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가로수 보기 좋게 가지런히 심은 홍릉 가는 길 백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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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13. 14:55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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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가로수
보기 좋게 가지런히 심은 홍릉 가는 길 백양나무
요약 동대문 밖에서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홍릉에 이르는 길 양편에 심은 백양나무가 한국 최초의 가로수.
1895년 고종 32년 3월 10일, 정부에서 가로수를 심으라고 훈시 형식으로 전국에 시달했다는 기록.
'도로 좌우에 수목을 식양'하도록 권했으나 당시, 조선의 도로가 좁고 불결해 도로정비가 시급.
훈시 시달된 2년 후, 훈시와는 별개로 혜화동에 사는 홍태윤이 가로수를 심었음.
흔희 청량리 왕비묘 길이라고 불리던 홍릉 입구
가지런히 늘어선 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895년 고종 32년 3월 10일 정부에서 가로수를 심으라고 훈시 형식으로 전국에 시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내무 행정을 맡아보던 내무아문(內務衙門)의 대신 박영효의 명의로 된 이 훈시는 국민 생활 전반에 관한 개혁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총 88조로 된 훈시 중에는 소인(小人)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고, 장애인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며, 명나라와 청나라를 떠받들지 말라는 조항도 있다.
그중 제 49조에 '도로 좌우에 수목을 식양(植養)'하도록 권하라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로수를 심고 가꾸라는 것이다. 당시는 조선도 하루 빨리 도로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때였다. 그래서 가로수를 심으라는 훈시는 그런 사회 여론을 연상하도록 만들기에 족하다.
하지만 도로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과 가로수를 심는 문제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조선의 경우엔 걸맞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가로수는 도로정비의 맨 마지막 단계에 대두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도로란 좁고 불결할 뿐만 아니라 구불구불해서 다니기가 불편했다. 정조 때 김치인이 왕명으로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성안 도로의 폭이 대로의 경우에는 17m, 중로는 5m, 그리고 소로는 3m 정도로 표기되어 있다.
고종 시대의 도로도 이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배수는 잘 되지 않았고, 가축의 분뇨를 마구 버렸다. 김옥균이 <한성순보>에 실은 '치도약론(治道略論)'에는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은 산천이 아름답고 사람들이 포부가 있지만 길거리에 사람과 가축의 오줌이 가득 차 있다고 하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개탄한 글이 있다.
그런 길에 가로수를 심으라니, 이는 뭔가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도로정비는 시급한 문제이긴 했으나 가로수를 심으라는 훈시는 그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이른바 갑오경장의 단계 속에서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처사로 보인다. 실제로 가로수 심기가 어떻게 정착되어갔는지 그 구체적인 면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따라서 이 땅에 가로수가 조성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좀더 설득력 있는 사실은 일제 때, 지금의 서울시에 해당하는 경성부에서 발간한 「경성부사(京城府史)」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즉, 가로수를 심도록 권장하라는 훈시가 시달된 2년 후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길 양편에 가로수가 심어졌는데, 이는 이 땅에 가로수가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이때 심어진 나무는 백양나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로수를 심은 것은 분명 훈시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길은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홍릉으로 통하는 곳이고, 고종이 홍릉으로 갈 때는 당연히 통과했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백양나무 가로수길은 당시 양주 고을이었던 청량리에 홍릉이 들어선 직후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고종의 행차를 의식해서 보기 좋게 길 양쪽으로 나무를 심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자연스럽게 한다.
이 나무는 혜화동에 사는 홍태윤(洪泰潤)이라는 사람이 심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반 없다. 단지 갑신정변 때 고종의 피신을 도운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정변이 가라앉았을 때 그는 그때의 사실이 공으로 인정되어 군수 벼슬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그가 왜, 어떻게 가로수를 조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게 없으나, 이런 사실 역시 고종의 홍릉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홍태윤은 또 퇴직 후 하층민들의 생활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인 인물로 나타나 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혜화동과 왕십리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는 진취적인 성격을 가졌던 인물로 보인다.
그가 심은 가로수는 홍릉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호해주어 잘 자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왕이 행차하는 길인데 그 길에 심어진 나무를 소홀히 다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 일인들이 도로 개수를 할 때 모두 베어버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가로수 - 보기 좋게 가지런히 심은 홍릉 가는 길 백양나무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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