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001. 묵상글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 돌아가는 길. 등 )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돌아가는 길>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죽음으로써
살리는
가야할 길
가로막은 사람들
행여 다칠세라
차마 밟을 수 없어
돌아가는 길
길고 더디더라도
살림의 길
아무도
해치지 않는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 2022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 화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09547
김레오나르도 2022.09.27. 04:19
- 섣부른 찬미가
오늘 욥은 자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제 자신의 재산과 종들과 가족을 다 잃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그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욥의 고통이 한층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층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두 층, 세 층이 더 커진 때문입니다.
어제 얘기에서도 욥의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먼저 소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양과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낙타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다 죽었지요.
이때까지는 하느님이 주셨던 것 하느님이 가져가시니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라고 하느님 찬미를 합니다.
이것만도 사실 하느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소유물에게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탄이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욥은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고통을 실제로 겪게 되면 욥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의 죽음보다 내 몸의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이고,
너의 다리 절단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픕니다.
그러므로 찬미하던 욥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저를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숙제처럼 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번도 저의 출생과 인생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 빼고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한 번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니 이런 제가 고통이니 사랑이니 감사니 찬미니 얘기하는 것이 어쭙잖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나 지병을 앓는 분들 앞에서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인생이 뭔지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제이기 때문에 인생을 운운하고
저보다 더 크고 더 긴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니 격려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주를 볼 때 어제 욥의 찬미는 섣부른 찬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욥처럼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볼 때 저의 사랑 찬가나 하느님 찬미는
욥의 찬미보다 훨씬 더 섣부른 찬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섣부른 찬미가에서 성숙한 찬미가가 될 수 있도록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도 못하는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
비록 이 섣부른 찬미가인 제가
저 스스로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더 큰 고통을 제게 주실 때 잘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2018년 연중 26주 월요일
http://www.ofmkorea.org/ofmhomily/153181
김레오나르도 2018.10.01 03:24
- 고통이 성사가 되지 못하는 나?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잘 아시듯 욥기는 고통에 대한 심오한 담론집입니다.
고통이란 인간이 풀어야 할 큰 숙제이고 그래서 어느 종교든
어느 철학이든 나름대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고통이란 자업자득이기에 자기수행으로 벗어나자는 입장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로 벗어나자는 입장입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고통의 원인과 해결을 얘기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고통을 설명합니다.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는데 그것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철저히
자기에서 찾아야 해결도 자기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시불교에서는 사성제, 곧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제시하는데
고통의 원인인 과거의 업보나 집착과 애착 같은 것을 없애는(滅)
길(道을) 알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간명하게 얘기하고 있지요.
저도 자주 이런 식의 얘기를 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를 하면 “준다고 다 받냐?”고 핀잔을 줍니다.
주는 사람 탓을 하는데 그렇게 남 탓을 하면
영원히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지요.
주는 사람도 문제지만 받는 사람이 문제라는 거고, 안 받으면 되는데
받기 싫은 데도 받는 것은 받지 않을 수 없는 이유와 원인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이니 그 고통의 자기 원인과 이유를 찾아 해결하자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지만 저는 신앙인이기에
역시 신앙 안에서 고통을 보고 얘기하지요.
나의 죄와 잘못으로 인한 악, 곧 죄악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의 대표가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거지요.
우리말에도 고통을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누가 주기에 받는 것으로 얘기하는 건데
사람이 준다고 많은 경우는 생각하지만 깊이 들어갈 경우
하느님이 준다는 것에 생각이 이르고 그래서 하느님께 항거하는 겁니다.
욥기 또한 고통을 자기도 아니고 다른 인간도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고
하느님께서 사탄이라는 카드를 이용해서 주신다고 오늘 얘기합니다.
이에 대한 욥기의 그 유명한 말이 바로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이지요.
얼치기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변호한답시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고통을 주시지 않고 다른 무엇에 의해 고통을 받는 거라고 얘기하지만
욥기는 분명하게 하느님이 주신 거로 고통을 얘기합니다.
