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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행 1:1-5
1 데오빌로 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1-5 / [머리말]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데오빌로 각하께, 첫번째 편지에서 나는 예수의 생애와 그 교훈과 또 2) 예수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여러 가지를 지시하고 하늘로 되돌아가신 일까지를 말씀드렸습니다. 3)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 40일 동안 여러 번 사도들에게 나타나 몸소 자신을 보이며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4) 이렇게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던 어느 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보내실 성령을 기다려라. 내가 말해 온 대로 5) 너희가 전에는 요한에게 물로 침례를 받았지만 이제 곧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누가이며 수신자는 데오빌로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누가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가처럼 또는 취재 기자처럼 내용을 정리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알고 있었고 사도행전을 기록함으로 교회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 수신자는 누가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은 인물로 고위직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은(1-2) 누가가 앞서 쓴 누가복음은 예수의 삶과 가르치심을 시작하심부터 택하신 사도들에게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을 하신 일’을 보여주었고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도 성령을 통하여 ‘계속하여 일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의 승천이 마지막 장면으로 되어 있으나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기사를 보여 줍니다. (눅 24:49-51; 행 1:10, 11)
부활하신 후(3) 예수님은 고난(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신 후 확실한 증거로 친히 살아나심을 나타내사(요 20:30; 고전 15:5-8; 요 20:19; 눅 24:39; 눅 24:41-43) 40일 동안 보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의 중심 주제였습니다(마 4:23; 9:35; 막 1:15; 눅 4:43; 9:2; 요 3:3-21).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명하심(4-5) 사도들이 모여 식사를 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5). 제자들은 이미 물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심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은총으로 거룩케 하시고 능력 있는 증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기초와 기둥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2) 고난의 십자가와 죽으심, 3)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4) 약속하신 성령강림과 성령으로의 세례입니다. 위의 4가지는 교회의 기둥이며 우리 개개인의 신앙의 기둥입니다.
적용: 신앙의 네 기둥이 확실하게 세워진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합시다.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힘 있는 영성을 세워가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를 것입니다. 위엣 것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며 말씀으로 채워나가는 순간 순간이 모여 당신의 믿음이 한 켜 한 켜 굳건해지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여지는 삶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양인순 목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성령에 의해 탄생한 교회는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이루어진 교회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교회행전’이라고도 하고,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지교회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비전을 품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2001년 성지교회에 부임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름 그대로 거룩할 성(聖), 뜻 지(志),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바로 사도행전 2:42-47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성령강림 이후 최초로 이뤄진 교회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유무상통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모든 백성들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해가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지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위해서 바로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구나 기도했습니다.
예배하는 공동체, 교제하는 공동체, 훈련받는 공동체,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그리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약 11년을 뒤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사도행전의 비전을 되새겨야 겠다는 열망이 마음에 생겼습니다.
이제 35주년을 맞이한 성지교회가 더 큰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달려가기 위해서 다시 한번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되새겨야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사도들의 행전은 지금까지 지난 2000년간 계속 써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써내려 갈 것입니다.
앞으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주님의 비전이 다시 한번 새롭게 새겨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열망과 기대가 활화산처럼 타오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기를 고대하셨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의 서론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누가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데오빌로’ 라는 사람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는 아마도 로마의 총독에 버금가는 고위관리입니다.
그 이름은 ‘데오스’(하나님)와 ‘필로스’(사랑, 친구)로 된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친구’ 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누가는 그의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글을 썼습니다.(눅1:4)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누가복음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누가가 도입부에서 다시 한번 누가복음을 통해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택하신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첫 번째 선포는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신음하며 종노릇하던 어둠의 백성들은 복음의 빛 앞에서 회개해야 함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부르면 힘이 납니다. 찬송가 268장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바로 보혈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바로 보혈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내 힘이나 내 능력이나 경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날마다 덧입어야 합니다.
날마다 보혈의 능력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날마다 승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날마다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부활의 능력을 덧입으라.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같이 3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으신 후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를 말씀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헛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요 저주의 제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의 시간으로 채워가는 절기입니다.
그 사순절의 절정은 바로 부활절입니다.
부활은 확실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십니다.
만져보고 믿겠다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부활의 주님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실의와 좌절 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은 영안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외쳤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절에만 기억하는 부활이 아니라 오늘 죽음의 자리, 실패의 자리, 낙망의 자리에 친히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도 부활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영안이 활짝 열립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자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의를 가지고, 자기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던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순교의 현장으로 증인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목숨걸고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주인공이 되려면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이깁니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부활은 사탄의 모든 권세를 물리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날마다 승리하는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누가는 누가복음의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그리고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일까요?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 이란 뜻입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던 곳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서 봉헌한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곳입니다.
장차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처소가 될 새 예루살렘의 모형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영적 스토리가 있는 은혜의 자리요, 구원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바로 그 축복의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이 기다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아버지의 약속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3차원적인 존재이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4차원의 존재이십니다.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교회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동시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셔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되게 하시는 권세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은 자리, 주님이 피 값주고 세우신 이 성지교회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위로부터 임하실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충만함을 사모하며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비결은 철저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순복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님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면 눈물이 납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랑합니다.
성령충만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성령충만하면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다시 찾아가셔서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기다림의 약속이 우리에게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불가능한 꿈 앞에 좌절하고 낙망하며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피터 레이놀즈라는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점(The Do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이지만 어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는 베티가 있습니다.
미술 시간만 되면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얀 도화지를 채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미술시간이 다 끝나가는 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네가 그리고 싶은 데로 해보렴.”
베티는 화가 난 듯 연필을 움켜쥐고 도화지 한 가운데를 확 내리찍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베티에게 말합니다.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어느 날 선생님 방에 갔더니 이게 왠일입니까?
자기 이름이 쓰여진 점이 찍힌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베티는 “저것보다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었는데...”
그 후에 베티는 연필만이 아닐 물감을 가지고 다양한 모양으로 점들을 그렸습니다.
얼마 후에 학교에서 그림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베티가 그린 크고 작은 다양한 점들이 어우러져 있는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베티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습니다.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자기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베티는 후배에 도화지를 주고 뭐든지 그려보라고 합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겨우 삐뚤빼뚤한 선만 가로로 그렸습니다.
그러자 베티가 후배에게 말합니다.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이 있습니다. 은사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계발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꾸짖고 책망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기다려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어햐 합니다.
누군가가 인정해주고,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티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많은 가능성의 씨앗을 뿌려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급하게 행동합니다.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선생님은 바로 성령님의 모습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하늘 소망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지금 평창에서는 스페셜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지적 장애인들이 모여서 매달 경쟁이 아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중복장애 1급인 박모세(21살)씨가 있습니다.
그는 전체 뇌의 10%만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된 그가 이제 80% 정도의 뇌기능을 회복해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병원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뜻으로 아들 모세 군을 낳았습니다.
병원에선 한 달 만에 쫓겨났지만,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만 있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뇌에 호스를 넣어 뇌수를 흐르게 하고, 위험한 뇌수술을 네 차례나 받았습니다.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며 보지도, 말도 못하던 그에게 모세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듯 5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찬송가를 듣고 흉내를 냈습니다. 7살 때부터는 말문이 열리며 어눌하게 말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찬양대에서 나온 찬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밤낮으로 음악을 들려주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모세 군은 기적처럼 노래를 불렀습니다.
11살 때 장애인 농구대회에서 처음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마침내 세계 지적장애인이 함께 모인 평창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의 애국가를 부르게 됐습니다.
생존불가 판정을 딛고 일어난 박모세 군의 ‘기적의 애국가’는 평창을 넘어 전 세계에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티와 같은 존재, 모세 같은 존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나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나를 찾아오셔서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새롭게 도전하라고 격려해주십니다.
