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39-1]새삼스러운 ‘成均館’ 이야기(2)
엊그제 성균관대동창회보에 실린 <동문칼럼>을 공개하고 보니, 새삼스레 母校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어느 글에 그 내용을 조금 쓴 적 있지만, 기억을 환기하는 의미도 있다할 터. 조선 500년은 뭐라해도 ‘性理學의 나라’였다. 선비나 유생이 四書三經을 알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정도로 ‘孔子曰 孟子曰’을 입에 달고 산 듯하다. 명색이 大學이라곤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成均館>이 전국 유일의 王立대학이었다. 그럼 私立大는 없었는가? 아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세운 <산천재> 서당 등이 그게 해당될 듯.
벼슬아치를 하려면, 자격을 갖춘 서생이 문과나 무과의 과거시험을 치러 합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게, 조선 팔도에서 모인 난다긴다하는 인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冊文’(임금이 내는 논술시험)을 통과해 壯元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일 것은 물어보나마나. 먼저 小科(초시)에 해당하는 生員과 進士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팔도의 관찰사가 그 道에 지정된 인원만큼 ‘국립(왕립) 장학생’으로 뽑아 서울의 성균관대학에 유학을 보낸다. 전국에서 많을 때에는 200명, 보통은 150여명이 뽑혔다. 이들은 전액 등록금 면제에 숙식도 해결해줬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숙사 ‘養賢齋’가 현존한다). 심지어 용돈을 주고, 한 달에 한번 휴가도 줬으며, 무엇보다 大科(문과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기숙사에 있게 하는 등 졸업 연도제한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어느 선비는 10년을 성균관에서 ‘개긴’ 사례도 있다. 나라가 신분도 보장하는 완전히 특혜받는 존재들, 이른바 그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들이다.
아무튼, 그 성균관이 나라를 잃어 존재의미를 상실했으나, <명륜학원> 등 명칭을 여러 번 바꿔가며 命脈을 간신히 유지하기는 했다. 광복이후 그 성균관이 가장 먼저 종합대학으로 復元돼야 했으나 미군정기 3년 세월에 경성제국대학 등 전문학교를 통합한 <서울대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낀 비극일 것이다. 하여, 유생 1천여명이 모여 결의한 것이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에게 성균관을 대학으로 만들어달라는 제안이었다. 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립 성균관대학의 탄생 비화, 김창숙 선생은 초대 학장이자 초대 총장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의 핵심인 ‘인의예지’와 ‘수기치인’을 교시와 건학이념으로 삼고, <성균관>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하여, 올해로 건학 627년, 성균관대만이 지금도 ‘공자탄신일’을 기념하여 축하하고 있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고질적인 대학서열의 판도를 바꾸어가고 있는 모교 성균관대에서 홍보전문위원으로 11여년간 일을 했다. 당연히 나의 홍보맨 시절이 떠올랐다. 기자를 때려치우고 하루아침에 홍보맨이 돼 ‘갑에서 을로' 바뀐 위상에 처음엔 무척 곤혹스러웠다. 기자들에게 우리 학교를 좋은 방향으로 잘 써달라고 부탁하는 게 일이니 난감할 밖에. 그래도 나는 금세 적응했다. 1398년에 세운(建學) 조선조 유일한 왕립대학교 <成均館>의 맥을 이은 <성균관대학교>를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할까? 고심하다 찾아낸 카피 문구가 “오래된 미래의 대학”이었다. <오래된 미래>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기자들을 설득, 큰 제목으로 '오래된 미래의 대학'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을 때의 喜悅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심지어 총장도 그 문구가 의미하는 바를 잘 몰랐다. ‘오래(old)’는 傳統이고, ‘未來(future)’는 尖端으로 상징되지 않은가. 학교에서도 “전통과 첨단의 (조화)대학”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것은 잘한 일이다.
또하나, 대학을 알리는데 있어 成均館大만이 자랑할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착상, 널리 알려지게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유엔 회원인 주권국가가 200개가 넘는데, 한 나라에서 유통되는 紙幣의 주인공이 모두 특정대학의 인물로만 되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한 것에 주목했다. 보라! 1천원권의 주인공 퇴계 이황은 성균관의 총장(정3품 대사성)을 세 번이나 지냈다. 5천원권의 율곡 이이는 성균관의 학생(1552학번)이었다. 1만원권의 세종대왕은 성균관의 이사장(창립자 할아버지 이성계의 손자)이며, 5만원권의 신사임당은 이율곡 학생의 어머니로서 성균관의 학부형이다. 만약 10만원 지폐의 인물로 백범 김구 선생이 채택됐다면, 백범은 성균관대 초대 후원회장이었다. 지폐 4개를 코팅, 이 내용을 스토리텔링하니 입학시즌에 우리 대학을 홍보하기에 엄청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세계에서 7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며. 삼성그룹이 재단이니 전국 순회 입학설명회때 홍보하기에 얼마나 좋은가.
역사만 길다고 자랑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 역사에 걸맞게 부쩍부쩍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카피문구는 단순명쾌, 심플한 것이 최고이다, 그래야 기억이 오래 갈 것은 불문가지. 弘報는 널리 알리는 것, 즉 PR(Public Relations)이다, 속말로 알(R)릴 건 알리고 피(P)할 건 피하라는 뜻이라 했다. 학교의 좋은 소식들(국제학회지에 논문이 많이 실려 대학의 위상과 국내 대학서열이 높아지는 등)은 언론매체에 통해 널리 알리고, 나쁜 소식들(교수의 제자 성추행, 논문 표절 등)은 가능한한 나오지 않게 힘을 쓰는 일인데, 솔직히 보람된 시간이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홍보를 잘하면 글을 잘 쓰게 되고, 말도 잘 하게 된다”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우편으로 온 동창회보의 졸문 칼럼을, 고향집 툇마루에서 ‘들멍’(들판을 바라보며 멍때리는 일)을 즐기며 다시 읽으면서, 그 시절이 그립다기보다는 그냥 한번 想念에 잠겨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