그 고통을 왜 주시는지 그 답이 욥기 끝에 나오지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 맞지만 주시는 이유가
역시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고 저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 우리가 성찰할 것은
우리는 자주 하느님 없이 고통을 당하고,
고통에 함몰되고 허우적대기만 할 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고통 안에서 하느님이 발생하지 않아 고통이 성사聖事가 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고통밖에 없는 인간,
하느님도 없고 사랑도 없고 오로지 고통밖에 없는 인간이
내가 아닌지 욥을 보며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
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하윤재).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더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고자 하시기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갈릴래야에서의 활동이 배척을 받았듯이, ‘예루살렘 상경기’도 배척받음으로 시작되며, 결국 예루살렘에서도 종교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품을 키워야 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3,17).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카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데레사 성녀에 의하면,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 데에 있다. ……사랑은 넘어질 수도 있고 불충분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에서 유익함을 얻어낼 수 있고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을 신속하게 없애 버린다…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사랑이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중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성녀는 “나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사랑을 비추는 연장이기를 희망합시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선교의 수호자로 모시는 것은 바로 교회의 소명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사랑이신 주님을 전하려면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사랑의 사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합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캐롤턴 반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복음 나누기는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온지 1년 된 자매님이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들어 했습니다.” 한국에 어머니가 있는 자매님도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아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어머니에게 ‘열려라’라고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다른 분들도 눈물 흘렸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복음 나누기’를 배웠습니다. 교구 사목국에 있으면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복음 나누기를 알려드렸습니다. 그 복음 나누기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복음 나누기의 영성은 말씀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복음 나누기를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에파타’를 묵상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람어를 그대로 기록한 곳이 있습니다. ‘에파타, 탈리타꿈,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입니다. 성서의 저자는 이 말씀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탈리타꿈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저는 닫힌 마음이 열리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려있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닫혀있으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으로 닫혀있는 정치인들의 마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열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을 제자들은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었을까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애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주님을 온전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라보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스승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스승님의 능력이면 스승님은 분명 예루살렘을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스승님을 알아보고 이분을 높은 곳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스승님이 높은 곳에 오르시면 그분의 제자인 우리 또한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서인지 모르지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을 보고 제자들은 분개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심판하려 합니다. 제자들은 그만큼 자만과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사람을 해치려 하는 모습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마음도 꾸짖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어디로 가고 있나요? 영광을 얻기 위해, 세상에서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걷고 있나요? 제자들처럼….
아니면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 곧 고난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그 길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임을 믿고 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나요?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늘나라의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우리들의 왕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
컨선(Concern)은 우려가 아닌 관심입니다.
어느 나눔과 기부에 관한 광고에서 듣게 된 문구입니다.
Concern은 우려가 아닌 관심입니다.
Concern이란 단어는 우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고는 이 단어가 우려라는 뜻에서 끝나지 않고 관심이라는 뜻으로 연결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려는 정적인 단어일 것입니다. 걱정은 되고 우려는 하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 말입니다.
관심은 동적인 단어일 것입니다. 관심은 우리 마음이 움직여 무엇인가는 찾아 나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려가 아닌 관심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광고는 들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 나눔이라는 손길을 펼치는 것입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시조여일(始終如一)한 삶”
가을의 절정이자 묵주기도 성월에 전교의 달 10월 첫날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어제는 성 예로니모 기념일이었고 글피인 10.4일은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꽃같은 성인들입니다.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다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같은 분들입니다. 지금까지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좌우명 같은 시(詩)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인 축일은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꽃같은 성인이 되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누구나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성소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작은 길(Little Way)', '작은 꽃(Little Flower)'이라 불리는 성녀 소화데레사는 비록 꽃다운 나이 스물 넷에 선종했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성녀입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성녀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불렀고, 비오 11세는 사후 2년만에 시성하였으며, 성녀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비오 12세 교황은 성 조안 오브 아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를 보편교회의 박사로 선언합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데레사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성녀의 삶은 복음의 메시지에 매우 가까웠고, 고통중에도 용기, 힘, 자기희생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성녀의 내적 금욕주의는 단순한 외적 행위보다는 사심없고 무조건적인 순종에 기초했습니다. 작은 길로 알려진 성녀는 거룩함을 얻기위해서는 영웅적인 행동이나 위대한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사랑은 행위들로 입증된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사랑을 보여줄까? 위대한 행위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작은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한 가장 작은 행동들이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일상의 성녀, 소화데레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극심한 병고중에 감동적인 고백들을 소개합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을 겪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모든 고통이 나에게는 달콤하기(sweet) 때문이다.”
