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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가해 12월18일 주일 [(자) 대림 제3주일]
[수도회] 역사를 뚫고 오시어 변형시키시는 신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7,10-14
○ 제2독서 로마 1,1-7
† 복음 마태 1,18-24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의로운 사람 요셉 이야기입니다. 먼저 천사가 요셉에게
약혼자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요셉의 처지에서는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 결과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신뢰한다는 것은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때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마저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신 것으로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잘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눈앞의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을 살며 힘들어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만 있다면, 그동안 볼 수
없던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새롭게 품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하였지요. 오늘은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에 관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내 자신의 가치
2016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4주일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1-7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어떤 보석 상인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수석전시회에 들렀다가 깜짝
놀랄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돌멩이에 매겨진 가격표가
'15달러.’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이 돌멩이는 분명히
사피이어 원석이었지요. 그는 이 주인이 실수를 한 것 같아서
“이 돌이 정말로 15달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너무 비싸세요? 그러면 5달러 깎아서 10달러에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거저 주는 것입니다. 비록 큰 가치는 없지만 그래도
예쁘니까 10달러만 싸게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이 사파이어 원석을 샀습니다. 그리고
이 원석을 쪼갠 뒤에 자신의 기술을 더해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을
만들어 팔았지요. 이 원석을 가공해서 판 보석 가격은 자그마치
228만 달러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거의 26억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10달러에 구입한 만 원짜리 돌멩이가 26억 원으로
변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네요. 물론 원석의 원주인에게 그 가치를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점을 따질 수도 있겠지만, 도덕적인 부분은
뒤로 하고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 가치를
알고 또 그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가치를 알지도 또 찾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뜻밖의 요행만을
바라면서 그러한 요행을 얻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함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값진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얼마나 값진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모님과 약혼한 상태에서
성모님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지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뱃속의 아기가 자신의 아기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니 아내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꿈속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입니까? 물론
별로 힘들지 않은 메시지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인데 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성모님의 사랑했기 때문에, 즉 성모님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이 하느님의
양아버지라는 엄청난 지위를 얻게끔 했던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의
가치를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다면 성모님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가치는 물론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의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여전히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 은행 잔고는 아무리 써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성가정상입니다.
“신은 죽었다.”
고등학교 윤리 시험 시간이었습니다. 주관식으로 “신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은?”이라는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우선 정답은 ‘니체’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친구가 도대체 답을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답을 쓴 친구의 답을 몰래 봤지만 잘못
봤습니다. ‘니체’라고 봐야 하는데, ‘나체’라고 본 것이지요. 여기에
똑같이 정답을 적으면 ‘커닝’했다고 선생님께서 혼내실 것 같아서,
약간 응용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누드”
또 그 옆에 있는 친구도 답을 몰라서 이 친구의 답을 훔쳐보았습니다.
‘누드’라는 답을 보고는, 이 친구 역시 응용해서 이렇게 적었답니다.
“알몸”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또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정답을 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 얼마나
주님을 보고 있을까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가장 훌륭한 준비는
주님을 알고 또 보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요?
갑곶성지의 성탄 구유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역사를 뚫고 오시어 변형시키시는 신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4주일, 마태 1,18-24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역사를 뚫고 오시어 변형시키시는 신비
오늘 제 1독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강대국
아시리아와 그에 맞선 동맹군 사이의 전쟁 중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유다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하즈 왕은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이사 7,11)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구원의 손길을 청하라는 것이었으나 그는 청하지
않습니다(7,12).
아하즈 왕은 그렇게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은 인간역사의 틀과 일정한 장소나 시간, 특정한 사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역사를 품어 변형시키는
궁극적인 힘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고통이 드러나는 그 역사를
관통하여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경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오늘 복음의 요셉의 역할과
태도를 되새기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삶의 한복판에서 나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분명한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하는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요셉의 역할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드러나는 의로움과는 차원이 달랐지요.
그는 약혼녀 마리아가 같이 살기도 전에 잉태한 것을 알고는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마태 1,18-19).
그런데 요셉은 주님의 천사에게서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과 관계를 맺는 요셉의 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에
의탁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나 불의 앞에서 자기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항변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 요셉의
방법이었습니다. 구원경륜과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개입하시도록 여백을 드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다면서 얼마나 자주 나의 뜻을
내세우는지 모릅니다.
