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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달의 기수 짜장면
사람 나르는 차 말고 길거리를 오가는 제일 흔한 풍경.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유독 번창하는 서비스문화라 한다면. 실로 우리는 배달(倍達)의 후예로서 배달(配達)의 신기원을 기어코 창출 해냈다. 이 倍達이 이 配達과 합치되어 엉뚱하게[도 이 配達을 극대화 시킨 작금의 현실. 아무렴 어떤가. 고대 한국을 가리키는 倍達민족이 우편물이나 신문, 음식을 열심히 나른 配達 덕분에 동반가치를 누린다는데 달리 어쩔 거냐.
숫제 이제는 한 술을 더 뜬다. 나이든 분들은 뭔 소리를 하는지 조차 모를 것이지만 발표에 따르면 ‘배달의민족’이 2017년 '20대가 가장 사랑하는 배달앱'으로 선정됐다. 모 연구소가 전국 20대 남녀 1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17 20대가 가장 사랑한 브랜드' 설문 결과에 따르면, ‘배달의민족’이 배달 앱 분야에서 브랜드 친숙도, 브랜드 애호도 등 영역에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배달 앱 분야에서는 ‘배달의민족’ 외에 요기요, 배달통, 카카오톡 주문하기, 배달365, 띵동 등 다양한 서비스가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고 한다.
외식 프랜차이즈 업계를 점령한 배달문화는 설빙이라는 빙수까지도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녹으면 끝장 일 것인데 배달에 적합한 빙수 레시피와 녹지 않는 포장법 등을 연구해 드디어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이런 배달문화의 조기정착은 아마도 1,2인 가구 증가와 야식문화, 배달앱 발달로 배달 수요가 증가한 데 따른 것일 테다.
최근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느끼는 문화차이를 그린 ‘어서와~한국은 처음이지?’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가장 ‘큰’ 문화차이와 즐거움은 무엇일까? 외국인들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서울의 밤 문화다. 이 때문에 청춘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서울의 3대 핫 플레이스 이태원, 홍대, 강남은 외국인들에게도 손꼽히는 인기 여행지. 소주와 맥주를 혼합한 소맥역시 서울에 방문하면 꼭 마셔봐야 하는 주류로 소개된다.
그리고 우리의 찜질방, 스파(spa)문화가 정착되면서 외국인들도 목욕문화를 더 이상 낯설게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찜질방과 목욕탕이 합쳐진 독특한 한국의 ‘찜질방’ 문화를 만나 볼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특히 나체로 탕에 들어간다는 것이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경험 중 하나. 찜질방에서 먹는 찐 계란과 미역국은 외국인들도 좋아하는 코스로 손꼽힌다.
우리네 길거리 음식도 빼놓을 수는 없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가장 좋아하는 문화 중 하나가 한국의 노점문화이다.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 푸짐한 양과 맛에 만족감을 표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뜻밖에도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거리 음식 중 하나가 바로 ‘감자 핫도그’와 ‘떡볶이’ 명동에서 팔고 있는 ‘똥 빵’역시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꼭 먹어야 하는 길거리 음식으로 알려지고도 있다.
거기에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은 또 어떤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의 뛰어난 치안이다. 편의점이 24시간 열려있고, 친구들과 가볍게 맥주를 사서 마시는 풍경이 외국인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오는 듯. 특히 한강 앞에서 먹는 맥주와 치맥(치킨+맥주), 그리고 배달음식은 문화충격 중 하나다. 어디서든 접속되는 와이파이도 크게 한 몫을 한다. 속도도 빠르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외국의 경우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료 와이파이는 문화 충격 중 하나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배달문화다. 여의도역 인근에서 전단지 세례를 뚫고 잔디밭에 자리를 잡은 외국인, 그들이 주문한 음식은 바로 피자. 주문한 지 10여분 만에 피자가 도착했다. 그들은 전철역 인근으로 가 피자를 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음식인지 선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포장 용기에 놀라고 세 개 층으로 음식을 나눠 담은 정성에 또 한 번 놀란다. 고구마를 포함해 다양한 토핑이 올려져 맛도 일품이다. 강바람을 맞으며 먹는 피자니 얼마나 맛있을까.
