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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흔히 인간중심주의, 인학(人學)라고 말한다. 이러한 감옥을
벗어버리고 탈출한 것이 바로 사물 중심의 물학(物學)이다. 물학(物學)의 물(物)은 대상으로서의 물질(정신과 대칭되는)과는 다른 것이다. 물은
이중성을 가진 것이다. ‘물학’을 하다 보니 그동안 칸트 이후에 잠시 버려두었던(정확하게 유보해두었던) ‘그것’(It)을 다시 끄집어내어 논의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 오늘날 인류철학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잘못 되었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Sein)이고, 동시에 당연한(Sollen)의 일이다. 그런데 문제를 그렇게 인간 중심으로 사물을
배열하다보니 삶의 조건으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에 심각한 불균형이랄까, 아무튼 인간의 지혜로도 쉽게 수습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쉽게 말하면 자연을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 셈이다.
그런데 ‘그것’이라는 중성대명사 속에는 아직도
인간중심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 점을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내(인간)가 잘 모르는 ‘대상’을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이라는 용어에는 사물에 대한 통칭의 의미가 있고, 인간주의의 냄새도 나지 않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더욱이
‘물학’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유물론(materialism)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것’이라는 용어에는 사용하기에
따라 사물이 죽어버린 것으로 될 수도 있고, 살아있는 것으로 될 수 있는 경계의 의미가 있다. 왜 자연에 대한 통칭이 그것인가. 물론 “비가
온다.”라고 말할 때 “It rains”이라고 말한다. 삼인칭 단수대명사이다. 그런데 ‘그것’에는 어딘가 개개의 사물을 인정하지 않는, 혹은
놓쳐버리는 느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사물 자체’(Thing itself)를 분리한
느낌이다.
자연은 주체도 아니고, 당연히 대상도 아니다. ‘대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만약 ‘그것’이라면, 필자는 그것보다는 당연하게
원시고대에서부터 인류가 사용한 ‘우리’(We)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서양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삼인칭
복수인칭대명사이다. “We are Korean(우리는 한국인이다).” 그래서 인칭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는 개체에 대한 존중이 있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사물(사건)의 전체, 혹은 개체에 대해 이름을 불이는 것이지만
전체를 통칭하는 버릇은 철학에서는 매우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바로 보편성이라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실은 개체에 대한 무시이다.
실은 개체에 대한 무시야말로 바로 인간주의의 가장 나쁜 병폐이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출발이다. 전체라는 것은 실은
유명(唯名)이고 명분(名分)이고, 가상이고 환상이다. 결국 없는 것이고, 거짓이다.
물론 생각하는 인간이, 더욱이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일(이름 짓기)이고, 표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개개의 사물을 놓쳐버리고, 구체성을
놓쳐버리는 것은 인간 불행의 단초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부분이 전체라는 사물의 유기성(有機性), 생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사회)를
위해서 부분(개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흔히 당연한 일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의 인류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생각하면 바로 그러한 생각이 도리어 전체를 잘못 이끌었다고, 죽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중성(中性)이라는 것,
단수(單數)라는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마치 구원의 손짓이라도 되는 양 생각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에 사물을 한꺼번에 통칭하는
‘대상화’하는 버릇이 남아있다. 사물을 지칭하면서도, 부분을 지칭하면서도 전체를, 전체를 지칭하면서도 부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단어가 바로
‘우리’라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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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말할 때도 이제는 사물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뭉뚱그려서 말하는 철학은 아직도 개념의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철학은
단수의 철학이 아니다. 사물은 절대 단수로 있지 않는다. 단수의 철학은 ‘나’(I am)의 반사이고, ‘나’의 반사로 인해 ‘너’는
복수(are)가 되지만 다시 사물 ‘그것’(It)은 단수(is)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사물의 구체성은 없고, 추상성만 있다. 추상성은
보편성을 있게 하는 원천으로 결국 인간을 구제하는 철학이 되기 어렵다. 추상성의 끝에는 명사(존재자)의 차가움만 있다. ‘존재가 무(無) 되는’
허무(虛無)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때의 존재는 하이데거의 진정한 의미의 존재(存在)도 아니고, 니체의 진정한 의미의 허무(虛無)도
아니다. 물론 하이데거나 데리다, 라캉 등과 같은 천재들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존재에 도달하였지만, ‘그것’에는 추상성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추상성은 무엇보다도 개개의 생명을 무시하는 언어적 습관이 있다. 칸트는 사물을 ‘그것’(Thing) ‘물 자체’(Thing
itself)이라고 함으로써 이성중심 시대, 과학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바로 ‘존재와 존재자의 경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철학은 근대 철학의 ‘그것’에서 출발하여 후기 근대의 ‘그것’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는 새로운 해체철학으로 출발하고 있지만 동시에 추상성의 철학에서 구체성의 철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다. 소리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물(物)이다.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물(物)이다. 소리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기표이다. 그런 점에서 소리는 가장 실재에
가깝다. 소리는 보이지 않는 물(物)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실재이다. 소리는 그러나 존재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쌓아가지 않는 존재이다.