바로 우리 곁에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시면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도화지에 점을 찍는 순간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엉터리 같은 그림의 도화지에 “자! 이제 여기에 네 이름을 쓰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우리의 탄식을 새 노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힘차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고대하십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 우리 모일 때 주 이름 높이리
우리 마음 모아 주를 경배할 때 / 주님 축복하시리이~ 주님 축복하시리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한국 정치사와 기독교
사도행전 1:1-3 / 이필재 목사
오늘은 8·15 광복절이면서 주일이 되었습니다. 5천년 한반도 역사 가운데 가장 슬픈 날과 가장 기쁜 날 하나씩 선택해 보라면 가장 슬픈 날은 식민지로 선포되던 그 날이 가장 슬픈 날이요, 기쁜 날은 그것이 해방된 8·15 이렇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그 세상을 인간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만들어놓았으니 관리는 너희들이 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창세기에 천지창조 순서를 보면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뜻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어놓으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관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네가 관리를 잘하면 네가 행복할 것이요 네가 관리를 잘못하면 네가 불행해 진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교회는 ‘청지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관리자’라는 말입니다. 국가 청지기를 맡은 사람이 국가 관리를 잘하면 국가가 행복해 질 것이요, 교회 청지기들이 교회 관리를 잘하면 교회가 행복하여 집니다. 나 자신의 관리 책임자도 나 자신입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행복하여 지고 자기 관리를 잘못하면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모든 창조물과 인간 창조는 차별화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 존재로 창조하셔서 관리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잘 관리하는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선진국이 있고 후진국이 있고 풍성하게 잘 사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빈곤에 허덕이는 민족도 있습니다. 관리자가 누구였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프리카 땅이 앞으로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아프리카’ 하면 굶주린 영양실조의 아이들이 떼로 모여서 먹을 것을 달라는 그림으로 인식되어져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찾아갔을 때 놀란 것은 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가도 가도 뛰어도 뛰어도 끝없이 넓은 평온의 땅이 아프리카입니다. 치타가 뛰는 속도는 시속 90km입니다. 우리들이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만큼 빨리 뜁니다. 먹이를 잡기 위해서 그 치타가 쫓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뛰고 또 뛰어도 끝이 없는 그 넓은 평온의 땅은 대한민국에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수만 마리의 동물들이 떼를 지어서 뛰어도 뛰어도 끝이 없는 평온의 땅이 아프리카인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는 그 좋은 땅에서 빈곤의 대명사 같은 취급을 지금까지 받아왔습니까? 관리가 문제입니다. 누가 관리자였으며, 누가 다스리고 누가 정복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50년 전만 해도 아라비아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땅이라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부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두바이 모래벌판이 지금은 세계의 꿈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칠성 호텔이 거기 있습니다. 바다 위에 떠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그 호텔 마당은 밟아 봤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세계 부자들이 모두 예약하는 꿈의 궁전이 되었습니까? 바로 관리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셰이크 무하마드라고 하는 서구 사회에 가서 공부한 지도자 하나가 꿈을 실현시킨 것이 두바이입니다. 요즘 중국이 갑자기 세계 정상의 자리를 넘보도록 발전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대학 교수들과 수없이 만났지만 등소평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의 생각이 방향 제시를 훌륭하게 함으로써 한 나라가 변해버린 겁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제일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일 발전한 나라가 싱가포르입니다. 리콴유 지도자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는 만델라 때문입니다. 누가 방향 제시를 어떻게 했느냐 하는 관리에 따라서 결정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의 불행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너무 늦게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중국도, 일본도 한국보다는 일찍 들어왔습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5백년만 되었다 해도 일찌감치 한국이 세계무대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이유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앞서가는 문명이 서구 문명인데 서구 문명이 기독교 문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그렇게 훌륭한 발전이 이루어졌는가? 창세기에서 이유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일하는 철학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절대 게으른 백성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잠언에 보십시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워라. 게으름은 곧 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새벽 기도를 합니다. 새벽 4시면 모두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건강,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촉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는 모두다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일의 신성을 강조하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직업관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다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으면서 일을 합니다. 이것이 칼뱅 신학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업이요 장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성직이라고 직업관을 정리합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주셨다고 기뻐하면서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천직 개념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얻은 열매를 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피땀 흘려 얻은 수입을 놓고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나누어주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잘 나누어주는 교회는 계속 부흥합니다. 나누어주는 손은 하나님이 그 손을 더 풍성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는 자는 부하여 질 것이요 흩어 구제하여도 부하게 되나니” 예수 그리스도는 주다가, 주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몸까지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며칠 전 한국 뉴스에 나왔습니다. “인류의 최고 갑부 40명이 자신들의 재산 50퍼센트를 사회에 나누어 주겠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하는 것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못살게 됩니까? 아닙니다. 더 잘 살게 되잖아요? 패러독스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목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신 헌금의 50퍼센트를 나누어주자. 세계 선교비로 지출하자.” 현재 43퍼센트입니다. 거의 달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살 길을 열어주는데 영생뿐만이 아닌 지상의 행복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기독교 복음에 확산되어지는데 있었던 몇 가지 정치적 사건을 조명해 보는 것이 오늘 같은 날 좋은 일인 줄 압니다.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로 복음의 역사는 핍박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우리 한반도 역사도 똑같이 핍박이 기독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영국의 토마스 목사인데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한국 땅에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죽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때 나이 26살이었고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로 계속해서 한반도에서는 기독교 복음의 역사가 계속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제2한강교 지나가다 보시면 절두산이라고 예배당이 지어있습니다. 거기 끌어다놓고 목을 쳤는데 머리는 강으로 떨어지고 시체는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절두산인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이 계속되다가 기독교에 밝은 아침이 온 사건이 생겼습니다.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입니다. 1880년대 우리 사회는 두 가지 흐름이 생겼습니다. 민씨 정권의 수구당파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개혁파가 생겼습니다. 고종 21년의 개혁파가 이 수구파의 우두머리들을 죽여 없애려고 일으킨 정변이 갑신정변인데 개화파가 졌습니다. 그래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이 정변의 과정에서 수구파의 우두머리인 민영익이 칼을 맞았습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인데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누구도 살려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 장로교에서 서울에 와 있는 알렌 의료선교사가 민영익이 누워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지혈제를 놓고 압박 붕대를 감아놓으니까 민영익은 거뜬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때 알렌에 대한 고마움과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살아난 민영익은 돈 10만 냥을 만들어서 알렌 의사 선교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알렌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기술을 이 나라에 보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알렌은 민영익이 갖다 준 10만 냥의 돈을 가지고 이 나라 최초의 병원 광혜원을 세워서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핍박 받던 기독교는 고종의 선언을 얻어냈는데 “누구든지 이 나라에서 이렇게 봉사적인 훌륭한 종교, 기독교 진리의 보급을 방해하지 말라!” 왕이 명령해 버리니까 그때부터 이 나라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개화당의 인물 윤치호, 서재필 같은 국가적 지도자급 사람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거기서 기독교인이 되어서 그들의 고국 귀환은 이 나라 복음 전파에 활발한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잘 나가는 줄 알았는데 기독교는 또다시 핍박의 시기를 만나게 됩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가끔 교계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는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있습니다. 신사참배입니다. 지난번에 물러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항상 시빗거리로 계속 떠들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일본에서 자기들 문화에 맞는 일을 하겠다는데 왜 한국과 중국이 야단치고 있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일본 총리가 과거 동남아를 피로 물들인 전범들을 영웅으로 숭배한다면 그 침략을 정당화 하는 것이 일본의 양심이냐?” 그래서 난리를 친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 내각은 오늘 신사 참배 안하기로 결정했다고 방송했습니다. 그 신사 참배가 바로 한반도에서는 우상 숭배 개념화 되어서 기독교 십계명과 정면충돌을 하는 바람에 교회에 가장 큰 피해가 된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교계에 큰 존경을 받으시는 원로급 목사님들도 이 문제는 거의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 노무현 정부 때 친일파 작업을 했습니다. 교계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일은 “그러면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한 목사님들은 친일파로 규정할 것인가?” 이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핍박 역사로 나타나서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데 이 문제 해결이 바로 8·15 해방의 문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난히도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3·1 운동 때 민족 지도자 33인 중에 기독교 지도자가 16명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유관순도 왜 그렇게 나섰는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교인들은 이 8·15는 우리 국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누구든지 고백을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8·15 해방은 우리 국민의 자력적 노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시아를 정복한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아야 된다는 정치 철학으로 미국과 전쟁을 선택합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진주만 공격 때만 해도 일본이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하고 미국이 승리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지는 바람에 한반도는 어부지리로 8·15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치명적 상처를 입은 한국 교회는 1945년 8월 15일부터 이제 회복과 치유의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잘 되는 줄 알았더니 5년 뒤에 1950년에 또다시 공산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산군들이 남한에 들어왔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8일에 서울이 함락 당했는데 9·28 수복이 이루어졌으니까 3개월 정도입니다. 중앙청 태극기 게양대에 우리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 박정모 소위와 최국방 수병이 태극기를 올린 바로 그 시간이 1950년 9월 26일 오전 10시 10분이었으니까 만 90일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90일 동안 대한민국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다 불타거나 공산당 사무실이 되었고 믿음의 형제들은 끝없이 끌려가서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이것은 아십시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하지 못합니다. 