직접 요리하거나 식당을 방문하는 데 익숙한 외국인에게는 짜장면 한 그릇까지 배달되는 한국은 마냥 신기해 보일 수밖에 없다. 맥도날드가 배달도 한다는 사실에 놀라는 외국인이 참 많다. 그래도 배달하면 중국집이 먼저다. 밤낮 가리지 않고 배달 오토바이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에 배달시켜 먹은 뒤 그릇을 그냥 돌려주어도 된다는 사실에 더욱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외국인들.
그런 배달은 갑자기 융성해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은 효종갱(曉鐘羹)이다. 효종갱의 효자는 새벽 효, 종은 쇠북 종, 갱은 국 갱인데 말 그대로 새벽에 종이 울리면 먹는 국이란 말이다. 밤새 끓이다가 새벽녘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33번의 파루 종이 울려 퍼지면 남한산성에서 사대문 안의 대갓집으로 배달되던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 음식 해장국이다.
조선시대 재상이나 고관들의 모여 살던 궁궐주변, 그 주변에서는 지위가 높은 관리들을 위한 술자리가 자주 열렸고 그때마다 사대부들은 과음을 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회식이 밤늦게 끝났다고 해서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고관들은 속을 달래줄 음식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배달 해장국 '효종갱'으로 이 최초의 배달음식 효종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남한산성은 지금도 배추속대와 버섯, 쇠갈비와 양지머리 뼈 등등을 토장에 섞어 끓여 내오고 있다.
그래도 현세의 배달의 기수는 뭐니 뭐니 해도 중국집 짜장면이다. 일찍이 서민 문화로 자리매김한 중국집은 도처 어디에도 있으며 짜장면은 값도 싸 밥 다음의 주식이 아니겠는가 싶을 정도다. 그런 중국집도 중국집 나름이라 할 것인데 , 그 구분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배달을 안 하는 집과 배달통을 달고 다니는 중국집,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에 대한 인식은 확고하다. 이는 내 어릴 적 어렵게 대하던 짜장면의 의미와 지금의 짜장면의 가치와도 흡사 닮았다.
2. 나의 어릴 적 짜장면...
맛의 정취는 단지 맛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어쩌면 맛은 그대로인데 우리들 입맛이 멋따라 변하였거나 그 맛을 보는 입장이 제멋대로 달라져 그러할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그 시절 짜장면은 느낌만으로도 여전히 고소하다. 한 끼 대용이 아닌 뜻있는 날이나 대접을 하는 때 가치 있는 대상으로서 당당히 존재한 짜장면이다.
그윽한 품위는 아니라하여도 일회용 한 끼 후딱 해치우는 대상은 정녕 아니었다. 기대 하여도 좋았던 느낌의 대상은 친근감과 향수를 언제든 불러일으킨다. 지금도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느 이름 모를 동네 어귀를 어슬렁어슬렁 걷노라면 예전처럼 훈훈한 후각 넘치는 그곳을 지나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방의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뿌듯한 느낌마저 들게 되는 것은 그것의 친근함 덕분이다. 굳이 길을 묻거나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곳이 사는 사람 사는 동네 한복판이다. 목젖이 연실 열리고 꼬르륵 배가 합창을 하면 어느새 눈빛은 그 집의 안쪽이다. 푸른 불길을 따라 시커먼 팬이 들썩이며 볶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미 면발은 큰 솥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리라.
짤막한 당근과 호박에 듬성 쓸어낸 돼지고기 살점이 웬 떡이냐 하듯 걸려들 고소한 느낌이 인다. 꼭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은 동네에서도 깊숙한 언저리에 있다. 맛으로서 말하는 곳에선 굳이 눈이 띄는 큰 대로변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 곳은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게 되는 것이 의외로 붉은 빛 바랜 꾀죄죄함과 허술함이다.
