게 청산하는 것을 뜻한다.
[사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옛적 일을 기억하라 - 여기 '옛적 일'은 '리쇼노트'로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시고 또 그 예언된 바를 성취하셨던 일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고서 하나님이 그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깨달아야만 한다.
이 같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상기케 하기 위함이다.
[사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 역사를 깊이 상고함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역사의 시종(始終)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의 그것이다. 이 이슈와 관련하여 최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유'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하나님은 미래에 무엇을 하시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시나 그 중간에 인간과의 대화, 곧 인간이라는 파트너의 반응에 따라 그 역사 계획을 수정하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대로 행하실 자유와 수정하실 자유를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역사는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 같은 주장은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자유성을 변호하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그 중심을 살펴보면 위험성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자유를 말하는 것 같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유를 말하기 위하여 그같이 주장한 것이다. 인간의 역할, 반응의 중요성을 확대시킨 이 주장은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반응을 적고 있다. 죽을 것을 선언받았지만 기도를 통하여 그의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그 대표적 모범이다. 그러나 이 사건 역사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하에서 되어진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에 따라 그의 계획을 변경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불변적으로 일관되게 시행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 곧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은 그의 계획과 그 실행의 신실성에 있다. 모략이 설 것이니...이루리라 - 여기 '모략'은 하나님의 계획, 뜻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반절이 하나님의 역사 계획의 일관성을 강조한다면, 본하반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 계획을 일관성있게 진행하실 뿐 아니라 주권적으로 세부적인 사항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사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 여기서 1차적으로 의도된 인물은 고레스임이 분명하다. '동방'은 바사를 의미한다. '독수리'로 번역된 '아이트'는 '솔개', '매', '독수리'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호전적인 왕, 움직임의 신속성, 황폐를 낳는 강한 세력 등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개역 성경을 비롯한 영역본들은 본 용어를 '독수리' 혹은 맹금으로 번역한 것이다.
성경에서 전쟁을 좋아하는 왕을 독수리에 비교하고 있는 예는 많으며, 문맥에서는 고레스가 큰 힘과 용맹성으로 열방들에게 나타날 것과 마치 맹금과 같이 갑자기 그들을 덮칠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본 용어가 사용된 듯하다. 실제로 고레스의 군대는 긴 창에 황금빛 찬란한 독수리 형상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 - 여기 '모략'은 10절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본절에서는 고레스가 단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불리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고레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가 말하였은즉'이라는 강조사가 동원되고 있다.
[사 46:12]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마음이 완악하여 - 본래 이 표현은 대담하고 용기있는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데 대담한 자,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에 저항하고 대적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자, 곧 본서의 표현대로 하면 영적으로 우매한 자를 가리킨다.
나를 들으라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매한 결과, 죄를 짓고 포로로 잡혀 갔지만 포로의 징벌 속에서도 징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관심 집중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사 46: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하나님께서는 한 인물을 들어서 그의 계획을 실천하실 터인데 그 인물이 행할 일의 내용을 본절은 '나의 의', '나의 구원', '나의 영광' 등의 용어들로 정의하고 있다. 개역 성경을 볼 경우 '나의 의'와 '나의 구원'만이 평행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나, 원문 성경을 보면 '나의 영광'과 '나의 구원'도 평행구이다.
주목해야 할 사항은, '나의 구원'과 '나의 의'가 갖는 관계이다.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의에 대하여 가장 잘 언급하고 있는 곳은 롬 3:21이하이다. 로마서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적 의를 동시에 설명한다. 이같이 로마서와의 연관성 속에서 살필 때, 본절의 의는 인간에게 전가되는 구원의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 자신의 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죄인을 의롭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손상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 동방에서 일으킬 한 인물과 지금까지 논한 하나님의 구원을 낳을 하나님의 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1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방의 인물은 역사적 인물인 고레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레스를 그 궁극적 인물의 예표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몽매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레스를 통해 포로 귀환의 장도에 오르게 하실 뿐 아니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고레스로 예표된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본절은 멀리서 조망하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