왜 공산국가에서 기독교를 다 없애버렸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어쨌다고 그런 걸까요? 오히려 더 애국자인데 왜 없애버린 것일까요? 공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입니다. 또, 기독교 국가에서 왜 공산당은 절대 성공하지 못하는 정당인가? 그것도 공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입니다. 절대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치 불안 역사 속에 기독교의 한 가지 새로운 유익한 일이 생겼습니다. 초대 대통령이 철저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불행한 대통령으로 끝났습니다. 저도 4·19 데모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종신 대통령을 하려고 했던 것은 마땅히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했고 물러나게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지금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승만 대통령은 다 잘못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국제 정치에 있어서 두 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분은 지금 연세대학교 석좌 교수로 계신 유영익 박사이신데 휴스턴 대학에서 대학 교수를 하실 때 저와 텍사스에서 함께 교회 창립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과 오랫동안 같이 지냈으니까 그분에게서 많이 배울 수 있었는데 그분은 하버드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고 이승만 연구 1인자입니다. 지금도 때가 되면 TV, 신문에 그 분야에 대해서 말하려면 그분이 많이 나오잖아요? 교회에 같이 있으면서 그분에게 그런 정치 분야를 많이 배웠고 또 한 분은 대학원 시절에 연세대학교 이기택 국제 정치학 교수한테 1년 동안 제가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한국에서 국제 정치 최고 권위적 교수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국제 정치 이야기를 많이 배운 것이 유익했습니다. 이렇게 정의합니다. 대한민국 탄생 때는 온 세계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습니다. 20세기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쟁을 했습니다. 그 시절에 제일 무서운 말은 사상에 의심을 받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 전쟁 와중에 이승만은 미국에 오래 있으면서 미국을 공부해서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노선을 선택했고 김일성은 소련에 가서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북한입니다. 지도자가 방향 제시를 국민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정 반대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에게 제가 주문하지 아니한 이런 두꺼운 책 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신학 대학 로버트 올리버 교수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인데 이 로버트 교수는 18년 동안 이승만 대통령 정치 고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한국이 아닌 사람으로 객관성 있게 한국을 바라봤을 때 책 제목을「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이렇게 결론을 내려서 책을 쓴 것입니다. 외국 사람이 객관성 있게 본 것입니다. “국가 정치 철학의 방향 제시를 잘한 것은 이승만의 공로이다. 그것은 인정해야 된다. 만약 그때 이승만도 사회주의 국가 정치 노선을 선택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북한과 똑같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떤 영향이 주어졌는가? 일종의 전성기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없습니다. 4·19 데모 때 싹 다 없앴습니다. 그런데 하와이에 가면 있습니다. 그가 출석하던 하와이 교회에 가면 한복을 입으신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 자금을 그 교인들이 만들어 드렸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 가서 하루 종일 노동해서 독립 운동 하라고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되셨을 때 그 교인들을 경무대로 다 초청한 바 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아주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 정치 노선의 선택과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담화 가운데 무슨 말까지 했느냐? “경찰서 10개 짓는 거 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대한민국 국가를 위해서 더 유익하다.” 지금 같으면 종교 편향이라고 난리를 쳤을 겁니다. 그때는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핍박 없는 성장을 해 와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우리나라 대통령 명함을 가진 사람 10명인데 5명이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예수님 때부터 기독교는 계속 핍박 종교로 살아왔는데 가장 잔인하고 극심한 핍박을 한 정치 세력이 로마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집어 엎어버렸잖아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권력자 콘스탄틴이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독교인들과 같이 살아야 된다. 기독교 핍박하지 말라. 오히려 장려하자.” AD 313년 밀라노의 이 황제의 명령 때문에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는 항상 이 정치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가 저렇게 변한 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베드로도 로마에서 순교 당해 죽었고, 바울도 로마에서 칼에 목이 잘렸는데, 그 고난의 역사 현장에 지금은 베드로 성당이 서있고, 바울 순교 기념 예배당이 서있습니다.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우리 계산으로는 안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미국이 잘 한 일이 있습니다. 일본과 전쟁에 승리했는데도 일본을 식민지화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재건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중의 한 예가 무엇입니까? 전범이라고 판단한 일본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두지 않고 다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니면 일본은 갈 길이 없다. 이 사람들을 내보내주어서 이들이 일본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자.” 그래서 그때 최고의 능력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사또 수상입니다. 감옥에 있다가 보따리 들고 나왔잖아요? 그래서 일본 재건에 최고의 공로자가 되어 정치를 잘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일본과 미국은 지금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변했습니다. 국제 정치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성경인데 누가는 비유대인입니다. 바울 사도의 주치의를 하면서 복음 전파에 헌신한 사역자인데 오늘 1절에 사도행전을 쓰면서 “데오빌로여!” 이런 말로 사도행전이 시작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데오빌로는 당대 최고의 정치 권력자입니다. “이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를 그에게 써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그가 예수를 믿게 된다면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게 클 수 있도다.” 여기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을 써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그 이후에 성령의 역사에 의한 사도들의 행적을 다 기록해서 데오빌로 각하에게 주어서 이것을 읽고 절대 기독교를 핍박하지 마시고 당신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되라고 그 목적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그래서 ‘데오빌로 하나가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써서 그에게 보낸 겁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 속에서 국토와 인구 비례 교인, 교회 출석률에서 세계에서 1위 국가이고, 정치는 민주화 국가, 자유 민주주의, 경제 성장은 G20국가, 선교사 파송 2위 국가, 인구 비례 대학 졸업자 캐나다와 함께 세계에서 1위 국가,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8·15 기념 예배 때 ‘아! 이것은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우리 국민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 번영이 계속 된다면 교회가 잘 됩니다. 사도적 눈을 가지고 영적 관찰을 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면 지금의 교회들이 가장 주님의 뜻에 맞게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할 때 하나님은 21세기에, 저는 앞으로 20년 안에 한국이 미국을 앞질러서 선교사 파송 1위 국가가 된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말하라면 밝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느냐?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에 입각해서 건강한 교회이다. 절대로 서구사회 교회 같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신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고 한국 민족의 앞날은 밝다고 평가합니다. 오늘 광복절 65주년을 우리가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나라에게!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이여, 주 안에서 영원하라!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가 이 나라에게 65년 전 광복을 주셔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손길이 이 민족 가운데 있을 것인가 기도하면서 믿음 안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가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 제목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계산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남북통일의 문제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취시켜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1-1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4-5절에 있고 두 번째 말씀은 7-8절에 있습니다. 물론 이 두 말씀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예수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이고, 두 번째 말씀은 첫 번째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여쭈어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요엘을 통하여 이런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2:28-32) 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시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셨으며 그 놀라운 사건을 “여호와의 두려운 날”의 도래와 구원에 연결시키셨습니다. 이 예언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령의 부으심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게 하실 회복의 날의 표징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본문 6절) 하고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은 하셨지만 제자들이 궁금해하던 바로 그 물음 즉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에 대한 답은 주시지 않고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말씀하시기를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본문 7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시기 전에도 이미 제자들에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는 따라서 제자들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제자들이 정말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이 명령인 동시에 약속임을 뜻합니다. 확실히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따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하고 싶든 아니든, 할 수 있든 없든 우리가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앞선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장 나가서 전도하라! 내 증인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 “기다리라! 너희가 곧 성령을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여야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실 일이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야 우리는 그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힘들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힘들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권능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권능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 하셨으니 기다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면 성령께서 오셔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감동시키시며 믿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며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할 말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그 일을 지켜보면 됩니다. 조금 거들면서 지켜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드는가 하면 믿게 하고 싶은 사람, 구원 받게 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는 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마음에 품고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말을 걸 기회가 주어질 때,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때 말을 걸고 그와 친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예장 300만 성도운동 서울노회 전진대회]에서 총회 운동본부장이신 목사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그를 위하여 천 번 기도하고 백 번 그와 통화하거나 문자 보내고 열 번 그와 만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또 기다리다가 그에게 교회에 한 번 나와 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고 싶어질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데 돈이 듭니까? 힘이 듭니까? 되든 안 되는 그때 그건 성령님 책임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거나 실망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거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제부터 최소한 한 사람씩 주님 앞으로 인도할 사람을 마음에 품읍시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품읍시다.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고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 모르게 여러분 마음에 품으시고 기도하며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b여러분 마음속에 미래의 한 새 생명을 잉태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잉태된 그 새 생명을 태신자라 하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가까운 친구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친한 직장동료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매일 만나 수다 떠는 동네 아줌마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찜질방 같이 다니는 아줌마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한 달에 한 번씩 코스코나 이-마트 같이 가곤 하는 이웃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등산 같이 다니고 낚시 같이 다니고 골프 치러 같이 다니고 여행 같이 다니는 친구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그런 사람 가운데서 아무도 마음에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이상한 신자입니다. 