주인부터서 깔끔하거나 멋들어지지 않으며 책상이나 의자 또한 꽤 오래 써서 때가 잔뜩 묻어 있거나 칠한 것이 반쯤은 벗겨져 있고 뒤뚱거림이 세월로 느껴진다. 어쩌다 본 주문서의 무질서함으로 필경 주인은 오로지 맛에만 관심이 있을 뿐 글이나 셈이 더딜 것이란 생각을 한다. 실제로 나는 맛깔 나는 집에서 서투른 계산을 하는 주인을 본 적이 많다.
홀 안쪽엔 조개탄을 때는 난로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큰 주전자가 올려져 있다. 주문을 한 손님들이 의자에 걸터앉아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감싸 쥐고 있는 것이 차 한 잔이다. 차 한 잔은 단지 몸을 녹이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다. 입안을 향긋하게 하며 기다림을 선사한다. 유독 더디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은 맛의 기대와 더불어 기다림의 맛을 얻는다. 그런 기다림 속에 얻는 맛은 향기롭고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면발 두들기는 소리에 먹는 꿈도 따라 솔솔 익는다. 이미 배고픔은 정점에 닿았다. 때꼽이 낀 고추통과 식초 통 간장꾸러미를 물끄러미 마냥 보기가 무료하여 젓가락을 칼 갈듯이 휘저어보기도 하고 반찬이라고 내어놓은 단무지와 양파에 식초를 확 끼얹고서는 한 조각 두 조각 베어 문 것이 절반을 넘어서며 급기야 초조하기도 하지만 주인은 여전히 태평스런 모습이다.
이제나 나올까 줄곧 가던 시선 속에 거지가 따로 없다. 들어온 순서를 꼬박 기억하여 순서가 틀리지 않은지 따져보기도 한다. 할 수없이 갈 곳 없는 시선은 어느새 옆 자리 묵직한 그릇 쪽에 쏠린다. 지금의 얄팍한 플라스틱하고는 차원부터 틀리다. 잘 들려지지도 않고 깊숙이 파인 사기그릇은 조금 깨져 있거나 그릇 꽁무니에 푸릇하게 새긴 용이 반쯤은 달아나야 제 맛도 날 법 하다.
옆 테이블엔 매콤한 짬뽕 국물 진한 맛이다. 그런 때 잘못 선택한 주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들 때도 있기는 하다. 이윽고 배고픔이라기 보단 갈증이 원성으로 돌변하려 할 쯤 주인공은 등장한다. 짜장면은 살짝 익힌 면발 한가운데 수북이 쌓은 짜장이 온통 검게 물들여 도저히 고기와 당근 쪽이 따로 구분이 안 될 정도이며 그 정 중앙에 시작점이 되는 상큼한 순 콩 세알정도가 놓여 정상을 차지해야 한다.
콩을 어찌하란 것인가. 잠시 후 검은 면발에 덮여질 세상을 주저 할 것이라면 한 알 한 알 들어 올려 호흡을 조절하며 시작임을 알리는 예는 갖출 필요도 있다. 긴 면발인 만큼 좌로 면발을 돌려 말 것인가 아니면 우, 그렇게 몇 번을 꼬아 한 입을 만들 것인지 심호흡이 필요로 한다. 그런 짜장면은 일격에 입 주변이 검게 물들여 그것에 의해 정복되었음을 느낄 때 비로소 제 맛이다.
그 맛을 어찌 따로 형언할까. 무엇이든 처음의 만남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그런 짜장면은 내게 있어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내가 짜장면을 처음 만났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끝나는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가 내 평생 털어 가장 공부를 잘하였던 때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황토길 넘어 나와 동생을 데리고 시내로 향하였었다.
