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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레바논 대표팀에게 충격의 2-1패를 당했다. 별 필요도 없는 친선전도, 연습 경기도 아닌, 자그마치 브라질 월드컵 지역 예선이었다. 이 패배로 말미암아 다음 경기에서 패할 경우 자력 진출이 불가능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2004년의 오만전 패배 이후 오랜만에 맞이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FIFA 랭킹 146위의 레바논을 상대로 2-1로 패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1. 패배의 직접적 원인, 강한팀이 이겼고 약한 팀이 졌다.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일단 왜 패배를 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전반 4분이라는 이른 시간의 실점도 이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경기 내내 레바논이 주도를 했다는 것이 가장 크다. 이 경기는 철저하게 레바논의 의도대로, 레바논의 주도 하에, 레바논의 입맛에 맞게 펼쳐졌다. 설령 이 경기를 한국이 이겼다고 하더라도 치욕스럽다는 소리가 나올만큼 철저하게 밀리는 경기를 보여줬다. 후반 중반 이후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바로 몇 달 전에 6-0으로 이긴 팀을 상대로 한 경기라고 하기엔 너무 엉망이었다. 즉,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레바논이 잘했고, 대한민국이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겨도 운이 좋았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경기력이 형편없었고, 레바논은 정당하게 승리를 챙겼다고 해도 될만큼 강했다. 다시 말해, 강팀 레바논이 이겼고, 약팀 대한민국이 진 것이다.
2. 조직력이 무너진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레바논에 비해 약팀이라고 하면 전세계 축구팬들이 다 웃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우선, 이 경기의 양상을 살펴보자. 경기 초반 4-2-3-1 (혹은 4-3-3)로 경기에 임했던 대표팀은 후반전에 4-4-2로 변화를 꽤한다. 그런데 경기를 영상으로 다시 살펴보면 이게 도대체 4-2-3-1인지, 4-4-2읹, 혹은 4-3-3인지 알기가 힘들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축구인이 흔히 말하는 “삼선의 밸런스가 무너졌다”라는 현상이다. 삼선의 밸런스라는 말은 공격-미드필드-수비로 이어지는 라인이 무너져 버렸다는 뜻이다. 수비 자리에 공격수가 있고 미드필드가 조각조각 흩어져 있고 왼쪽이 오른쪽에, 오른쪽이 중앙에 가 있다. 물론 스위칭 플레이를 통해 상대 수비를 혼란시키는 것은 기본적인 전술이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 조직력이 갖추어졌을 때의 일이다. 우리 선수가 어디에 가서 짱박혀 있는지 몰라 패스도 못하고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정작 패스받을 선수들은 다른 위치 가서 짱박혀 있다. 그러니 패스 타이밍은 늦어지고 볼을 끌다 뺏긴다. 수비시에도 뭔가 여기저기 선수들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뻥뻥 뚫린다. 거기에 삼선의 간격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점조직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라인의 밸런스 따위는 옆집 강아지 이름만도 못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런 현상으로 인해 앞서 말했듯이 패스 타이밍이 늦어져 공을 자꾸 뺏기게 됐고, 공격 자체도 무뎌졌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의 개인 돌파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상대에게 너무 쉽게 읽혔다. 수비시에도 공간이 텅텅 비어 있었고, 상대는 4차선 국도에 경운기 몰고 가듯 부담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비도 당황하게 마련이고, 결국 결승 페널티킥이나 다른 위험한 상황도 모두 이렇게 무너진 조직력으로 인해 벌어진 위험한 상황이 원인이 됐다.
3. 왜 조직력이 무너졌나?
그렇다면 왜 조직력이 무너진 것일까? 축구 전문가들이 이미 많이들 분석을 해 주신 부분이다보니 길게 쓰기는 그렇고, 간단하게 정리만 해 보자.