게으른 제자입니다. 불충한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끝으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려져 가셨습니다(본문 9절).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멍하니 정신을 잃고 할 말도 잊고 입만 벌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속에 할 일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에 가리셔서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시는데도 한 동안 뚫어져라 하늘을 쳐다보며 움직일 줄 모르던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서 말했다고 본문 10-11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본문 11절) 이 두 천사가 한 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때가 언제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알 바가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보게 될 그 놀라운 광경의 과학적 가능성이겠습니까? 그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주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미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의 승천도 그가 만유의 주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힘 있게 증명해 보이신 사건입니다. 그 주님께 하늘로 올려지신 것처럼 다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자유롭게 올라가시고 또 내려오실 텐데 뭐 그리 놀라워하고 있느냐? 너희 할 일이나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마도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때부터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 오로지 힘쓰도록 주어진 그 일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인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민에게 참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그의 증인이 될 생각은 하지 않고 그가 그렇게 다시 오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만 따지고 있는 것은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얻은 죄의 용서,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이 자유로운 삶과 기쁨과 행복, 영원히 복된 삶의 약속과 확신, 참된 평화와 사랑 가운데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 이 놀라운 변화 등을 증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내는 삶은 은혜를 망각한 삶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외면하는 불순종의 삶입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승천 사실이나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전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일치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과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놀라운 능력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마28:18-20을 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막16:15-20을 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눅24:48-49에서 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예언과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행2:2-4의 증언에 따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합니다. 이어지는 행2:5-11에 보면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각각 자기들이 태어난 지방의 방언 즉 바대와 메대와 엘람과 메소보다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과 로마와 그레데와 아라비아의 각 언어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는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증언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님의 약속과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 바로 그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총회에서는 금년과 내년에 걸쳐서 예장 300만 성도운동을 선포하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단이 단지 양적으로 성장하려는 욕심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더 힘 있게 증언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 진리를 밝혀주며 생명을 잃은 이 세대가 희망과 생명력을 되찾게 하자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어갈 교회이고 이미 죽어있는 교회임을 명심하며 긴 잠에서 떨쳐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
사도행전 1:1-14 / 김경년 목사
어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새해 소원을 물었답니다. 그 때에 대부분의 아이들의 소원은 '엄마 아빠 술 안 먹고, 안 싸우 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많은 이아들이 새해 소원이 너무 부정적입니다. 적어도 어릴 때는 저의 소원은 김유신 장군보다 더 훌륭한 장군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저의 소원은 세종대왕보다 더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에디슨 같은 유명한 발명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록 펠러처럼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등등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세계 속에 빛낸 인물로 강영우 박사를 선정했습니다. 강 박사는 중학교(15세) 학생시절에 날아오는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실명을 한 맹인입니다. 그러나 인류복지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연세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불과 3년 8개월만에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심리학 석사와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재 UN세계 장애인 위원회 부위원장,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 회장, 루스벨트 재단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속에 한국을 빛내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믿음과 열정과 인내를 주십니다. 무엇보다 끈질긴 인내의 기도로 그 꿈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 좋은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금년에 아름다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주일낮에는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었던 성경본문은 사도행전의 첫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누가는 두 가지의 성경을 썼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이 두 가지 성경은 모두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우리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그가 로마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던 귀족 출신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보내진 편지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으며, 어떻게 발전되었고, 교회가 무엇에 의해서 움직였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꿈과 소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 교회를 움직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1. 말씀의 부흥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셨던 말씀입니다. 바로 교회의 기초가 말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강해설교자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계속되는 말씀과 행동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지금도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기초는 말씀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말씀의 중요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역시 그 기초가 말씀이며,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교회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나아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교회다운가 하는 것은 말씀이 얼마나 그 교회 안에서 살아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란 것이 모두 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났을 때 에,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에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때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쳤으며,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서 말씀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배움 없이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는 교회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간에 4일동안 제2회 전교인 성경통독사경회가 있었습니다.
매일 평균 100명 이상의 교인들이 참여하여 뜨거운 열기 가운데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말씀으로 출발한 새해가 더욱 복된 새해가 될 것입니다. 1년 1독 이상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 충만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본문 4-5절 말씀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 첫 번째로 지켜야 할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라는 것이냐?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약합니다. 당장이라도 무엇인가 일을 해야 속이 시원해지려고 합니다.
우리민족은 느긋하게 무슨 일을 못합니다. 식당에라도 가면, 음식 시켜 놓고 당장에 나오지 않으면 호통을 치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날림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황우석교수의 몰락은 우리나라의 빨리 빨리 문화가 가져다 준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기다려야 할 것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신 생각에 소원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의 직 무를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또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기초를 닦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아버지의 대책이 이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아직 행동할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이며,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함께 있었던 형제들이 오백명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1:15절을 보면 120명 정도가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일까요? 왜 이들은 기다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겠습니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끝까지 기다린 120명은 성령을 받고 위대한 역사를 이뤘습니다.
바로 120명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가 점점 부흥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어질 때,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교회다워 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5-6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성령 충만한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면서”
본문 14절 말씀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렇습니다. 마음을 같이해서 기도하면서 부흥을 기다려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기도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1. 바쁘게 만듭니다.
현대인들은 가치도 없고, 의미도 별로 없는 일에 바쁘게 뛰어다닙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십니다. 그때 후회하지 말고 기도의 때가 왔을 때 열심히 기도합시다.
2. 다른 것들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이사야31:1절에 “도움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기 아니하거니와”라고 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안하면 그런 것들을 한순간에 불어버립니다. 기도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자세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교회 홈피를 많이 이용하세요)
제목은 “새벽기도를 하는 남자를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1. 새벽기도를 할 수 있는 남자는 '자기 통제(self-control)'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새벽기도의 남자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 지를 아는 남자' 이기 때문이다.
3.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남자' 이기 때문이다.
4.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분명 말꾼은 아니기 때문이다.
5.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꿈이 있는 남자' 이기 때문이다.
6.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무서운 잠재력' 이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7.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부지런한 남자' 이기 때문이다.
8.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낭만'을 아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을 남긴 폴 J. 마이어는 젊은 시절 직장을 구하기 위해 57개회사 원서냈지만 모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체구가 작고, 약하고,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보험회사 세밀즈맨으로 기반을 다져 결국 교육, 컴퓨터, 금융, 부동산, 인쇄 등 40개가 넘는 회사를 운영하였습니다.
그는 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한시간 동안 기도하는 훈련을 했다.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하루동안 나에게 필요한 지혜와 창의력을 주었고 그 것을 통해 결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는 이유 5가지를 말했습니다.