눈 맞으며 언덕길을 내려오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였다. 나는 그때 다짐하였었다. 지금처럼 아버지를 늘 즐겁게 하여 드리리라. 그 날 아버지는 우리를 처음 중국집에 데리고 갔었다. ‘뎀뿌라’라고 하는 것을 시키고 짜장면을 시켰다. 처음 대하는 짜장면이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 엄마는 없었던 것이 아마도 엄마의 입에 밴 그 습성으로 보아 그 비싼 값에 애들이나 많이 사주라 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 대하는 맛의 화사함에 동생과 나는 아버지 호주머니 생각은 안했다. 짜장면의 달콤함과 더불어 묻어나던 그때의 아버지 눈빛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약속조차도 지우고 살아왔다. 단지 남은 것이 있다 한다면 그 짜장면이 갖는 달콤함이다.
바람 불어 좋은 어느 날 아무 연고도 없는 어느 낯선 곳에서도 그 짙은 후각에 취해 스스럼없이 그 시절의 짜장면이 다시 떠오르며 향긋한 아버지 미소와 더불어 그 눈발 날리던 꽃길이 유령처럼 다가서는 것은 필경 아버지가 내게 심어준 그 서정이 깊고 또 깊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짜장면은 내게 느낌만으로도 여전히 고소하며 기대 하여도 좋았던 느낌의 대상으로 친근감과 향수를 늘 갖고 내 곁에 머무는 것이다.
** 당시 안양의 한일목재 옆에 있었던 한일관이란 중국집이 바로 내가 찾은 그 집인데 수 십 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내 글을 읽고 당시의 그 집 아들이란 분이 연락 온 적이 있다.
3. 짜장면 수난시대에
한때 짜장면은 표준말이 아니고, 자장면이 표준말인 때가 있었다. 당시 시인 안도현은 어른을 위한 동화 <짜장면>에서, 자기는 어떤 글을 쓰더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장면’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일 뿐, ‘짜장면’의 추억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맞춤법이라고 하여 ‘자장면’이라 할 수는 없을 뿐더러 어느 중국집도‘짜장면’일 뿐이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내가 항의차원에서 동참을 하려 들어간 카페가 바로 회원이 18명인 다음카페의‘짜장면 되찾기 국민운동본부’(jjajjajjajang)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하고 들어갔는데 들여다 본 즉 너무 재미있었다. 이하 몇을 옮긴다.
(구호는?)
짜장면이 자장면이면 짬뽕은 잠봉이다 반대! 자장면! 회원은 32인 개설일 2002 11주인 짜짜짜장 랭킹 4단계
(본부 창당시 주인의 변을 요약하면?)
최근에 '짜장면'이란 명칭을 '자장면'으로 고쳐서 쓰는 경향과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시발점은 5천만 국민, 아니 남북한 7천만 겨레가 수십 년간을 사용해온 짜장면이란 명칭을 보수 국문학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장면'이 표준어라 주장하며 개칭을 강요(?)하자 공중파와 출판매체들이 표준어 사용이라는 명분하에 모조리 '자장면'이라 부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본 <짜장면 되찾기 운동본부>는 이런 말도 안되는 시대 퇴행적 주장에 반대하면서, '자장면'을 강요하고 있는 국문학자와 언론들을 향해 대중의 정서에 위배되는 언어 사용을 중단할 것을 강력 요청한다! 참으로 이것은 대중의 정서와 뜻을 무시하는 일부 국문학자들의 보수 회귀적 발상에서 나온 억지 주장과 선동인 것이다. 짜장면의 한자상의 원래 발음이 '자장면'임은 우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한자의 중국식 발음은 오히려 '짜장면'에 가깝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수십 년 간 '대중적 합의'아래 사용해온 명칭을 대중들의 동의 없이 멋대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은 알만한 국문학자들이 언어를 마치 죽은 화석으로 취급하는 작태에 불과하다. 언어는 생물과 같다. 언어학자들도 언어의 변화 주기를 30-40년으로 잡는다. 그러므로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의 합의'인 것이다.
