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기, 그 시절
이화용
나는 사뭇 과거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시절에 대단한 성취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안갯속을 걷는 것 같은 십 대를 보냈고, 꿈만 좇았던 이십 대를 되돌아보면 내 목마름을 적셔줄 무형의 어떤 것을 찾아 무던히도 헤맸다는 생각이 든다.
십 대의 나는 안국동의 학교와 계동의 화실, 하굣길의 인사동을 성실히 오갔는데, 골동품가게와 고서점, 화랑들이 난립해 있는 인사동 길은 따분한 통과의례였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골동품가게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하품만 하고 있던 주인아저씨에게서 공짜로 얻은 금이 간 두꺼비 연적을 애지중지했고, 색색의 비단실로 엮어 만든 낡은 애기 노리개가 너무도 예뻤다. 그렇다고 우스꽝스런 도깨비 민화에만 눈길이 간 것은 아니었다. 골동품상 사이에 끼어 있던 레코드가게에 걸린 엘비스 프레슬리의 브로마이드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뭔가에 걸려 벌렁 나자빠지면서 좁은 인사동 길을 메우는 마름모꼴 배지(badge)의 남학생들 앞에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했지만, 의식의 성장기에 문화적인 환경이 나에게 자연스레 배어들며 색을 입혔던 시기였다.
대학에 들어갔어도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아이쇼핑을 하거나 미팅에 탐닉하는 떼거리 문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혼자 연극을 보러 다녔고 화랑이나 전시장을 찾았다. 정통극은 지루했고 실험극은 버거웠다. 그래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의견과 취향을 조율하는 과정이 싫어서 무엇을 볼 것인가 충동적으로 정하고 입장권을 샀다. 혼자라야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동행을 배려하기에 나는 편협했고, 아니 그보다도 자의식에 갇혀있었던 것일 게다. 적당히 자만심에 빠져있었고, 얼마만큼 열등감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잿빛 청춘, 무겁기 그지없는 시절이었다.
강태기의 「에쿠우스」 무대를 관람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인 1975년이었다. 연극인 김동훈이 운니동 운현궁 한 귀퉁이에 문을 연 실험극장 소극장에서의 개막 공연이었다. 개막 첫날 첫 공연의 객석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강태기라는 낯선 배우가 17세 소년인 앨런이 되어 무대에 섰다. 자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철제 골격으로 여섯 마리 말들의 형상을 표현한 무대가 파격적이었다. 배우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생명력이 넘쳤다. 주인공 앨런의 앳된 외모, 가냘픈 반라의 몸,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뿜어내는 대사. 자신이 돌보던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소년의 의식을 정신분석을 통해 다룬 난해하고 실험성 짙은 극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무대에서 뿜어내는 열기에 나는 단숨에 압도당했다. 충격이 컸다. 그때까지의 무대에서는 느끼지 못한 충격이었다.
그보다 앞서 서른셋의 나이에 뉴욕에서 전위 무용가로 화려하게 데뷔를 하고 귀국한 홍신자의 전위 무용 무대에서도 큰 문화적 충격을 느꼈었다. 무대에는 아무런 장치도 없이 한 자유로운 영혼만이 존재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용수의 몸짓만이 모든 언어를 대신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경험이었다. 발레리나처럼 팔등신의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춘 몸도 아니고, 통자루 무명옷을 걸친 맨발의 무용수가 단지 몸짓만으로 그 여자의 우주를 표현하고 있었다. 정형화된 세계에서 느꼈던 답답함과 근원적인 것에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중독성 강한 마약이 되어 내 영혼을 얼마나 강하게 후려쳤던지 그 후부터 주로 실험적인 무대나 회화 작품, 조형물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연극 「에쿠우스」의 첫 공연 이후 그 충격적인 무대는 입소문을 통해 관객의 열띤 호응과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몇 명의 주연 배우와 여러 번의 각색을 거치면서 1991년에 1,000회 공연을 돌파하며 공연문화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기록들은 나에게는 실험극장 무대에서의 강태기의 첫 공연과는 별개인 의미 없는 숫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강태기가 연기했던 배우의 혼은 간곳없이 상업화에 물들어버린 것이다.
연극 「에쿠우스」로 인해 배우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강태기는 그 후 TV 드라마와 수많은 영화에 출연을 했다. 그러나 그가 TV 화면이나 스크린에서 아무리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해도 1975년 실험극장 무대에서 앨런을 연기하던 강태기의 파괴력을 깰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뭔가 주눅이 들어 보였다. 무대를 떠난 배우는 야성을 억누르고 동물원 우리에 갇혀 억지 생존을 해야 하는 한 마리 딱한 짐승이었다. 무대, 스크린, 영상의 간극이 허물어진 시대를 역행하는 생각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왜 강태기에게서 ‘앨런’을 연기하던 순정한 배우의 모습만 보려고 하는가?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내가 살 수밖에 없는 삶, 그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데 어눌한 나의 마이너적인 성정 때문일지 모른다.
오래전에 읽은 신문기사가 떠오른다. ‘노동하는 철학자’에 관한 짧은 글인데, 『존재에서 규명한 선禪』이란 책을 낸 재야 철학자 최경호에 관한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의 글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 정신적 방황을 하던 그는 다니던 공과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대 철학과에 다시 입학해 철학을 공부하던 중, 원인 모를 언어장애로 인해 순탄한 학자로서의 길이 불가능해지면서 재야 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는 당장 찾아온 생활고로 인해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봄여름에는 노동을 하고 가을부터는 원고를 쓰는데, 새벽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생활 끝에 내놓은 저서이다. 그는 노동으로 생활을 꾸리며 자유로운 영혼과 자신의 학문을 지켜나갔다. 세상을 살아가며 지켜야 할 가치의 방점을 부나 명예, 세간의 이목에 찍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저서는 “한국 철학의 역사에 획기적인 신기원을 이룩한 대작”으로 평가를 받는다니 놀라울 뿐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는 삶에 빈곤이 뒤따른다 해도 대책 없이 굶다가 죽음에 이르고만 젊은 시나리오 작가를 마냥 동정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 편의점 점주라는 생활인의 일상과, 아직도 현실감 무딘 ‘에쿠우스’의 강태기이기를 고집하는 서툰 외골수, 둘 사이의 타협점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색을 잃어가고 내 정신은 황폐해 지고 삶을 위한 일상만이 남아있다.
강태기가 예순셋의 나이로 2013년 3월 12일 유명을 달리 했다. 이혼과 사기, 질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머리맡에 소주병이 나뒹구는 침대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하니 애면글면 붙잡아온 삶의 끈을 놓치고 그는 그렇게 찰나적으로 무거운 삶을 내려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나는 결과적으로 내 방식만을 고집한 이기적이고 비타협인 삶을 살고 있는 루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바라봄에 진정성을 잃지 않는다면 서툴게라도 조금씩 자신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행히 글쓰기를 통해 내 내면을 조금씩 애무해주고 있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마이너의 삶을 살 것 같다. 강태기, 그 시절에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지금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계간 『시에』 2014년 봄호
이화용
서울 출생. 2008년 『창작수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