1)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2)내 능력에 한계를 알기 때문에
3)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4)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5)그분의 뜻을 이룰 필요가 있기 때문에
윌로우 크릭-빌 하이벌스 목사님은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독일 속담에“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위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부흥을 기대합시다. 여러분의 심령에 부흥을 기대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교회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행 1:1-5
1 데오빌로 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1-5 / [머리말]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데오빌로 각하께, 첫번째 편지에서 나는 예수의 생애와 그 교훈과 또 2) 예수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여러 가지를 지시하고 하늘로 되돌아가신 일까지를 말씀드렸습니다. 3)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 40일 동안 여러 번 사도들에게 나타나 몸소 자신을 보이며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4) 이렇게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던 어느 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보내실 성령을 기다려라. 내가 말해 온 대로 5) 너희가 전에는 요한에게 물로 침례를 받았지만 이제 곧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누가이며 수신자는 데오빌로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누가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가처럼 또는 취재 기자처럼 내용을 정리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알고 있었고 사도행전을 기록함으로 교회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 수신자는 누가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은 인물로 고위직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은(1-2) 누가가 앞서 쓴 누가복음은 예수의 삶과 가르치심을 시작하심부터 택하신 사도들에게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을 하신 일’을 보여주었고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도 성령을 통하여 ‘계속하여 일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의 승천이 마지막 장면으로 되어 있으나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기사를 보여 줍니다. (눅 24:49-51; 행 1:10, 11)
부활하신 후(3) 예수님은 고난(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신 후 확실한 증거로 친히 살아나심을 나타내사(요 20:30; 고전 15:5-8; 요 20:19; 눅 24:39; 눅 24:41-43) 40일 동안 보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의 중심 주제였습니다(마 4:23; 9:35; 막 1:15; 눅 4:43; 9:2; 요 3:3-21).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명하심(4-5) 사도들이 모여 식사를 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5). 제자들은 이미 물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심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은총으로 거룩케 하시고 능력 있는 증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기초와 기둥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2) 고난의 십자가와 죽으심, 3)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4) 약속하신 성령강림과 성령으로의 세례입니다. 위의 4가지는 교회의 기둥이며 우리 개개인의 신앙의 기둥입니다.
적용: 신앙의 네 기둥이 확실하게 세워진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합시다.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힘 있는 영성을 세워가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를 것입니다. 위엣 것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며 말씀으로 채워나가는 순간 순간이 모여 당신의 믿음이 한 켜 한 켜 굳건해지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여지는 삶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양인순 목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성령에 의해 탄생한 교회는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이루어진 교회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교회행전’이라고도 하고,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지교회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비전을 품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2001년 성지교회에 부임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름 그대로 거룩할 성(聖), 뜻 지(志),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바로 사도행전 2:42-47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성령강림 이후 최초로 이뤄진 교회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유무상통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모든 백성들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해가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지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위해서 바로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구나 기도했습니다.
예배하는 공동체, 교제하는 공동체, 훈련받는 공동체,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그리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약 11년을 뒤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사도행전의 비전을 되새겨야 겠다는 열망이 마음에 생겼습니다.
이제 35주년을 맞이한 성지교회가 더 큰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달려가기 위해서 다시 한번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되새겨야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사도들의 행전은 지금까지 지난 2000년간 계속 써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써내려 갈 것입니다.
앞으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주님의 비전이 다시 한번 새롭게 새겨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열망과 기대가 활화산처럼 타오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기를 고대하셨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의 서론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누가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데오빌로’ 라는 사람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는 아마도 로마의 총독에 버금가는 고위관리입니다.
그 이름은 ‘데오스’(하나님)와 ‘필로스’(사랑, 친구)로 된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친구’ 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누가는 그의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글을 썼습니다.(눅1:4)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누가복음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누가가 도입부에서 다시 한번 누가복음을 통해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택하신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첫 번째 선포는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신음하며 종노릇하던 어둠의 백성들은 복음의 빛 앞에서 회개해야 함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부르면 힘이 납니다. 찬송가 268장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바로 보혈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바로 보혈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내 힘이나 내 능력이나 경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날마다 덧입어야 합니다.
날마다 보혈의 능력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날마다 승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날마다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부활의 능력을 덧입으라.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같이 3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으신 후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를 말씀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헛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요 저주의 제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의 시간으로 채워가는 절기입니다.
그 사순절의 절정은 바로 부활절입니다.
부활은 확실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십니다.
만져보고 믿겠다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부활의 주님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실의와 좌절 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은 영안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외쳤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절에만 기억하는 부활이 아니라 오늘 죽음의 자리, 실패의 자리, 낙망의 자리에 친히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도 부활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영안이 활짝 열립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자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의를 가지고, 자기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던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순교의 현장으로 증인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목숨걸고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주인공이 되려면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이깁니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부활은 사탄의 모든 권세를 물리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날마다 승리하는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누가는 누가복음의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그리고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일까요?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 이란 뜻입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던 곳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서 봉헌한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곳입니다.
장차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처소가 될 새 예루살렘의 모형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영적 스토리가 있는 은혜의 자리요, 구원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바로 그 축복의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이 기다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아버지의 약속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3차원적인 존재이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4차원의 존재이십니다.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교회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동시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셔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되게 하시는 권세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은 자리, 주님이 피 값주고 세우신 이 성지교회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위로부터 임하실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충만함을 사모하며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비결은 철저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순복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님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면 눈물이 납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랑합니다.
성령충만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성령충만하면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다시 찾아가셔서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기다림의 약속이 우리에게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불가능한 꿈 앞에 좌절하고 낙망하며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피터 레이놀즈라는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점(The Do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이지만 어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는 베티가 있습니다.
미술 시간만 되면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얀 도화지를 채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미술시간이 다 끝나가는 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네가 그리고 싶은 데로 해보렴.”
베티는 화가 난 듯 연필을 움켜쥐고 도화지 한 가운데를 확 내리찍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베티에게 말합니다.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어느 날 선생님 방에 갔더니 이게 왠일입니까?
자기 이름이 쓰여진 점이 찍힌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베티는 “저것보다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었는데...”
그 후에 베티는 연필만이 아닐 물감을 가지고 다양한 모양으로 점들을 그렸습니다.
얼마 후에 학교에서 그림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베티가 그린 크고 작은 다양한 점들이 어우러져 있는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베티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습니다.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자기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베티는 후배에 도화지를 주고 뭐든지 그려보라고 합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겨우 삐뚤빼뚤한 선만 가로로 그렸습니다.
그러자 베티가 후배에게 말합니다.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이 있습니다. 은사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계발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꾸짖고 책망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기다려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어햐 합니다.
누군가가 인정해주고,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티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많은 가능성의 씨앗을 뿌려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급하게 행동합니다.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선생님은 바로 성령님의 모습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하늘 소망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지금 평창에서는 스페셜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지적 장애인들이 모여서 매달 경쟁이 아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중복장애 1급인 박모세(21살)씨가 있습니다.
그는 전체 뇌의 10%만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된 그가 이제 80% 정도의 뇌기능을 회복해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병원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뜻으로 아들 모세 군을 낳았습니다.
병원에선 한 달 만에 쫓겨났지만,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만 있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뇌에 호스를 넣어 뇌수를 흐르게 하고, 위험한 뇌수술을 네 차례나 받았습니다.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며 보지도, 말도 못하던 그에게 모세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듯 5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찬송가를 듣고 흉내를 냈습니다. 7살 때부터는 말문이 열리며 어눌하게 말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찬양대에서 나온 찬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밤낮으로 음악을 들려주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모세 군은 기적처럼 노래를 불렀습니다.
11살 때 장애인 농구대회에서 처음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마침내 세계 지적장애인이 함께 모인 평창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의 애국가를 부르게 됐습니다.
생존불가 판정을 딛고 일어난 박모세 군의 ‘기적의 애국가’는 평창을 넘어 전 세계에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티와 같은 존재, 모세 같은 존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나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나를 찾아오셔서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새롭게 도전하라고 격려해주십니다.