- 너무 이른 실점으로 인한 당황스러움 : 사실 이게 가장 큰 부분이다. 초반의 위기만 잘 넘겼어도 그렇게까지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 교만한 마음으로 만난 강해진 레바논 : 축구에서 얕보았던 상대가 강하다고 느껴지면 당황하게 마련이다. 이미 6:0으로 쉽게 이겼던 상대이다보니 선수 전체적으로 교만해졌을 수 있고, 그 상황에서 만만치 않다고 느꼈을 때 선수들은 몇 배로 힘들어하게 된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은 시야가 좁아지고, 패스 성공율이 떨어진다.
- 난 누구, 여긴 어디? : 중앙 미드필더가 측면 수비수를 보고, 중앙 수비수가 중앙 미드필더가 되고, 공격수가 미드필더가 되고, 측면 미드필더가 공격수가 된다. 경기가 잘 풀리면 스위칭 플레이, 컴팩트 축구에 어울리는 포지션 파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한 번 안풀리기 시작하면 선수들의 움직임은 한없이 어색해진다. 자기가 어디서 뛰고 있는지도 헷갈리게 되고, 거기서 뭘 해야 하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게 된다. 이럴 때에는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플레이를 차분하게 풀어가다보면 제 페이스를 찾아올 수도 있는데, 애초에 파괴된 포지션에서 뛰다보니 이것이 불가능했다.
- 리더의 부재(초딩 1학년이 반장을 해봤자..) : 리더도 없었다. 차두리 선수가 주장을 맡기는 했지만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했고, 다른 선수들 중에도 리더의 역할을 해주는 선수가 없었다.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서서 다독이거나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하는데, 경기에 나선 선수 전원이 헤매고 앉았으니 (앉지는 않고 뛰어다니긴 했지만) 경기가 풀릴 리가 없었고 조직력이 살아날 리도 없었다. 다시 말해, 대표팀판 조광래 유치원이 초래한 대형 사고라고 할 수 있었다.
- 전술적 결함 : 흔히 만화 축구라고 비아냥을 받고 있는 조광래식 스페인 축구의 단점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상대가 의도했던 것인지 몰라도 레바논의 경기장은 경기 직전에 지뢰 찾기라도 했던 것 처럼 엉망이었고 이는 패스 축구에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른 시간의 실점으로 인해 여유롭게 패스나 돌리고 있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레바논 감독의 영리함이 만화축구를 죽였다고 할 수 있다. 조광래 감독의 전술은 윙백의 무한 오버래핑과 포지션 파괴가 핵심이다. 그런데 상대 수비는 측면의 오버래핑을 막기 위해 적극적 공략과 함께 꽉 짜여진 포메이션으로 측면에서 오버래핑 플레이가 살아날 여지 자체를 없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광래 감독은 백년 묵은 자신의 전술을 유지했고, 그것이 결국 패인이 됐다. 사실, 아무리 상대가 약팀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큼 관중이 꽉 들어찬 경기장, 낯선 기후, 엉망인 경기장 잔디와 같은 상황에서 여유로운 패스 축구로 이기려면 20년동안 밥먹고 패스만 해 온 선수들도 힘들게 마련이다. 차라리 약간은 수비적으로 나가면서 상대 후방에 공간을 만들어 빠른 역습으로 가는게 낫다. 왜냐하면 경기장 상태가 나쁠 수록 양 팀 모두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은데, 상대 골문 앞에서 실수를 할 수록 골을 넣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조광래 감독이 초반부터 다소 안정적인 형태로 나가면서 역습을 시도했다면,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라고 하고보니 이거 허정무 감독 전술이네…)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원래 대표팀은 가끔 한번씩 모여서 경기하고 헤어진다. 클럽팀은 내내 함께 경기하고 비시즌에는 합숙도 하지만, 대표팀은 합숙 훈련을 하는 기간이 짧다. 그런데 대표팀의 경기는 중요한 공식 경기와 중요하지 않은 친선전으로 나뉜다. 그래서 대표팀 감독은 친선전에서 실험을 한 후 공식 경기 기간 동안에는 선수 구성을 대체로 유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광래 감독은 이번 중동 원정에서 또다시 다른 선수 구성을 시도했고, 심지어 레바논 전에서는 팬들의 우려를 받던 이근호를 원톱으로, 이제 두 경기째인 이승기를 측면 공격형 미드필더로, 후보였던 공격수 손흥민을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많은 경기를 뛰지 않은 서정진을 반대편 측면에, 수비수 홍정호를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경남 시절에 왼쪽 풀백을 보았다고는 해도, 그 자리를 보지 않은지 1년도 더 된 이용래를 왼쪽 풀백에 기용했다. 아마 선수들이 서로 인사하며 명함 돌리다 경기가 끝났을 것이다.
