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속에서 점심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인지 속이 별로다. 나는 어제처럼 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있다. 봄 햇살이 변함없이 나른하게 내리쬐지만 지금은 그걸 감상할 기분이 아니다.
부스럭.
뭐지?
뒤쪽 앉은뱅이 나무 사이에서 작은 물체가 튀어나왔다.
쥐다!
쥐는 쏜살같이 달려서 멀어져갔다.
파앗!
쥐가 튀어나왔던 곳에서 좀더 큰 무언가가 또 튀어나왔다. 고양이였다.
그리고
시간이 정지하듯 모든 것이
느려졌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는 고양이의 눈을 보았다. 칠흑처럼 검은 그 고양이는 도약중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던 것이다. 고양이는...웃고 있었다! 그 온 얼굴을 이용해서 나를 향해 웃었다.
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려 할 때 멈춰버릴 것 같던 시간은 다시 정상적으로 흘렀고,고양이 또한 쥐를 쫓아 달려가 버렸다.
"읏...!"
오한이 든다. 팔을 보니 소름이 잔뜩 돋아있다.
말도 안돼,이런 계절에 소름이라니.
-6교시 쉬는 시간-
"어쨋든 다행이네. 고양이랑 눈 마주치고 나서는 그 이상한 시선이 안 느껴진다고?"
"응. 근데 기분은 더 안 좋아. 그게 날 보고 웃었단 말야"
'어이 없음'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얼굴이 있다면 그건 한지민의 얼굴이겠지.
"어떻게? 어떻게 웃었는데? 헤벌레하고 웃었다면 그건 네 얼굴 때문일거야.그리고 고양이는 암컷이었을걸? 방긋하고 웃었다면 헬로 키티였을지도"
기발한 생각이다만.
"그 검은 고양이는 씨익하고 웃었어,기분 나쁘게"
우읏...생각했더니 또 소름이 돋는다. 여름에 자주 이용해야겠군.
2001년 3월 23일
윤리 시간.
재미없다. 윤리 선생님께는 미안하지만 정말로 재미없다. 솔직히 수학이랑 체육을 빼면 좋아하는 교과는 원래 없다. 다른 과목들은 겨우겨우 따라가는 정도라서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의예지란..."
안 들려,안 들려.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저 쪽앞의 한현민은 정말 열심히도 듣는다. 어떻게 저럴수가 있는걸까...다음 시간은 체육인데.
얼른 다음 시간이나 왔으면 좋겠다. 아...윤리 선생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이건 분명 봄 햇살이라는 놈 때문이야. 고개가...숙여지는게...느껴...
"얼씨구? 저 놈 봐라? 학기 초부터 졸아?"
고등학교때까지 야구선수의 꿈을 가지고 살았던 윤리 선생은 자기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을 싫어했다. 그리고 조는 학생을 상대로 못 다 이룬 꿈을 실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강속구를 날려주마.
윤리 선생은 40대의 몸으로 넓지 않은 교단 위에서 거의 완벽에 투구 자세를 보여주었다.
윤리 선생이 분필을 던지려는 찰나,앞자리의 한현민이 분필의 궤적을 에상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조는 녀석은 김정우다.
나른한 햇살 속에 그의 친구가 졸고 있었다.
휘익---분필이 교실 공기를 가른다.
그러나 분필이 윤리 선생의 손에서 떠나기 전에 정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떳고,분필과 부딪치기 전에 고개를 움직여서 피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정우의 뒤에 앉은 녀석이 분필에 맞았다. 다들 정우를 보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한현민만은 빙그레 웃었다.
-하교길-
"피했지?"
"응"
아...제발. 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지 말아줘.
"응,응. 정우는 총알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그렇지?"
한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빨대를 물고있어서 대답하기가 불편한가보다.
"정우는 좋겠다아---. 칫! 그러고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해. 누구는 수학 전국 1등에 육감도 뛰어나고 얼굴도 잘 생겼는데, 누구는 남자처럼 생겨서 꽃다운 나니에 남자친구 하나 못 만들고...에효!"
지민이는 하늘을 보며 신세한탄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땅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지민이의 머리 움직임에 섬세한 단발머리도 따라서 물결친다.
"수학이 1등이면 뭐해. 전교에서 20등 안에도 못 드는데. 육감이 뛰어나서 부러워? 그래서 어디에 쓰는데? 아까같은 경우가 아니면 쓸 일도 없다구. 얼굴 잘 생겼다는 말은 인정 안 하니까 넘어가고. 그리고 말야,한지민 너. 네가 전교 2등이라는 사실은 왜 빼는거야?