어제의 슬랭이 수십 년 간 대중들의 사용으로 나중에 표준어로 자리잡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짜장면은 이미 대중들의 표준어로 사용되어 왔고, 오랫동안 한민족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한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바꾸자는 것이다. 그럼 차라리 상투도 다시 틀자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요구와 주장을 선언한다.
-. 우리는 자장면을 원치 않는다. 국민의 명칭 짜장면을 다시 돌려달라!
]-. 짜장면이 자장면이면, 짬뽕은 잠봉이다!
-. 모든 공중파와 언론매체는 이제부터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으로 정확히 발음하고 표기해 줄 것을 강력 촉구한다!
-. 한번 짜장면은 영원한 짜장면이다! 짜짜짜장!
(회원들의 주요 주장사항은)
짜장면이 자장면이면 농심에서 나온 짜파게티도 자파게티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자장면 야기만두 잠봉 감풍기로 고쳐야 한다.짜장면을 자장면으로 주장하는 국내 이상한 국문학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퇴출시켜야 한다. 바보 같은 인간이 강단에 서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피곤해진다.
차제로,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1년 첫 생일 잔치 돐을 돌이라고 이상하게 고쳐놓은 것도 되찾고 싶다. 제까짓 것 들 대가리가 돌이면 돌이었지 왜 귀중한 돐을 돌로 고쳐놓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설겆이를 설거지로 고친 것까지는 봐 줄 수 있다. 그걸 고친 사람이 거지같은 인간이니 그 머리 속에 거지밖에 더 들어있겠는가. 이것까진 봐주지만 짜장면과 돐잔치 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비록 회원이 18명에 불과했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사실 나도 분개했다. 짜장면이 자장면이면 그럼 짜장밥을 자장밥이라 해야 하나. 간짜장을 또 간자장이라고 해야하는 것이고. 우리의 여영원한 동반자인 짜장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에 청국지계가 만들어지고, 이때 물밀듯이 들어온 중국인들이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로 팔았던 싸구려 음식이다.
곧 중국산둥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밀가루장을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비벼 먹게 한 것이 짜장면인데, 그래서 한자로 쓰면 불에 튀길 작(炸), 간장 장(醬), 밀가루면(麵)하여 ‘작장면’(炸醬麵)이다. 그런데 ‘작’(炸)은 혀를 입 안으로 깊이 말아 올리면서 ‘짜’에 가깝게 발음되기 때문에 현재의 표준말인 ‘자장면’보다는‘짜장면’이 더 맞다. 일본사람들도 즐긴다는 짜장면은 그들 혀 구조상 '자잔면'이지만 우리로서는 실감나는 짜장면이 아닌가. 강렬한 표현이 가능토록 한 세종대왕도 당연 짜장면일 것이다.
푸슬푸슬하게 담은 보리밥 도시락을 콩자반 반찬으로 먹던 아이들이 어느 날 허기져 집으로 돌아 설 때 오거리 못 미쳐 식당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식냄새라니.... 얼기설기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가루 반죽을 치고 늘여 국수를 뽑고, 자루 달린 무쇠 냄비를 연탄불 위에 놓고 연방 짜장을 볶는데, 정말 미칠 노릇이 아니었던가. 춥고 배고팠던 그 시절, ‘화폐경제’가 있을 리는 없고, 주먹을 불끈 쥐고 집으로 내달리는 우리들 등에 텅 빈 도시락 소리만 달랑달랑 요란했다. 제대로 한 번 먹지 못하고 이제야 소원 풀 듯 동경해 마지 않던 그 짜장면을 말아서 먹어 보자는데 김 팍 새게 자장면이라니.
만일 그 언젠가 꽃이라는 사물에 악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우리 뇌리는 악어를 고움과 아리따움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악어라는 동물에 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꽃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포식자로 인식됐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언어의 사회화라고 한다. 언어는 그 사회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어느 일부의 언어습관에 의해 합의되지 않는다. 결국 서민 사회가 이겼다. 누구든 짜장면이라 하는데 어쩔 것인가. 하지만 짜장면이 표준말이 다시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은 사회성과 기존의 통념이 충돌할 때가 꽤 많다. 문명이 급속도로 진화하며 숱한 신조어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세대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가 신조어에 대한 이해도일 정도다.