“나는 매우 작은 영혼이어서 주님께 작은 것만을 바칠 수 있다.”
“나는 천국에서 보낼 시간을 이땅에 좋은 일을 하는데 쓰겠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미꽃이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사랑으로 ‘교회의 심장’이 된 소화데레사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어제 참 많이 나눴던 10월 한달 행복하게 할 선물처럼 찾아 온 다음 시에 감사합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떠오르는 고백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앞에서의 삶이라면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삶일 것이며 바로 성녀 소화데레사는 물론 모든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도상의 십자가의 길이 참 감동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서두의 묘사가 단호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성화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자 하늘 향한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여정임을, 궁극의 영적승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디가나 반대자들은 있기 마련이요,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 거부되자 불같이 화내는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후 지혜롭게 다른 마을을 통과해 예루살렘 여정에 오릅니다.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처신입니다.
예수님도 아름답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소화데레사도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극도의 시련중에도 치열한 사랑으로 사명을 다했던 거룩한 분들입니다. 이 두분과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인물이 제1독서의 욥입니다. 욥의 치열함이 참으로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욥은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지만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는 사방을 에워싸 버리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사방이 막힌 절망적 암흑같은 극한 상황중에서 ‘어찌하여’로 계속되는 처절한 물음이 일종의 치열한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끝까지 하느님 끈을 놓지 않고 온갖 부정적 말마디로 기도하는 치열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참사람 욥입니다. 그동안 믿고 희망했고 사랑했던 하느님이 없었다면 아예 이런 넋두리 기도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살아 남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독자(獨子)를 잃은 어머니가 원망할, 울부짖을 하느님이라도 계셨기에 죽음 같은 고통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욥의 수난과 시련의 삶에서 예수님을, 또 소화데레사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답게 결코 좌절하여 쓰러져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다하면서 치열한 아름다움을 살았던 세분들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시종여일,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3-55)
복음을 선포하고 거부당하는 경험을 통해 성숙하는 제자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진 은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온 세상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온갖 고을과 마을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악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몹시 분개할 때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신 것은 모두 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복된 소식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 오래 참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함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심부름꾼은 적대하는 자들에게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거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이 신적인 존재이고, 신적인 존재가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통일성과 겸손한 사람 안에서는 입맞춤이 일어납니다. 이는 소위 겸손이라는 덕이 신성의 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의 터에는 겸손이라는 덕이 심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하느님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나는 파리 대학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 안에서 완전해진다.” 이제 나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해를 입지도 않고 길을 잃지도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자신을 파괴할 무언가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뜨거운 숯불로부터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숯불은 나를 파괴하여 내게서 나의 존재를 앗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겸손한 사람도 자신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떠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납니다.(250)
----------------------------------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2. 빙엔의 힐데가르트, 정홍규
영성과 생활의 통합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고갈되고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의 공동기반인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스스로 메말라 가는 것을 느낀다.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신앙과 생활이 다르게 별도로 움직인다. 전례, 의식에 참여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만 당장 눈앞의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만 채울 뿐, 일상생활에 당연한 부분들, 장을 보고 먹고 입고 일하는 것들은 영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또한 영성생활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사람들과 나누며 봉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나와 우리 생활에 바탕이 되는 자연과의 나눔과 교류에는 마음을 쓰고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바쁜 시간들이다.
이렇게 해서 창조의 세계 지구는 더더욱 황폐해지고 자연과 분리된 인간의 의식에선 경이로움과 신비함이 사라지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과 영의 삶 또한 황폐해지고 이젠 곳곳에서 그동안 덮여 었던 이들의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환경과 영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눈으로 현대 학문들의 성과를 분석하면서 밝혀진 것은 결국 모든 문화에 담겨있는 지혜, 모든 영적인 전통의 중심에 담긴 깊은 통찰 안에 일치되는 내용, 곧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상호 연결되는 관계에 놓여 있고 내재적인 것으로부터 초월적인 것으로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지양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웃과 창조의 세계와 이어져 있는 나의 삶 안에서 구원의 창조를 이어가는 깊은 영성을 느끼도록 찾아가야 한다. 몸과 영이, 우리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일깨우며 지내도록 해야 한다.