소리는 비존재의 존재이다. 소리는 주체도 없고, 중력도 없다. 소리는 있음과 사라짐 사이에 있으며, 존재 자체가 해체적인 모습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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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가운데서 가장
존재적인(존재자가 아닌) 물질이 소리이다. 소리는 사물과 언어의 경계에 있다. 소리는 사물의 최초의 은유이다. 그래서 소리는
‘소리=물(物)=언어=개념=은유’ 혹은 ‘소리↔물(物)↔언어↔개념↔은유’이다. 그래서 소리는 개념의 철학을 해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소리는 스스로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를 해체하고, 소리는 동시에 스스로 사물이기에 사물에 화합할 수 있다. 소리는 언어와 사물의
경계, 실재와 언어의 경계,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 있다. 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의 등장으로 이제
공(空), 무(無)와 같은 개념은 소리(音)와 기(氣) 등으로 바꾸어질 기회를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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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시(詩)나 음악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음의 구절이 좋을 듯하다.
“음악(또는 시)은 말 속에 사라져버린
‘나’로 돌아가게 해준다. 부연하자면, 상징계 안에서의 비존재적인 삶을 죽음의 공포 없이 실재계의 자리로 환원시키는 것이 음악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죽음 없이 존재로 돌아가는 데에 음악만한 것이 없다는 말인데 여기서 ‘음악’ 대신에 ‘소리’를 넣으면 된다.
다시 말하면 소리는 죽지 않고도 존재에 다가갈 수 있는, 존재 자체가 될 수 있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성적이고 추상적이 아닌)이라는
말이다. 물론 소리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상징에 의존한 비존재의 존재이기 때문에
상징의 견고성과 효력의 강약에 따라서 불안감의 강도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프로이드의 말처럼 좀 더 안정되고 견고한 상태의 ‘나’ 곧
타나토스(죽음의 욕동)를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재계의 ‘나’는 상징계를 부정함으로써 도달하는 죽음의 경지이므로, 현실적으로
주체에게는 이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 공포가 없는 타나토스의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음악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음악이란 상징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체에게 죽음의 공포만 제거한 실재계의 견고한 ‘나’로 돌아간 것 같은 환상을 감각하게 해주는 소리이다. (중략) 따라서 음악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또한 디오니소스의 본질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흔히 서양문명에서는 ‘나’(I)가
곧 ‘주체’(subject)가 되는데, ‘나’와 ‘주체’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 주체는 대상이 전제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를 실재계로
보면, 이때의 ‘나’는 ‘너’와 대비되는 ‘나’가 아니라 도리어 ‘자기(self)’의 뜻이 된다. ‘나’와 ‘주체’의 가역성과 이중성은
주체(나)와 대상(너)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서양문명에서는 용인되기 어렵다. 그러나 주체와 동일성을 부정하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소리는 바로 주체와 대상이 없는 대표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포노로지’ 철학의 소리는 생사를 초월한, 존재 이전의
존재,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감각하게 하는 것으로 소리를 설정하고 있다. 포노로지는 소리의 혼돈과 소리의 질서 사이에 있다.
포노로지 철학이 음악과 다른 점은, 음악처럼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그때그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의미를(산발적으로 있는) 찾아가는
철학이다. 그래서 언제나 자연의 소리, 창조적인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 포노로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기적인 세계와 교감을
하려는 고정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도 함께 포노로지의 파동(波動)과 울림(공명)에 참가하여야 한다.