신조어 중 사회화 과정을 거쳐 후손 대대로 통용될 언어들이 있고 특정 계층 간 소통의 도구로 활용되다 구시대의 유물로 폐기처분 될 언어들도 있다. 언어의 생사여탈권은 사회화가 쥐고 있는 셈이다.요즘 은어(隱語)나 비어(卑語)는 민망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외계어가 난무한다. 주로 청소년들과 청년층의 대화, 특히 SNS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이다. 이를 나무라야 할 언론 특히 방송 예능프로그램들이 되레 나서 외계어를 뿜어내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지천이다.
그들만의 소통 도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로서 자괴감을 느껴야 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기특하지는 않다.결국 언어의 사회화는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화가 출산한 언어는 세대가 다르더라도, 이념이 다르더라도, 생각이 다르더라도 같은 언어권의 사람들이라면 쉬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선거구 획정도 우리글을 깨우친 사람이라면 켯속까지는 몰라도 액면 그대로는 안다. 다만 왜 국정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다. 정치깨나 한다는 분들이 이미 사회화 과정을 거친 쉬운 언어들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국민들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외계어 쓰면서도 창피한 줄 모르는 철부지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해독 불가인 정치형태도 마찬가지다. 모르긴 해도 이번 정부는 눈 멀고 귀 막고 소통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본다. 흡사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우겨대는 것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이지 않은 게 너무 많다. 분명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가루 반죽을 치고 늘여 국수를 뽑고, 자루 달린 무쇠 냄비를 연탄불 위에 놓고 춘장을 볶는 음식은 영원히 짜장면인 것이고 그것이 사회성이며 곧 전통이다.
4. 나로선 극히 이상적인 짜장면 집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주렁주렁 걸린 집과 배달을 안 하는 짜장면 집의 차이라 할 것이면, 나는 단적으로 이 대비를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인 만큼 맛도 그만이지만 대신에 값은 비싸고 양도 적은 중국집과 맛과 양은 그저 그 정도에 홀 안의 정취도 공간도 없으며 그 대신 값은 싸고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한 중국집으로 크게 대별해 나눈다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싶다. 실제 우리 동네는 두 가지 유형의 중국집이 있다.
나는 사실 그게 불만이다. 맛도 있고 값도 싸며 양도 많은 그런 이상적 유형은 존립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내 중론이다. 숫하게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런 내게 행운이 찾아 왔다. 내 동네서 떨어져 신탄진의 공단의 배후가 되는 쯤의 구즉이라 하는 동네는 지극히 서민적인 동네로 배달문화가 최고조에 달하는 동네라 할 것인데 그 집은 배달을 하지 않는다. 이는 맛과 더불어 값이 싸야한다는 서민적 풍경을 고려해서도 극히 이례적인 일로 여차하면 도태하기 십상인 모험을 자처한 것이다.
양과 질 거기에 저렴한 가격. 나는 만족하여 집 근처는 놔두고 늘 그 집을 찾곤 한다. 사실 내가 그곳을 찾는 주된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이틀 전이다. 아들들이 떠난 단출한 부부는 요즘 외식이 잦다. 그날 그 집은 엄청 붐볐다. 주말이 아닌 데도 가족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꼬마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린이날도 아닌데 그렇다면 졸업식이 틀림없을 테다. 주문을 했지만 더디게 나올 것은 당연한 노릇, 그렇지만 무료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바로 보이는 아이들 셋하고 젊은 부부의 모습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음식을 기다리다 못해 지쳐 단무지를 냉큼 든 아이, 엄마는 나무랬다. 나무란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라는 달래는 달착지근한 표정이었다. 나도 어릴 적 저런 경험이 있다. 그런 이들은 단순히 짜장면만 시킨 것일까. 그 시절은 졸업식에 짜장면도 감지덕지지만 지금은 배달문화의 기수로 끼니 한 끼 해치운다는 개념으로서 제일 흔해빠진 게 짜장면이다.