바로 우리 곁에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시면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도화지에 점을 찍는 순간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엉터리 같은 그림의 도화지에 “자! 이제 여기에 네 이름을 쓰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우리의 탄식을 새 노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힘차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고대하십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 우리 모일 때 주 이름 높이리
우리 마음 모아 주를 경배할 때 / 주님 축복하시리이~ 주님 축복하시리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한국 정치사와 기독교
사도행전 1:1-3 / 이필재 목사
오늘은 8·15 광복절이면서 주일이 되었습니다. 5천년 한반도 역사 가운데 가장 슬픈 날과 가장 기쁜 날 하나씩 선택해 보라면 가장 슬픈 날은 식민지로 선포되던 그 날이 가장 슬픈 날이요, 기쁜 날은 그것이 해방된 8·15 이렇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그 세상을 인간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만들어놓았으니 관리는 너희들이 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창세기에 천지창조 순서를 보면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뜻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어놓으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관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네가 관리를 잘하면 네가 행복할 것이요 네가 관리를 잘못하면 네가 불행해 진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교회는 ‘청지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관리자’라는 말입니다. 국가 청지기를 맡은 사람이 국가 관리를 잘하면 국가가 행복해 질 것이요, 교회 청지기들이 교회 관리를 잘하면 교회가 행복하여 집니다. 나 자신의 관리 책임자도 나 자신입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행복하여 지고 자기 관리를 잘못하면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모든 창조물과 인간 창조는 차별화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 존재로 창조하셔서 관리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잘 관리하는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선진국이 있고 후진국이 있고 풍성하게 잘 사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빈곤에 허덕이는 민족도 있습니다. 관리자가 누구였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프리카 땅이 앞으로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아프리카’ 하면 굶주린 영양실조의 아이들이 떼로 모여서 먹을 것을 달라는 그림으로 인식되어져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찾아갔을 때 놀란 것은 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가도 가도 뛰어도 뛰어도 끝없이 넓은 평온의 땅이 아프리카입니다. 치타가 뛰는 속도는 시속 90km입니다. 우리들이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만큼 빨리 뜁니다. 먹이를 잡기 위해서 그 치타가 쫓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뛰고 또 뛰어도 끝이 없는 그 넓은 평온의 땅은 대한민국에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수만 마리의 동물들이 떼를 지어서 뛰어도 뛰어도 끝이 없는 평온의 땅이 아프리카인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는 그 좋은 땅에서 빈곤의 대명사 같은 취급을 지금까지 받아왔습니까? 관리가 문제입니다. 누가 관리자였으며, 누가 다스리고 누가 정복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50년 전만 해도 아라비아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땅이라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부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두바이 모래벌판이 지금은 세계의 꿈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칠성 호텔이 거기 있습니다. 바다 위에 떠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그 호텔 마당은 밟아 봤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세계 부자들이 모두 예약하는 꿈의 궁전이 되었습니까? 바로 관리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셰이크 무하마드라고 하는 서구 사회에 가서 공부한 지도자 하나가 꿈을 실현시킨 것이 두바이입니다. 요즘 중국이 갑자기 세계 정상의 자리를 넘보도록 발전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대학 교수들과 수없이 만났지만 등소평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의 생각이 방향 제시를 훌륭하게 함으로써 한 나라가 변해버린 겁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제일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일 발전한 나라가 싱가포르입니다. 리콴유 지도자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는 만델라 때문입니다. 누가 방향 제시를 어떻게 했느냐 하는 관리에 따라서 결정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의 불행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너무 늦게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중국도, 일본도 한국보다는 일찍 들어왔습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5백년만 되었다 해도 일찌감치 한국이 세계무대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이유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앞서가는 문명이 서구 문명인데 서구 문명이 기독교 문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그렇게 훌륭한 발전이 이루어졌는가? 창세기에서 이유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일하는 철학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절대 게으른 백성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잠언에 보십시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워라. 게으름은 곧 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새벽 기도를 합니다. 새벽 4시면 모두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건강,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촉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는 모두다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일의 신성을 강조하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직업관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다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으면서 일을 합니다. 이것이 칼뱅 신학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업이요 장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성직이라고 직업관을 정리합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주셨다고 기뻐하면서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천직 개념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얻은 열매를 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피땀 흘려 얻은 수입을 놓고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나누어주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잘 나누어주는 교회는 계속 부흥합니다. 나누어주는 손은 하나님이 그 손을 더 풍성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는 자는 부하여 질 것이요 흩어 구제하여도 부하게 되나니” 예수 그리스도는 주다가, 주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몸까지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며칠 전 한국 뉴스에 나왔습니다. “인류의 최고 갑부 40명이 자신들의 재산 50퍼센트를 사회에 나누어 주겠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하는 것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못살게 됩니까? 아닙니다. 더 잘 살게 되잖아요? 패러독스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목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신 헌금의 50퍼센트를 나누어주자. 세계 선교비로 지출하자.” 현재 43퍼센트입니다. 거의 달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살 길을 열어주는데 영생뿐만이 아닌 지상의 행복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기독교 복음에 확산되어지는데 있었던 몇 가지 정치적 사건을 조명해 보는 것이 오늘 같은 날 좋은 일인 줄 압니다.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로 복음의 역사는 핍박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우리 한반도 역사도 똑같이 핍박이 기독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영국의 토마스 목사인데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한국 땅에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죽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때 나이 26살이었고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로 계속해서 한반도에서는 기독교 복음의 역사가 계속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제2한강교 지나가다 보시면 절두산이라고 예배당이 지어있습니다. 거기 끌어다놓고 목을 쳤는데 머리는 강으로 떨어지고 시체는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절두산인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이 계속되다가 기독교에 밝은 아침이 온 사건이 생겼습니다.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입니다. 1880년대 우리 사회는 두 가지 흐름이 생겼습니다. 민씨 정권의 수구당파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개혁파가 생겼습니다. 고종 21년의 개혁파가 이 수구파의 우두머리들을 죽여 없애려고 일으킨 정변이 갑신정변인데 개화파가 졌습니다. 그래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이 정변의 과정에서 수구파의 우두머리인 민영익이 칼을 맞았습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인데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누구도 살려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 장로교에서 서울에 와 있는 알렌 의료선교사가 민영익이 누워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지혈제를 놓고 압박 붕대를 감아놓으니까 민영익은 거뜬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때 알렌에 대한 고마움과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살아난 민영익은 돈 10만 냥을 만들어서 알렌 의사 선교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알렌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기술을 이 나라에 보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알렌은 민영익이 갖다 준 10만 냥의 돈을 가지고 이 나라 최초의 병원 광혜원을 세워서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핍박 받던 기독교는 고종의 선언을 얻어냈는데 “누구든지 이 나라에서 이렇게 봉사적인 훌륭한 종교, 기독교 진리의 보급을 방해하지 말라!” 왕이 명령해 버리니까 그때부터 이 나라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개화당의 인물 윤치호, 서재필 같은 국가적 지도자급 사람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거기서 기독교인이 되어서 그들의 고국 귀환은 이 나라 복음 전파에 활발한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잘 나가는 줄 알았는데 기독교는 또다시 핍박의 시기를 만나게 됩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가끔 교계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는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있습니다. 신사참배입니다. 지난번에 물러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항상 시빗거리로 계속 떠들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일본에서 자기들 문화에 맞는 일을 하겠다는데 왜 한국과 중국이 야단치고 있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일본 총리가 과거 동남아를 피로 물들인 전범들을 영웅으로 숭배한다면 그 침략을 정당화 하는 것이 일본의 양심이냐?” 그래서 난리를 친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 내각은 오늘 신사 참배 안하기로 결정했다고 방송했습니다. 그 신사 참배가 바로 한반도에서는 우상 숭배 개념화 되어서 기독교 십계명과 정면충돌을 하는 바람에 교회에 가장 큰 피해가 된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교계에 큰 존경을 받으시는 원로급 목사님들도 이 문제는 거의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 노무현 정부 때 친일파 작업을 했습니다. 교계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일은 “그러면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한 목사님들은 친일파로 규정할 것인가?” 이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핍박 역사로 나타나서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데 이 문제 해결이 바로 8·15 해방의 문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난히도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3·1 운동 때 민족 지도자 33인 중에 기독교 지도자가 16명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유관순도 왜 그렇게 나섰는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교인들은 이 8·15는 우리 국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누구든지 고백을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8·15 해방은 우리 국민의 자력적 노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시아를 정복한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아야 된다는 정치 철학으로 미국과 전쟁을 선택합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진주만 공격 때만 해도 일본이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하고 미국이 승리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지는 바람에 한반도는 어부지리로 8·15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치명적 상처를 입은 한국 교회는 1945년 8월 15일부터 이제 회복과 치유의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잘 되는 줄 알았더니 5년 뒤에 1950년에 또다시 공산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산군들이 남한에 들어왔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8일에 서울이 함락 당했는데 9·28 수복이 이루어졌으니까 3개월 정도입니다. 중앙청 태극기 게양대에 우리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 박정모 소위와 최국방 수병이 태극기를 올린 바로 그 시간이 1950년 9월 26일 오전 10시 10분이었으니까 만 90일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90일 동안 대한민국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다 불타거나 공산당 사무실이 되었고 믿음의 형제들은 끝없이 끌려가서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이것은 아십시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하지 못합니다. 왜 공산국가에서 기독교를 다 없애버렸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어쨌다고 그런 걸까요? 오히려 더 애국자인데 왜 없애버린 것일까요? 공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입니다. 