종이와 문자의
활자매체의 시대가 지니고, 이제 전자와 컴퓨터, 핸드폰과 스마트폰의 전파매체, 멀티미디어 시대가 되었다. 이는 문자보다는 소리가 훨씬 더 편리한
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말해준다. 문자야말로 전파로 전환되어야 쉽게 전달될 수 있다. 문자도 이미지의 일부이다. 이미지를 문자나 텍스트라고
하기보다는 문자나 텍스트를 이미지라고 하는 편이 훨씬 미래지향적이다. 인류의 미래는 의식과 문자의 시대가 아니라 무의식과 소리의 시대이다.
그래서 포노로지 철학이 필요하다. 소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는 브리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미디어와 예술, 철학의 진화와
상관관계를 보면 포노로지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미래에는 파동학(waveology)이 만들어질 것이다. 세계는 결국 원시종합예술의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철학과 예술이 점차 주체와 객체(대상)의 이분법에서 멀어지면서 결국 ‘세계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이를
심물일체(心物一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문학), 그림(미술)을 중심으로 하면 결굴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에 머물게 되고, 소리(음악)로 넘어가게 되면 포노로지(Phonology)의 단계가 된다. 포노로지는 단순히
소리의 문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음파에서 파동의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 파동의 세계는 바로 복합매체(복합매체 예술)의 세계이며,
전기전자전파의 세계가 된다. ‘기’(記)는 ‘기’(氣)이다. ‘기’(記)에서 ‘기’(氣)로 넘어가야 한다. 기호(記號)의 기(記)로서는
부족하다. 에너지의 기(氣)로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포노로지가 있어야 하는 당위이다.
복합매체의 시대는 실은 원시종합예술로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발전이라는 의미의 진화는 없다. 진화는 단지 변화나 차이의 과정, 여정에 불과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을 우주를 향하여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샤먼은 과학에 대칭되는 미신(迷信)을 믿게 하는 사제가 아니라 ‘우주를 향하여
일찍이 자신을 버린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샤먼이야말로 실은 ‘주인과 노예를 연극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포노로지에 의해서 달성되는 ‘소리=귀=수용적(수신자 중심)=우주적 교감=소통-되기’는 샤머니즘을 이해하는 가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문자에서 파동, 그리고 우주적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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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와 대상에서 점차로 간격이 허물어진다.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기호(記號)의 기(記)’에서 ‘에너지의 기(氣)’로 넘어가야 한다. |
‘문자-이성’ 중심의
서양문명은 여전히 문자(letter)을 숭상한다. 포노로지는 이에 비하면 이미지(image)의 철학이다. 포노로지는 언어의 ‘음성(소리)과
문자’의 두 기표 가운데 소리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원죄를 뒤집어 쓴, 알파벳문명권의 소리(phone)를 방면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소리는 한없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포노로지에 의해서 인간(인간의 언어)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소리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소리는 자연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제기한 소리(phone)와 기(氣)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상기해보자.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 =말중심주의(logocentrism)’ *소리(phono)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정기신(精氣神)에서 기(氣)가 빠짐 ‘정신=절대신=이성(理性)’ *기(氣)=소리(phone) |
필자가
제기한 “정기신(精氣神)에서 기(氣)가 빠지는 것과 말소리중심주의에서 소리(phone)가 빠지는 것이 결국 같은 이성 중심주의를 초래하게 된
셈이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할까? 답은 이렇다. 포노로지(phonology)철학의 탄생이 필요하고, 포노로지 철학은 기(氣)철학의
회복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포노로지 철학은 정기신을 회복하는 철학의 원시반본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이제 기(氣)라는 개념에 의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언어적으로,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포노로지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중심주의 철학의 종말이면서 동시에 기(氣)철학의 새로운 탄생이 된다. 이것을 철학의 종말과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鳥, 鸞새)가 우는 소리는 들리는데 새는 보이지 않는다. 바람(風)의 소리는 들리는데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존재는 울린다. 시각중심으로 보면 소리는 없는 것이 되지만 청각 중심으로 보면 소리는 가장 변화무쌍한, 가장 존재다운 존재이다.
소리는 최초의 은유이면서 기(氣)이다. 소리야말로 일반성의 철학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질료 아닌 질료이다. 소리는 일반성의 철학의 근거이면서 탈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