오늘 같은 날 짜장면 한 그릇이라면 이는 그들 자신들도 그렇겠지만 보는 나도 우울할지 모른다. 그런 그들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윽고 나온 음식, 탕수육. 이제 탕수육은 생일이나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의 총아로 한반도를 점령한 상태다. 가마솥에서 얼마큼을 튀겨 낸 것인지 테이블마다 놓이는 꿀물의 탕수육은 수북한 산성이나 진배없다. 이 집은 맛도 양도 늘 그러했다. 익히 아이들은 이 맛을 잘 알고들 있다. 입가에 반지르르 단물을 바르며 콕콕 찍어 쏙 집어넣는다. 무언의 함성으로서도 달달한 표정으로서도 나는 그 맛을 제대로 실감하였다.
그런데 연이어 바로 짜장면이 등장을 했다. 분명 시간차가 필요한 시점, 이는 시행착오가 아닌가. 하지만 이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주어진 어느 애틋한 정서였다. 이를 연출한 것은 의외로 식당주인 아줌마다. 짜장면은 젊은 부부 앞에 바로 놓였다. 그러고 보니 젊은 부부는 탕수육에 전혀 손을 안 댔다. 세 명의 아이들에게 탕수육 한 사라는 충족한 양은 아니다. 만약 보다 늦은 시점에 짜장면이 등장했더라면 내 마음이 무지 아팠을 테다. 식당 아줌마는 공복의 어중간한 시간을 만들지 않도록 그들의 마음까지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빠는 말을 했다. ‘이 집 짜장면은 참 맛있어. ’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다. 나는 어제 회식 때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하고 아내는 나는 원래 고기는 싫어해 하며 두 아이 먹는 모습만 바라보며 그래도 흐뭇해 하던 그 시절, 사실 얼마 전에도 소고기 집에서 값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진 나는 냉면을 먼저 시켜 따로 먹으며 고기는 손을 안 댔었다. 세월이 가도 부모는 늘 부모이다.
나는 이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아빠는 왜 안 먹어.’ 역시 그 집 큰 딸이 빠트리지 않고 이 말을 한다. 그런 나의 예상 또 하나, 분명 아내가 살며시 탕수육에 손이 갈 것이다. 내 아내도 그러했었다. 그 시절 나는 직장 회식으로 뭐로 호식을 누린 셈이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아이 셋 키우느라 잔주름만 늘었지 저 젊은 아내라고 별 다르겠는가.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이들에게 배부르냐고 묻더니만 그의 아내가 살며시 탕수육 한 조각을 든다. 이를 뿌듯한 표정으로 넌지시 바라보는 남편, 나는 그런 그들의 단란한 모습으로부터 나의 옛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지나간 유정을 달게 삼키고도 있다. 그런 남편은 아이들과 아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때 쯤 여남은 탕수육 작은 조각에 젓가락을 휘저었다. 아내가 묘한 느낌이 들었는지 한 마디 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언제 아이들을 다 키운담.’
비록 예약이라는 계획성과 깔끔함은 없지만 홀 안에 모든 정경을 낱낱이 살피며 작업복 차림에 곱빼기를 시켜도 충족하고 맛도 여타 고급 중국집에 전혀 뒤지지 않으며 서로 돈을 내겠다고 계산대에 모여드는 자연스런 풍광까지 쉽게 접하는 별 것이 아니지만 별것이 느껴지는 이 짜장면 집, 양과 질 거기에 저렴한 가격. 거기에 과거와 현재가 공유하는 애틋한 정서라니..나로선 짜장면 가격 5천원에 더하여 큰 득 템으로 번번이 행운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나날이 번창하라, 나의 이상! 우미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