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서 제대한 나는 복학 대신 동두천에 있는 기지촌으로 당숙을 찾아가 그가 운영하는 가게의 문지
기로 취직했다. 미군과 양공주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하는 클럽이었다. 어느 날 밤 개울에서 목욕하는
양공주들의 나체를 훔쳐보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미군이 양공주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가는 장면
을 목격했다. 그녀는 돈을 받고 그 미군과 살림을 차렸는데, 빚을 갚기 위해 다른 미군을 상대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이다. 전속계약 위반으로 미군들은 매우 치욕적인 배신으로 간주했다. 다음날 그
양공주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나는 그 양공주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한없는
부끄러움과 구역질을 느꼈다.
장례식은 양공주들의 자치조직葬으로 치러졌다. 소복을 차려입은 양공주들이 울긋불긋한 만장을 든
채 노래를 부르며 꽃상여를 따라갔다. ‘그 여자들은 죽은 여자의 설움에 자신들의 설움을 포갰다.’(이
부분은 소설 원문이 아니라 문학기행에 나선 김훈 특유의 표현방식이다.) 기지촌 주민들은 늘 그러하
듯이 무덤덤하게 행렬을 지켜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돌아오는 양공주들은 모두가 진흙투성이
에 엉망진창으로 취해 있었다. 장례를 보고 온 날 밤 나는 고열로 앓아누웠다. 정신이 들락거리는 가
운데 소복차림의 양공주들이 나를 밟고 지나가는 꿈을 꿨다. 열이 내린 뒤 그 양공주의 무덤을 찾아
가봤지만, 잠들어 누운 양공주의 무게에 쫓겨 서둘러 하산했다.
장마가 시작되자 하천이 범람하여 기지촌이 침수되었다. 미군들은 인명구조용 고무보트를 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물에 갇힌 주민들을 구조하여 미군부대로 옮긴 뒤 정성껏 돌봐주었다. 미군들의
헌신적인 모습은 일찍이 한국의 공무원이나 군경에게서는 볼 수 없던 인간적인 면모였다. 미군부대
로 들어가지 않은 양공주들은 클럽 2층에 모여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까르르 까르르 웃어댔다. 시집
갈 궁리도 하고 장래 남편에 대한 희망사항을 늘어놓기도 하는 그녀들의 표정에는 재난이나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물이 빠지자 양공주들은 숙소로 돌아가 옷가지를 비롯한 각종
살림살이를 볕에 늘어 말렸다. 철로 가에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는 기지촌은 온갖 잡동사니로 허옇게
뒤덮였다. 철로 위로는 철도청의 수동차가 곡괭이를 어깨에 둘러맨 선로 보수반원들을 태우고 빠르
게 지나갔다. 한여름의 태양이 그 모든 것 위에 골고루 열기를 내려뿜고 있었다.
기지촌을 찾아간 김훈은 대뜸 ‘도움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도움은 도움을
주는 쪽에 절대적인 선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는 쪽은 자기 자존의 정당한 몫을 해치기 때문이
다. (중략) 미국은 주었고 우리는 받았다.’고 썼다. 좌파들의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미국
은 주고 우리는 받은 게 아니라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기지촌과 양공주는 한때의 슬
픈 자화상일 수는 있어도 결코 부끄러운 역사는 아니다. 정신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시절을 그
렇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조해일의 장편소설 「아메리카」를 선택한 김훈의 의도와 해석은 반미감정으로 일그러져 있다. 미국
은 세계 지배라는 역학구도 상 필요하여 한국전쟁에 뛰어들었을 뿐 인류정의에 입각해서 대한민국을
구해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김일성을 도운 소련이나 중공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역사
적‧국제적 현실이다. 미국은 1905년에 이미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왜국의 조선 지배를 지 맘대
로 승인한 적이 있으며, 1950년에는 에치슨선언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함으로써 김
일성의 남침야욕을 조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
했던 미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큰 충격을 받고 3일 만에 지원을 결정하여 미군을 파견함으로써
풍전등화 같던 대한민국을 구해주기도 했다. 버릴 때나 구할 때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한 조치였
다. 월남전에 참전한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조해일은 「아메리카」를 통해 기지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렸다. 이념의
색체를 입히지도 않았고 숨기거나 보태지도 않았다. 주인공 ‘나’를 통해 별도의 해석 없이 보고 듣고
느낀 대로 기지촌의 일상을 진술하고 있다. 판단은 독자들의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김훈은 그러한 창
작의도에 反해 ‘한국 현대사의 가장 쓰라린 한 부분’이라며 상처에 대고 소금을 문지른다. 글 잘 쓰는
김훈이 미국 얘기만 나오면 때를 만난 듯 이를 박박 가는 것이다. 김훈은 굳이 ‘역사의 고난’이라고 강
조하지만,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도 현지에서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에게 性을 풀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재난이 닥치면 월남 군경이나 미군보다 앞장서서 현지인들을 도와주었다. 그렇다고 우리
가 지금 생색을 내거나 도덕적으로 심하게 자책하지는 않는다. 그저 역사인 것을…
김훈은 클럽이 있던 동두천 보산동 일대를 답사했다. 기지촌이던 보산동에는 1980년대 중반 현재 각
종 가방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거리의 풍속은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50년대나 1960년대
의 거리와는 많은 편차가 있다. 양공주 가운데는 사귀던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도 있
다.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된 것이다. 양공주들의 자치조직인 민들레회의 통계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회원 수가 2800여 명에 달했다. 그래서 성행한 것이 ‘이주수속 대행업체’였다. 업체에서는 일체의 이
주수속 대행뿐만 아니라 오가는 편지를 번역해주는 일도 했다. 업체 가운데는 매달 60여 건의 국제결
혼을 성사시켜준 곳도 있었다.
김훈이 「아메리카」의 문학기행을 마친 지도 어언 30여년, 동두천에 주둔하던 미군들은 모두 평택
기지로 옮겨갔다. 지금쯤 기지촌은 1980년대 중반과는 또 다른 형태로 변하여 전혀 다른 사람들이 다
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김훈이 그처럼 비극적이라고 강조한 양공주들의 삶이 과연 비극적이기
만 했을까? 미군에 의한 역사의 희생물이기만 했을까? 그 가운데는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부모를
봉양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양공주도 상당수 있었다. 왜국의 여성들도 이차대전 직후
당장 먹을 양식이 없을 때,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 가족들이 있는 데서도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었
다. 시대나 환경과 무관하게 삶이란 그저 다 같은 삶에 불과하다. 그러한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저
마다 끼고 있는 안경의 색깔에 따라 이리도 해석하고 저리도 해석할 뿐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사는곳 동네 파출소의 앞뜰에 가꾼 코스모스 조경이 참으로 아름다워 일부러 그 길로 다니고 있습니다. 순경 한분이 유달리 부지런하여 해마다 그리고 철마다 꽃을 심어 가꾸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사람 지날 정도의 좁은 굽은길 경계말둑 밧줄을 넘어서 까지 무성하게 꽃을 피운 가을의 코스모스가 아름답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갈볼만한데가 많습니다. 신분당선 지하 상가 기둥 광고판에 각지방의 가을축제를 곱게 알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