사랑의 원리로 이어지는 창조의 과정에서 시대를 보고, 모든 창조물의 질서 안에서 대우주인 우주와 소우주인 인간의 연관을 보았던 12세기의 힐데가르트는 정신만이 아니라 몸의 오관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심층생태학적인 영성을 일깨운다. 우리 자신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우리가 함께 하는 자연환경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 자신의 신체기관들을 살아있는 체계인 땅(지구)에 통합된 부분으로 제험하며, 개인적인 자아의 한계를 “생태적인 자아’로 확대하도룩, 그리고 함께 하는 환경 안에서의 “연대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그런 의식에 머무르도록 이꿀어 주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
고있다.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며 이루는 관계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내적인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충전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일깨워준다. 지금까지 영성적인 줄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 부족했던 부분들을 영성적으로 다시 살도록 일깨운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루카 9,51.53)
때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길(=인생)을 걷고 있기에 그 길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오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때를 알고 어디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인생이란 길을 걸으면서도 늘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물어왔기에 사람-사건-사물을 통해서 들려오는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세상에 성취하실 구원의 때가 오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예루살렘은 단지 지형학적인 장소이지만, 이는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하는 인생과 영적 순례의 목적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순례를 영적 달음질이라고 칭하였으며, 우리의 여정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3,14)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에 이미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뒤따라야 합니다.
본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한민족이었지만,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패망한 후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식민지 정책에 동화되어 혼혈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하고 멸시했으며,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저주하고 상종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대인들은 지름길을 두고 요르단강을 건너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통상적인 길이 아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려고 먼저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잖아요. 착한 사마리아인(10,33)과 사마리아 여인(요4,1~42)입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제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이후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묵상하면 좋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상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고, 이에 대해 예전 아름다운 기억을 품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9,54)라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런 싸가지들이 있나 그래!’ 저 역시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반응을 했으리라 봅니다. 사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때 저도 전두환 일당에게 하느님께서 엄중한 벌을 내려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물론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분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사람같이 취급하지 않은 데 반해서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냉대이니 스승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도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배은망덕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심정에서 바라보면 약자이며 소수였던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다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니 자기들이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결국 당신도 다른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시고 마찬가지시군요. 물론 예수님은 이를 이미 예견하셨기에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셨고 격한 분노를 드러내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신 것은 이 일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앞으로 세상에서 당신의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에게 세상의 반응, 곧 거부와 배척에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려는 의도라고 미루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을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응답하시고 수용하신 분이시기에 결코 자신의 계획을 집착하기보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관점이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베풀었기에 당연히 환대와 환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심부름꾼들을 앞질러 보내서 당신의 행선지와 여행 목적을 알릴 이유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환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토로하시기보다 기꺼이 그들의 입장을 수용하시고, 가시려던 길을 바꾸신 그 유연함을 우리 또한 본받아야 하리라 봅니다.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 자신이 계획하고 이미 시작한 일이라도 기꺼이 바꿀 수 있고 바꾸는 유연함과 열린 마음을 제자들도 그리고 우리 또한 닮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오늘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입니다. 축일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8년부터 대축일에서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갑자기 평가절하된 기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많은 성인 가운데 제가 닮고 살고자 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 바로 소화 데레사입니다. 아무튼 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작은 자의 길을 걸으시고, 하느님 자비 앞에 빈 손으로 살려고 했던 작은 꽃 데레사 성녀처럼 우리 또한 언제나 하느님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오늘 하느님의 아이답게 살아갑시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사랑으로 기다리고 참는 예수님 마음 /
박윤식 [big-llight] 2024-09-30 ㅣNo.176432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는 사흘 정도 걸리는데 사마리아를 질러가야 했다. 그런데 그 지방은 과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아시리아 침공 이후 혼혈 지역이었고, 혼합 종교를 신봉하던 터라 유다인들은 그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사마리아 지방인들은 주님을 섬기는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짐 산이었기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 일행을, 그리 반갑게 맞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정하시고는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미리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위해 사마리아인의 마을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에.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갔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러모로 의기양양하였다. 그동안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능력을 보았기에. 그들은 그분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임금이 되시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시대가 오리라는 기대마저 가졌을지도. 그런데 ‘예루살렘 가는 그 길’이,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막힌 거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들른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그리 달갑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장차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그 왕림을 거부하였던 거다. 우리의 영적 여정 중에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오는지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믿음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의 그 태도에 “저들을 불살라 버립시다.”라고 예수님께 물었지만,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당신의 길을 다른 길로 가셨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일반 정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까지 아무런 차별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을 그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거부하자 제자들이 격분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힘과 세력을 느낀 제자들은 이번 기회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고 싶었으리라. 가뜩이나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여느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막으니, 그들을 혼내 주는 게 마땅했을 게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이방인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생각했어도, 절대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방인으로 멸시하였다. 거기에 들어서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냉대 받는다. 이에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것은 그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러 오셨고, 세상을 벌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에.