요셉이 지녔던 또 다른 의로움의 자세는 하느님의 음성을 따르는
받아들임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 인간역사를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바꾸는 것은 의로움이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당시 사회질서와 율법에 비추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묵인한 것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뜻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의 의로움은 단순한 불의의 거절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동참을 통해서 실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그렇게 고상한 신비스러움이나 추상적인 관념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여 자신을 사랑의 신비의
일부로 내놓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오늘도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의로움에 의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다른 이들과 이 사회의 구체적인 고통에
동참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 역사를 뚫고 오시어 생명과 참 기쁨으로 변형시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성모님과 성탄
2016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4주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 1,18-24
성모님과 성탄
칠흑 같은 밤길을 몇 시간 동안 홀로 걸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그것도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 능선 길을, 물도 비상식량도 없이 쫄쫄
굶어가며. 등산을 좋아하는 저는 산 정상에만 도착하면 마구
솟아오르는 공연한 객기로 인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냥 편하게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면 좋을 텐데, 아직 가보지 않은 길,
눈앞에 펼쳐지는 굽이굽이 멋진 산 능선이 언제나 큰
유혹거리였습니다.
언젠가 오후 두시에 시작된 미지(未知)의 하산 길 산행은 새벽 1시가
되서야 겨우 끝났습니다. 동사(凍死)에다가 객사(客死) 위기를 겨우
넘기고 탈진 상태에서 외딴 민가에 도착했습니다. 너무나 목이타고
허기가 진 나머지 체면불구하고 생면부지의 민가 문을 두드렸는데,
깊은 잠에 빠져있던 노부부는 저를 보고 처음에는 간첩인가
했더랍니다. 그때 얻어먹은 뜨거운 라면 한 그릇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아기 예수님 탄생 과정을 묵상하다보니 제 무모했던
하산 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도 아기 예수님
탄생과 관련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셨더군요. 출산을 목전에
둔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칙령 하나가 반포되었는데,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하라는 것입니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예외도 필요한 법입니다. 출산을 목전에
둔 임산부에게는 유예기간을 줬어야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를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장거리
여행이나 스트레스꺼리를 피하는 것이 상식이며 따뜻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출산을 준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의 출산을 불과 몇 주 앞두고 험난한
장거리 여행길에 오르십니다. 나자렛에서 베틀레헴까지의 결코
만만치 않은 여행길이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길이지만 당시로서는 무시 못 할 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만삭의
성모님께서는 멀고도 험한 여행길에 나선 것입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 그 특별한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은 엮으면
아마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을 이
부분에 대해서 철저하게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말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여러 사건들 앞에 성모님께서는 이렇다 저렇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길 떠나라 하시면 떠났습니다. 돌아가라 하시면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이요 경탄할만한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귀하디귀한 아기 예수님이요, 가장 큰 배려와
존중을 받아야 할 성모님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구세주의 출산을 목전에 두고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특혜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만삭의 임산부셨던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예외 적용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겠지,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묵묵히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성모님의 무모한 장거리 여행, 그 배경에는
성모님의 지극한 겸손과 목숨까지 내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대림 제4주일
2016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4주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 1,18-24
지난 수요일입니다. 저녁 6시에 지인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3달 전에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삼성병원에 와 줄 수 없느냐는
전화였습니다. 동생 수녀님과의 인연으로 알게 된 부부입니다.
남편이 많이 아팠고,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였지만
병원으로 갔습니다. ‘임마누엘’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가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미사는 한 시간 늦어졌지만 모두들 기도
중에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착하게 살았고, 성실하게 살았고,
가족들을 사랑하였던 형제님의 고통을 보면서 친구 분이 하시던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 친구가 저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임마누엘’ 형제에게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터널’을 생각합니다. 잠시 어둡고 밖을 볼 수
없지만 곧 밝은 빛이 보이고 하늘의 구름과 산의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찾아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대림 1주라는 터널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으니 깨어서 준비하여라.”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그 태양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서 그 태양은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태양이 되기도 하고, 절망과 슬픔, 좌절과
패배를 간직하는 태양이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시간이 우리에게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우리의 땀과 노력과 우리의 정열을 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림 2주라는 터널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 그는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 주리라. 그의 말은 뭉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치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이제 함께 하는 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대림 3주라는 터널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길 들게 됩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려 노래하리라. 절름발이는
성한 사람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리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 우리가 우리의 몸이
아프면, 다치면 병원엘 가서 치료하듯이 이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고, 그런 우리들은 당연히 이웃의 아픔과 이웃의
슬픔과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길 합니다.
터널을 지나다 보면 저 멀리 흰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 제 4주에서 바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길
듣고, 복음에서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는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 바로 그분 ”임마누엘“이신 그분이 늘 함께 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이런 이들은 형제의 고통과 절망,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런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임을 깨닫게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임마누엘”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임마누엘 주님을 굳이
찾으러 멀리 가지도 않고, 그분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도 않으며,
매년 다가오는 “성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감사하는 시간으로
찬양하는 시간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을 준비했듯이 우리들도 기도와 희생 그리고 나눔을 준비해서
주님의 성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 형제님은 금요일 새벽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임마누엘 형제님과 세상을 떠나신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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