4. 앞으로 어쩌나?
원래 조광래호의 문제는 이번 경기로 드러난 것들보다 더 큰게 있었다. 바로 윙백(혹은 풀백)의 무한 오버래핑으로 인해 빨리 지쳐버리는 문제, 그로 인해 후반 중반 이후 경기력이 급격히 감소하거나 아시안컵/월드컵 같은 큰 대회에서 뒤로 갈 수록 경기력이 나빠지는 문제가 가장 크게 우려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커녕 문제가 오히려 늘어났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조광래 감독이 마음을 고쳐먹거나 감독이 바뀌지 않는 한 쉽게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어쩌겠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독자들이 화가 날테니 대안을 제시해 보자. 일단 조광래 감독의 경기 흐름을 보는 눈 자체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니 그런 건 부담 지우지 말자. 그것보다는 이제 유치원 놀이좀 그만 하라고 목청을 높이자. 솔직히 말해 이번 대표팀에 선발된 20대 초중반의 선수들보다 나은 기량을 가진 20대 후반-30대 초반 선수들은 부지기수다. 아무리 세대 교체가 필요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 과거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선수들 중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가진 선수를 불러서 신구의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안 풀리는 경기에서 쉽게 무너지게 된다.
또다른 대안은 조광래 감독이 만화 패스 축구를 잠시 접어두고 전술의 다양화를 꾀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전술이 녹아들 수 있도록 선수단의 기본 뼈대를 확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해외파로만 이 뼈대를 확정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가 이번에 망한거다. 따라서 K리그 선수들을 주축으로 뼈대를 만든 후 한두가지 부분씩 바꾸어가며 조심스럽게 테스트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인 조직력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경기력을 개선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내용은 축구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조광래 감독이 설마 이걸 몰라서 졸전을 했겠나?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한거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 조광래 감독이 마음을 고쳐 먹거나, 아니면 계속 이러다가 해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아주 낮은 확률로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그게 더 잘 되는 경우도 있겠다. 물론 이러기를 바란다. 바라기는 하는데, 그래도 별 기대는 안한다.
건투를 빈다.
끗
Barry Lee (트위터 @barry_lee )
원문 : http://barryspost.net/post/2473
첫댓글 건투를 빈다. 끝. 어디서 많이 보던건데...ㅎㅎ
깔끔 쌉싸름 합니다. 정말 알고있겠죠..그 옹고집을 넘어선 이제는 집착처럼 보여지는 짓좀 그만뒀으면..저도 별기대는 안하지만 말이죠..
오랜만에 보는 배리님의 글이로군요.
동감하구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입니다만...
몇가지 의구심이 드는게...
조광래 만화축구, 패싱 축구라는데..... '''' 스페인축구....패싱축구.... 하고 있는 거 맞나요?...
제눈에는 롱킥축구, 패싱축구도 아닌 임기응변 축구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
압박축구도 비효율적으로 해서 체력소모 많이 시키고.... 단기시합(월드컵 , 아시안컵)에 불리할 비효율 축구....
경기 흐름을 보는 눈에 대해서도....저는 너무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마지막으로 상대감독이 유능하다면 조광래 감독의 수가 다 읽힌다는게 ...문제가 더 큰 것 같습니
다. (전술이 다양하지 못하고 딱 하나인듯...--> 안풀리면 선수탓~)
정말 오랜만에 배리님의 글을 보네요... 잘봤습니다....
좋은 분석글 보고 갑니다 조광래감독은 확실히 1안은 있지만 2안이 없는 감독입니다.
예전에 차범근 감독도 수원 감독 말기에 2안이 없어서 고생을 했는데 그게 떠오르더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