그리고 또 네가 남자처럼 생긴게 아니라 네 쌍둥이 동생이 여자 처럼 생긴거야. 남자 친구 안 생기는건...
음...부담...스러워서겠지.
<남자 친구 안 생기는건>에서부터 말을 마치기 상당히 힘들었는데 한현민의 주먹을 막느라 그런거다. 그렇지만 한 대도 안 맞았다. 한 두번 겪어보냐?
"부담스러워?"
"응"
"어디가 어떻게?"
"말하기 싫어"
여왕님 분위기니까,라고 했다가는 밤길이 무서워진다.
"참,정우야 토요일까지 독후감 제출해야 하잖아"
실기 평가를 한다는 이유로 국어 선생님이 내 주셨지.
"그랬지"
"넌 뭐 보고 쓸거야?"
뭐긴,고전문학 같은거나 읽어야지.
"글쎄,아직 특별히 정한 게 없는데? 현민이 넌?"
"나도 아직..."
현민이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근데 한지민.
얘가 왜 이래? 갑자기 팔을 부여잡고 난리야.
"그럼 우리 저기 책 대여점 가서 찾아보자"
길 건너편의 책 대여점을 가리키는 그녀의 얼굴에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을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우야. 이거 어때?"
나는 지민이가 건네는 책을 받아들었다.
크기가 조금 작네?...윽,할리 퀸이잖아. 표지에는 담쟁이 덩쿨과 장미가 가득 그려져있다.
나는 책의 중간 쯤을 펼쳤다.
...대리석 바닥의 발코니에 이루엘 키스가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이루엘. 미안해요. 그렇게 돌아서 있지 말아요"
그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쟝이 그녀의 뒤로 다가와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이루엘의
어깨에...
우하하...이루엘 키스라니. 도대체 어느 나라 이름이야?
"이걸 보고 느낀 점이 뭔데?"
"여자는 예쁘면 모든게 용서된다랄까나?"
어이구,잘 하셨네.
"과제 제목은 '여자들이여,미용 관리에 충실하자?'"
"역시 현실감이 좀 떨어지지?"
지민이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내 말에 수긍하고는 다른 책을 찼기 시작했다.
나도 얼른 찾아봐야지. 음... 이거 괜찮은데?
"정우야"
어깨를 툭툭 건드리지 않아도 한현민인 줄 안다. 뒤를 돌아보자 어김없이 한현민이 서 있다.
"이거 어때"
오,상당히 두꺼운 책을 골랐네? 근데 뒷표지가 화려하다. 제목이 뭐길래...
나는 한현민이 골라온 책을 받아서 제목을 읽어보았다.
"여 성 동 아"
...이 인간들이----!!!
2001년 3월 25일
아...잠을 잘못 잤는지 어깨가 아프다. 창문을 향해 들어오는 햇살에 침대에서 일어난 내가 처음한 생각이다.
왜 이렇게 어깨가 쑤시지?
나는 어깨를 주무르며 1층으로 내려갔다.
얼레? 누나가 아직도 자나보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누나차지가 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누나는 아직도 자고있다.
"누나"
꿈쩍도 않는다. 목소리 볼륨 좀 높이고.
"누나"
안 일어나네?
"누나.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붙잡고 탈탈 흔드니까 겨우 일어나는군. 잠탱이 같으니라구.
"우음...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왜 깨우는거야아---품!"
말을 하던지 하품을 하던지 하나만 해,하나만.
"오늘은 토요일 이잖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아침식사 차려야지. 누나가 당번이잖아"
"그랬나?"
누나는 끙차하고 일어났다. 긴 머리카락이 부시시 한게 완전 폐인이다. 저게바로 오피스 레이디의 진정한 모습이지. 주방으로 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끄덕거리던 나는 나도 여유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나도 학교가려면 얼른 씻어야지.
"정우야. 왜 이렇게 늦게 나오는거야. 5분이나 늦었잖아"
5분가지고 째째하게 굴기는...
"누나가 아침 식가 준비를 늦게해서 그래"
현민이는 손목시계를 보고 말했다.
"어쨋든 빨리 가자. 늦겠어"
한현민의 말에 지민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뛰어야 하는 거야?"
음,치마 입고 뛰기는 힘들겠지.
"아니,그 정도는 아니고 평소보다 약간 빨리 걸으면 될 거야"
"그럼 빨리 가지? 전교1등,2등 남매가 지각으로 오점을 남기면 안 되잖아?"
우리는 한현민의 말대로 빠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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