예수님의 길은 정의를 내세워 폭력으로 누르고 뚫고 가는 길이 아니다. 사랑의 길이 당당히 아니면 돌아서 가는 것이 그분의 여정의 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다리고 참으며 끝내 사랑하는 것이 그분이 지니신 마음이다.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잠재된 분노와 폭력성이 정의라는 탈을 쓰고 종종 그 얼굴을 드러낸다. 이런 예수님의 큰마음을 우리는 언제 배울 수가 있을지?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리라고 아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마태 23,3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는 것 또한, 그곳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삶은 늘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6,22)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굳히신 것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없애려고 하는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기쁘게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따라 살기는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여야 합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을
루카복음 사가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찼다'는
표현으로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메시아 왕으로서 다윗 왕궁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벌을 주려고 합니다.
왕으로서 받으셔야할 마땅한 대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마리아인들도 그 사실을 알아서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왕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자기들에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쳐 가실 것이기에
아무리 위대하고 화려한 왕일지라도
남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영광에 앞서 수난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난을 통한 영광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야고보와 요한은
왕 대접을 이야기하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지금 당장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쉽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나도 그 이익을 얻을 것 같고
한편에서는 그 이익을 갖지 못해 아쉽게 느낍니다.
쉽지는 않지만
한 걸음 물러나서
삶의 순간들을 볼 수 있을 때
당장의 이익이 아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야고보와 요한처럼,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처럼
나만을 위한 행동
그리고 결국 나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행동은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칩시다!
한류 열풍의 기세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K-드라마나 영화, 가요인데, 그저 흥행만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풀라는 의미인지,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격자인 인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이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공격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천하 밉상인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요한 9,54)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 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한 상황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 길로 가면 도보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적대감과 반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전반적인 실제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고,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고, 배척하고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에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이웃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2)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인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심부름꾼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음식과 숙소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모욕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이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다면, 그들은 모욕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7).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는 자기들이 당한 일은 곧
예수님이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두 사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똑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2열왕 1장).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일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우리도 살다보면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들의 횡포를 참기가 힘들 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
그럴 때에 하느님께 ‘정의의 심판’을 간청하기도 하는데, 그 간청이 선을 넘어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빌거나 악인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권리와 권한이 없습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천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지 말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1)”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51-56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오늘 복음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당신의 희생과 보속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하셔야 할 그 때가 되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제 발로 당신이 죽으실 장소로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소명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 주지요. 히브리어로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당신 목숨을 희생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그랬듯 강력한 힘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랬듯 계명과 율법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대사제가 그랬듯 세속적인 부와 명예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며 외면하는 십자가와 희생을 통해, 벗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는 참된 사랑을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비를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 않고 자기들이 적대시하는 유다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는, 힘든 길을 가시는 그분을 자기들 마을에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지요. 상대방이 내 기대와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금새 실망하고 원망하며 미워하기까지 하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소중한 은인을 철천지 원수처럼 대하는 미성숙하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그리고 자기들을 냉대하는 사마리아인들의 모습에 울컥해서는, 감히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저 못된 놈들에게 ‘불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겁니다. 그들이 왜 화가 났는지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실수와 잘못, 부주의로 인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제 마음을 상하게 한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만 하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셨던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아마 그들에게 이 말씀을 상기시키셨겠지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가6,32-33).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유혹에 넘어가 길 잃은 양을 벌주러 오신게 아니라 끝까지 찾아내어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같은 소명을 맡겨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심판하고 단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과 자비로 끌어안을 중요한 소명만 있습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린이처럼”
우주의 아주 작은 별, 장미와 함께 살다가 지구로 왔던 어린왕자는 오래전에 발표된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훨씬 후에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불란서의 셍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가 1943년에 쓴
‘어린왕자(Le Petit Prince)’는 스스로가 비행기 조종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지요.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불시작한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곳에서 어린왕자를 만나서 자기
별로 돌아가기 전가지 나눈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상소설들의 동화 같은 그 이야기가 왜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주는 것일까요?