또, 기독교 국가에서 왜 공산당은 절대 성공하지 못하는 정당인가? 그것도 공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입니다. 절대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치 불안 역사 속에 기독교의 한 가지 새로운 유익한 일이 생겼습니다. 초대 대통령이 철저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불행한 대통령으로 끝났습니다. 저도 4·19 데모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종신 대통령을 하려고 했던 것은 마땅히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했고 물러나게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지금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승만 대통령은 다 잘못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국제 정치에 있어서 두 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분은 지금 연세대학교 석좌 교수로 계신 유영익 박사이신데 휴스턴 대학에서 대학 교수를 하실 때 저와 텍사스에서 함께 교회 창립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과 오랫동안 같이 지냈으니까 그분에게서 많이 배울 수 있었는데 그분은 하버드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고 이승만 연구 1인자입니다. 지금도 때가 되면 TV, 신문에 그 분야에 대해서 말하려면 그분이 많이 나오잖아요? 교회에 같이 있으면서 그분에게 그런 정치 분야를 많이 배웠고 또 한 분은 대학원 시절에 연세대학교 이기택 국제 정치학 교수한테 1년 동안 제가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한국에서 국제 정치 최고 권위적 교수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국제 정치 이야기를 많이 배운 것이 유익했습니다. 이렇게 정의합니다. 대한민국 탄생 때는 온 세계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습니다. 20세기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쟁을 했습니다. 그 시절에 제일 무서운 말은 사상에 의심을 받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 전쟁 와중에 이승만은 미국에 오래 있으면서 미국을 공부해서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노선을 선택했고 김일성은 소련에 가서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북한입니다. 지도자가 방향 제시를 국민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정 반대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에게 제가 주문하지 아니한 이런 두꺼운 책 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신학 대학 로버트 올리버 교수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인데 이 로버트 교수는 18년 동안 이승만 대통령 정치 고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한국이 아닌 사람으로 객관성 있게 한국을 바라봤을 때 책 제목을「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이렇게 결론을 내려서 책을 쓴 것입니다. 외국 사람이 객관성 있게 본 것입니다. “국가 정치 철학의 방향 제시를 잘한 것은 이승만의 공로이다. 그것은 인정해야 된다. 만약 그때 이승만도 사회주의 국가 정치 노선을 선택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북한과 똑같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떤 영향이 주어졌는가? 일종의 전성기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없습니다. 4·19 데모 때 싹 다 없앴습니다. 그런데 하와이에 가면 있습니다. 그가 출석하던 하와이 교회에 가면 한복을 입으신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 자금을 그 교인들이 만들어 드렸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 가서 하루 종일 노동해서 독립 운동 하라고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되셨을 때 그 교인들을 경무대로 다 초청한 바 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아주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 정치 노선의 선택과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담화 가운데 무슨 말까지 했느냐? “경찰서 10개 짓는 거 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대한민국 국가를 위해서 더 유익하다.” 지금 같으면 종교 편향이라고 난리를 쳤을 겁니다. 그때는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핍박 없는 성장을 해 와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우리나라 대통령 명함을 가진 사람 10명인데 5명이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예수님 때부터 기독교는 계속 핍박 종교로 살아왔는데 가장 잔인하고 극심한 핍박을 한 정치 세력이 로마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집어 엎어버렸잖아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권력자 콘스탄틴이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독교인들과 같이 살아야 된다. 기독교 핍박하지 말라. 오히려 장려하자.” AD 313년 밀라노의 이 황제의 명령 때문에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는 항상 이 정치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가 저렇게 변한 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베드로도 로마에서 순교 당해 죽었고, 바울도 로마에서 칼에 목이 잘렸는데, 그 고난의 역사 현장에 지금은 베드로 성당이 서있고, 바울 순교 기념 예배당이 서있습니다.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우리 계산으로는 안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미국이 잘 한 일이 있습니다. 일본과 전쟁에 승리했는데도 일본을 식민지화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재건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중의 한 예가 무엇입니까? 전범이라고 판단한 일본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두지 않고 다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니면 일본은 갈 길이 없다. 이 사람들을 내보내주어서 이들이 일본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자.” 그래서 그때 최고의 능력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사또 수상입니다. 감옥에 있다가 보따리 들고 나왔잖아요? 그래서 일본 재건에 최고의 공로자가 되어 정치를 잘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일본과 미국은 지금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변했습니다. 국제 정치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성경인데 누가는 비유대인입니다. 바울 사도의 주치의를 하면서 복음 전파에 헌신한 사역자인데 오늘 1절에 사도행전을 쓰면서 “데오빌로여!” 이런 말로 사도행전이 시작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데오빌로는 당대 최고의 정치 권력자입니다. “이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를 그에게 써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그가 예수를 믿게 된다면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게 클 수 있도다.” 여기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을 써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그 이후에 성령의 역사에 의한 사도들의 행적을 다 기록해서 데오빌로 각하에게 주어서 이것을 읽고 절대 기독교를 핍박하지 마시고 당신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되라고 그 목적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그래서 ‘데오빌로 하나가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써서 그에게 보낸 겁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 속에서 국토와 인구 비례 교인, 교회 출석률에서 세계에서 1위 국가이고, 정치는 민주화 국가, 자유 민주주의, 경제 성장은 G20국가, 선교사 파송 2위 국가, 인구 비례 대학 졸업자 캐나다와 함께 세계에서 1위 국가,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8·15 기념 예배 때 ‘아! 이것은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우리 국민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 번영이 계속 된다면 교회가 잘 됩니다. 사도적 눈을 가지고 영적 관찰을 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면 지금의 교회들이 가장 주님의 뜻에 맞게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할 때 하나님은 21세기에, 저는 앞으로 20년 안에 한국이 미국을 앞질러서 선교사 파송 1위 국가가 된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말하라면 밝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느냐?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에 입각해서 건강한 교회이다. 절대로 서구사회 교회 같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신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고 한국 민족의 앞날은 밝다고 평가합니다. 오늘 광복절 65주년을 우리가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나라에게!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이여, 주 안에서 영원하라!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가 이 나라에게 65년 전 광복을 주셔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손길이 이 민족 가운데 있을 것인가 기도하면서 믿음 안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가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 제목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계산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남북통일의 문제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취시켜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1-1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4-5절에 있고 두 번째 말씀은 7-8절에 있습니다. 물론 이 두 말씀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예수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이고, 두 번째 말씀은 첫 번째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여쭈어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요엘을 통하여 이런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2:28-32) 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시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셨으며 그 놀라운 사건을 “여호와의 두려운 날”의 도래와 구원에 연결시키셨습니다. 이 예언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령의 부으심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게 하실 회복의 날의 표징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본문 6절) 하고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은 하셨지만 제자들이 궁금해하던 바로 그 물음 즉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에 대한 답은 주시지 않고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말씀하시기를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본문 7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시기 전에도 이미 제자들에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는 따라서 제자들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제자들이 정말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이 명령인 동시에 약속임을 뜻합니다. 확실히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따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하고 싶든 아니든, 할 수 있든 없든 우리가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앞선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장 나가서 전도하라! 내 증인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 “기다리라! 너희가 곧 성령을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여야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실 일이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야 우리는 그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힘들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힘들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권능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권능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 하셨으니 기다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면 성령께서 오셔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감동시키시며 믿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며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할 말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그 일을 지켜보면 됩니다. 조금 거들면서 지켜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드는가 하면 믿게 하고 싶은 사람, 구원 받게 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는 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마음에 품고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말을 걸 기회가 주어질 때,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때 말을 걸고 그와 친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예장 300만 성도운동 서울노회 전진대회]에서 총회 운동본부장이신 목사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그를 위하여 천 번 기도하고 백 번 그와 통화하거나 문자 보내고 열 번 그와 만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또 기다리다가 그에게 교회에 한 번 나와 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고 싶어질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데 돈이 듭니까? 힘이 듭니까? 되든 안 되는 그때 그건 성령님 책임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거나 실망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거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제부터 최소한 한 사람씩 주님 앞으로 인도할 사람을 마음에 품읍시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품읍시다.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고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 모르게 여러분 마음에 품으시고 기도하며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b여러분 마음속에 미래의 한 새 생명을 잉태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잉태된 그 새 생명을 태신자라 하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가까운 친구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친한 직장동료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매일 만나 수다 떠는 동네 아줌마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찜질방 같이 다니는 아줌마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한 달에 한 번씩 코스코나 이-마트 같이 가곤 하는 이웃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등산 같이 다니고 낚시 같이 다니고 골프 치러 같이 다니고 여행 같이 다니는 친구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품읍시다. 