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루카 7,31-35
어리석음의 자녀와 지혜의 자녀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는 제가 사제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 읽기 시작해 마칠 때쯤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 준 책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갔더니 이 책은 거의 금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랜턴을 비추며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을 가보니 로마에서 바티칸 방송국에서 어떤 사제가 이 책을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금서였지만 지금은 바티칸 방송국에서도 해설해주는 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금서였다는 이유로 많은 분이 책 이름만 듣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좀 지나친 듯 보이나 그런 분들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시려는 것과 같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지혜와 좋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력이 없었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행복의 기준이 ‘돈과 여자와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제가 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열매가 지혜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은 구약의 ‘광야’의 삶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삶이란 ‘돈과 여자와 성공’을 떠나는 삶입니다. ‘파라오’를 떠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 빵과 포도주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신 천상의 ‘양식과 음료’입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는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라오라는 자아를 떠나 삼구를 죽이는 광야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 곧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파라오가 나를 괴롭히는 뱀과 같은 자아임을 깨닫고 그를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이끄는 모든 것은 지혜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 도구를 통해 지혜의 자녀를 탄생시키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귀와 눈을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부분적인 기억력을 상실한 두 대비되는 환자가 나옵니다.
이 환자들은 어느 시간 이후의 기억이 모조리 삭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도 1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짧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이지만 딱 군대 있을 때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러니 쾌활하고 젊었을 때의 삶을 계속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사에 참례합니다.
기억이 20대 초반에 머물러있지만, 자기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 사람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식료품 주인으로 여기며 “어떤 치즈를 드릴까요?”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말을 해 댑니다.
아니면 가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해집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람 안에는 영혼이 없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소멸하였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니 정체성이 명확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의 자녀이고 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카라바지오는 천재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이때마다 추기경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여자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더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머지 인생을 나폴리와 말타섬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후회하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있는 유명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 안의 자아인 골리앗을 이제 죽였다는 뜻으로 추기경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칼에는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는 글을 새겨넣었습니다.
참 행복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아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추기경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죽습니다.
어쨌든 그는 어리석음의 자녀에서 지혜의 자녀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참 지혜는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탈출시켜 광야로 이끌려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십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것들은 지혜의 자녀가 탄생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키우는 것들은 모두 악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음의 자녀가 아니라 지혜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