그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한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때묻지 않은 세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어린 왕자는 여러 종류의 별을 여행하면서 별별 사람들을 만납니다. 권위적인 임금,
허영에 들뜬 사람, 자책하는 술주정뱅이, 가로등 켜는 사람, 지질학자, 사업가
사람 등등, 그는 살기 좋다는 지구에게도 왔지만 결국 그가 얻는 것은 실망과 고독이지요.
그때 그 왕자는 여우를 만나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서로의 믿음 속에서의 맺는 관계가 가장 소중하다는 진리인 것지요.
그래서 그 왕자는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장미가 있는 그 별로 돌아갑니다.
그 어린 왕자를 사막에서 만났던 저자는 그 소감을 쓴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이 소설의 교훈은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어른들의 굳어버리고
이미 잃어버린 세계를 본다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의 말을 하나를 볼까요?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서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서도 '어떤 목소리를 지녔니?',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이런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고,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니?', '그의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갖고 있니?' 따위의 질문을 합니다.”
어린왕자는 또 다르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눈으로 별을 보고 있어. 여행자에게는 길 안내자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빛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아. 학자들은 별을 어려운
문제로 삼고 있고, 내가 만난 한 사업가는 별을 돈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돈으로 계산된, 권위로 주름 잡힌, 이웃의 체면을 살피는,
그래서 결국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 권위주의,
위선과 허세가 아닌 순수한 모습,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그 모상으로 우리 자신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24세의 젊은 나이에 불란서 한 작은 마을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서 짦은 수도자의
살았던 아기 예수님의 데레사 수녀의 삶은 단순하고 작은 일에도 충실했기 때문에 ‘소화’라는
칭호로도 불려졌습니다. 가르멜의 높은 담장 안이었지만 그분은 끊임없이 사제, 선교사들을
위하여서 끊임없이 기도한 것입니다.
매일매일 어린 아이처럼 욕심 없이 살 수 있도록, 작은 일에도 데레사 성녀처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복된 하루를 맞읍시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걷는 일상의 순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들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하십니다(9,52-53).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아시리아의 이주정책으로 사마리아 지역은 혼혈 지역이 되고 혼합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중심의 남쪽 지파 사람들은 그들을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집단으로 여겨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요한 4,9).
그런데 사마리아인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미움이 생길 법도 했지요. 그들은 자기들만의 종교 예절을 가지게 되었고, 더구나 주님을 섬기는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과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피해 다니던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신 것은 그런 그들의 처지를 헤아리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집단적 이기주의와 배타심으로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9,5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 어떤 원망과 불평도 없이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9,54-55).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내려오심, 수난을 겪고 죽음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기 몫을 챙기려는 장사꾼의 길이 아니라,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애타는 사랑의 발걸음입니다.