그런 사람 가운데서 아무도 마음에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이상한 신자입니다. 게으른 제자입니다. 불충한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끝으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려져 가셨습니다(본문 9절).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멍하니 정신을 잃고 할 말도 잊고 입만 벌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속에 할 일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에 가리셔서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시는데도 한 동안 뚫어져라 하늘을 쳐다보며 움직일 줄 모르던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서 말했다고 본문 10-11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본문 11절) 이 두 천사가 한 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때가 언제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알 바가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보게 될 그 놀라운 광경의 과학적 가능성이겠습니까? 그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주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미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의 승천도 그가 만유의 주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힘 있게 증명해 보이신 사건입니다. 그 주님께 하늘로 올려지신 것처럼 다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자유롭게 올라가시고 또 내려오실 텐데 뭐 그리 놀라워하고 있느냐? 너희 할 일이나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마도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때부터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 오로지 힘쓰도록 주어진 그 일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인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민에게 참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그의 증인이 될 생각은 하지 않고 그가 그렇게 다시 오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만 따지고 있는 것은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얻은 죄의 용서,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이 자유로운 삶과 기쁨과 행복, 영원히 복된 삶의 약속과 확신, 참된 평화와 사랑 가운데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 이 놀라운 변화 등을 증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내는 삶은 은혜를 망각한 삶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외면하는 불순종의 삶입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승천 사실이나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전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일치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과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놀라운 능력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마28:18-20을 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막16:15-20을 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눅24:48-49에서 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예언과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행2:2-4의 증언에 따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합니다. 이어지는 행2:5-11에 보면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각각 자기들이 태어난 지방의 방언 즉 바대와 메대와 엘람과 메소보다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과 로마와 그레데와 아라비아의 각 언어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는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증언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님의 약속과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 바로 그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총회에서는 금년과 내년에 걸쳐서 예장 300만 성도운동을 선포하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단이 단지 양적으로 성장하려는 욕심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더 힘 있게 증언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 진리를 밝혀주며 생명을 잃은 이 세대가 희망과 생명력을 되찾게 하자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어갈 교회이고 이미 죽어있는 교회임을 명심하며 긴 잠에서 떨쳐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
사도행전 1:1-14 / 김경년 목사
어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새해 소원을 물었답니다. 그 때에 대부분의 아이들의 소원은 '엄마 아빠 술 안 먹고, 안 싸우 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많은 이아들이 새해 소원이 너무 부정적입니다. 적어도 어릴 때는 저의 소원은 김유신 장군보다 더 훌륭한 장군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저의 소원은 세종대왕보다 더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에디슨 같은 유명한 발명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록 펠러처럼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등등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세계 속에 빛낸 인물로 강영우 박사를 선정했습니다. 강 박사는 중학교(15세) 학생시절에 날아오는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실명을 한 맹인입니다. 그러나 인류복지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연세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불과 3년 8개월만에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심리학 석사와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재 UN세계 장애인 위원회 부위원장,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 회장, 루스벨트 재단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속에 한국을 빛내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믿음과 열정과 인내를 주십니다. 무엇보다 끈질긴 인내의 기도로 그 꿈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 좋은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금년에 아름다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주일낮에는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었던 성경본문은 사도행전의 첫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누가는 두 가지의 성경을 썼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이 두 가지 성경은 모두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우리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그가 로마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던 귀족 출신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보내진 편지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으며, 어떻게 발전되었고, 교회가 무엇에 의해서 움직였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꿈과 소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 교회를 움직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1. 말씀의 부흥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셨던 말씀입니다. 바로 교회의 기초가 말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강해설교자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계속되는 말씀과 행동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지금도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기초는 말씀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말씀의 중요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역시 그 기초가 말씀이며,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교회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나아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교회다운가 하는 것은 말씀이 얼마나 그 교회 안에서 살아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란 것이 모두 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났을 때 에,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에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때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쳤으며,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서 말씀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배움 없이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는 교회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간에 4일동안 제2회 전교인 성경통독사경회가 있었습니다.
매일 평균 100명 이상의 교인들이 참여하여 뜨거운 열기 가운데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말씀으로 출발한 새해가 더욱 복된 새해가 될 것입니다. 1년 1독 이상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 충만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본문 4-5절 말씀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 첫 번째로 지켜야 할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라는 것이냐?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약합니다. 당장이라도 무엇인가 일을 해야 속이 시원해지려고 합니다.
우리민족은 느긋하게 무슨 일을 못합니다. 식당에라도 가면, 음식 시켜 놓고 당장에 나오지 않으면 호통을 치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날림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황우석교수의 몰락은 우리나라의 빨리 빨리 문화가 가져다 준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기다려야 할 것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신 생각에 소원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의 직 무를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또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기초를 닦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아버지의 대책이 이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아직 행동할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이며,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함께 있었던 형제들이 오백명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1:15절을 보면 120명 정도가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일까요? 왜 이들은 기다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겠습니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끝까지 기다린 120명은 성령을 받고 위대한 역사를 이뤘습니다.
바로 120명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가 점점 부흥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어질 때,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교회다워 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5-6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성령 충만한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면서”
본문 14절 말씀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렇습니다. 마음을 같이해서 기도하면서 부흥을 기다려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기도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1. 바쁘게 만듭니다.
현대인들은 가치도 없고, 의미도 별로 없는 일에 바쁘게 뛰어다닙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십니다. 그때 후회하지 말고 기도의 때가 왔을 때 열심히 기도합시다.
2. 다른 것들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이사야31:1절에 “도움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기 아니하거니와”라고 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안하면 그런 것들을 한순간에 불어버립니다. 기도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자세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교회 홈피를 많이 이용하세요)
제목은 “새벽기도를 하는 남자를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1. 새벽기도를 할 수 있는 남자는 '자기 통제(self-control)'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새벽기도의 남자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 지를 아는 남자' 이기 때문이다.
3.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남자' 이기 때문이다.
4.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분명 말꾼은 아니기 때문이다.
5.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꿈이 있는 남자' 이기 때문이다.
6.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무서운 잠재력' 이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7.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부지런한 남자' 이기 때문이다.
8. 새벽 기도하는 남자는 '낭만'을 아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을 남긴 폴 J. 마이어는 젊은 시절 직장을 구하기 위해 57개회사 원서냈지만 모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체구가 작고, 약하고,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보험회사 세밀즈맨으로 기반을 다져 결국 교육, 컴퓨터, 금융, 부동산, 인쇄 등 40개가 넘는 회사를 운영하였습니다.
그는 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한시간 동안 기도하는 훈련을 했다.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하루동안 나에게 필요한 지혜와 창의력을 주었고 그 것을 통해 결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는 이유 5가지를 말했습니다.
1)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2)내 능력에 한계를 알기 때문에
3)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4)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5)그분의 뜻을 이룰 필요가 있기 때문에
윌로우 크릭-빌 하이벌스 목사님은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독일 속담에“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위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부흥을 기대합시다. 여러분의 심령에 부흥을 기대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교회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