그 길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냉혹하게 응징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헤아리는 길입니다. 마음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며, 그 사람의 아픔과 영혼의 어둠과 상처를 헤아리는 천국을 향한 길이지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은 모든 이를 품기 위한 길이며 모두가 행복하기를 희망하는 길입니다. 죄인도 이민족도,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이들도,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까지도, 내 안의 증오와 다른 이들의 분노까지도 품기 위한 길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새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회개하기를 기다려주는 ‘기다림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이 겪어온 역사적 아픔과 유다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입었던 상처와 어둠을 헤아리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그들 안에 사랑이 뿌리내릴 여백을 남겨두신 채 묵묵히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이 바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입니다. 그 길은 안락한 길이 아니라 고난의 연속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고, 세상의 유혹에 맞서야 하며, 밉고 싫고 피하고 싶은 자신과 이웃의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야 하고, 때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기도 하는 길이지요.
내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님처럼 나도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 친구, 직장동료, 교회단체 구성원들의 아픔과 상처를 헤아려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인생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족과 다른 이들을 대하도록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4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인생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삶
<2024.10.1>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6:1~20절)
❝인생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삶❞
❚ 하나님은 닥친 위기 속에서 세상적인 방법을 써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1~4절).
유다의 요담 왕을 이어 이십 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스는 십육 년간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습니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1~2절). 아하스는 유다의 왕들 가운데 대표적인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유다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걸어간 길로 행했으며, 심지어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의식에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사람을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는 ‘인신 제사’를 가증스럽게 여기셨고, 철저히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서 멀리하게 되면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우상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점점 거리낌 없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잘 점검해야 합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지, 권력과 명예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쾌락을 우상처럼 탐닉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상들에 사로잡혀 있게 될 때, 우리 인생에 생각지도 않았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러한 우상들이 우리 자신 안에 들어와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함으로 그 우상을 속히 제거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우상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통해 인생에 닥친 위기를 잘 극복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5~9절).
반 앗수르 정책을 폈던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아하스에게도 동참을 요청했으나 아하스가 거절하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5절). 아람 왕 르신은 엘랏을 빼앗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6절). 이런 상황에서 아하스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앗수르 왕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면서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7절)라고 간청합니다. 아히스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참으로 굴욕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도움의 방향을 이방 왕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결국 앗수르의 봉신이 되고 말았습니다(8~9절).
우리는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짓밟는 참담한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위기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깨닫지 못하면 결국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위기 상황을 모면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하여 잠시 위기를 넘긴 것 같았지만, 곧 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대하 28:20~21). 그러므로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현재 직면해 있는 위기를 모면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 문제를 주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함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찾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전심으로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기억하여 인생에 닥친 위기를 잘 극복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함을 소유해야 합니다(10~20절).
유다 왕 아하스가 이 전 왕들에 비해 더 악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소개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만나려고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서 한 제단을 보고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냅니다(10절). 그리고 다메섹에서 돌아와 그 제단 앞에서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 각종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11~13절). ‘보다’라는 단어는 아하스가 그 제단을 우연히 또는 슬쩍 본 것이 아니라 유심히 조사하는 것처럼 본 것입니다. 또한 본래 있던 놋 제단을 성전과 새 제단 사이로 옮기라 하는데, 이는 새 제단으로 기존의 놋 제단을 대체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14절). 아하스는 제사장 우리야에게 성전에서 드릴 모든 제사는 이제 새로운 제단에서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모든 제사를 기존의 놋 제단이 아니라 새로운 제단에서 드리도록 명령했고, 놋 제단은 왕이 하나님께 물을 때만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15~16절). 아하스는 점점 심각한 악행을 일삼았는데, 성전에 놓여진 성물들을 자기의 소견대로 마음대로 제거하고 옮겼습니다(17절). 그는 앗수르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더욱더 악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왕기서에서는 아하스가 죽은 후에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 되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역대기에는 그가 비록 다윗 성에 장사 되기는 했지만, 선왕들의 묘실에 장사 되지는 못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대하 28:27).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게 될 때, 그것에 더욱 깊이 빠져 마음과 시간과 재정을 잘못된 방식으로 쓰며 죄를 짓게 됩니다. 아울러 죄를 방치하면 그것이 점점 자라 더 큰 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아하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한 죄에 빠지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지 않으면 세상의 온갖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삶으로 나아갈 때, 우리 삶에 인간적 두려움은 설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경외하는 삶을 통해 인생에 닥친 위기를 잘 극복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인생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위기들을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 전심으로 도움을 구하므로 극복해 나아갈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통해 모든 두려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6:1~2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