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3세의 제약회사 중역 윤희중이다. 전무 승진 예정일을 앞두고 며칠 간 재충전을 하기 위해 고
향인 무진으로 내려왔다. 총각이던 나는 4년 전 과부인 지금의 아내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장인은 내
가 다니는 제약회사의 회장이다. 집안과 회사에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지만, 출세를 담보로 한 결혼은
결국 남는 장사였다. 사위가 아니라면 평생 근무하더라도 전무 자리는 언감생심이니까. 무진은 아
침마다 ‘방문을 열면 밤새 진주해온 적군처럼 안개가 모든 걸 포위하고 있다. 안개는 이승에 원한이
있어 찾아온 악귀의 입김 같다.’
무진은 추억이 거의 희석되지 않은 과거에 잠겨 있다. 골방에서 차폐의 시절을 보냈던 나의 청년기는
나른하고 몽롱한 신기루처럼 무진의 골목과 개펄을 떠돌고 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와 해풍
속에 미립자처럼 섞여서 사람들의 폐부로 들어오는 수면제에 취해서, 무진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땅
위에 세울 수가 없다.’ 내가 고향인 문경군 가은면 성저리의 뒷산과 견훤성터와 농암천을 가로막은
천방을 찾아갈 때마다 빠져든 좌절의 느낌이 딱 그러했었다.
무진에서는 나를 존경한다는 모교 국어교사이자 초등학교 후배인 문학청년 박,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무진세무서장으로 재직 중인 중학교 동기 조, 모교 음악교사인 처녀 하인숙 등을 만난다. 조와 박은
둘 다 하인숙을 좋아한다. 나를 존경하는 박과 달리, 속물인 조는 한때 나를 하찮게 여기다가 내가 굴
지의 제약회사 중역이 되자 비로소 동류로 취급해준다. 서울을 동경하는 하인숙은 자신을 서울로 데
려다달라며 나를 유혹한다. 나는 쉽게 유혹을 받아들여 내가 폐병을 앓을 때 요양했던 바닷가 옛집에
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다.
정사가 끝난 뒤, 하인숙은 내가 무진에 머무는 1주일 동안 멋진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나는 서울을 그리던 젊은 시절의 나 자신을 떠올리며 그녀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한다. 다음날,
나는 상경을 독촉하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갈등한다. 나는 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썼다가 찢
어버리고는, 작별인사도 없이 심한 자책 속에 무진을 떠난다.
‘김승옥의 바다는 도시와 불화의 관계 위에 설정된 자폐 공간이다.’
무진(霧津)이라는 독특한 도시에 대한 김훈의 예리한 해석이다. 무진은 김승옥이 나서 자란 순천을
상상 속으로 옮겨놓은 공간이다. 김승옥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사상계』 1964년 10월호에 발
표되자마자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한창 습작 중이던 나도 고등학교 때 이 작품과 함께 그가 쓴 「서
울, 1964년 겨울」「생명연습」 등을 읽고 그 정밀한 구성과 유려한 문체에 압도된 적이 있었다. 김
승옥의 까마득한 작품들은 수많은 문학청년들에게 선망 못지않게 절망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김승옥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인공들은 바다에서 삶의 해답을 찾다가 바다에서 죽는 경우가
많다.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도 세속에 찌든 심성을 정화시키려고 무진을 찾아왔지만, 오래
지 않아 다시 현실의 포로가 되어 서울로 돌아간다. 세속에 찌든 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진에 살
고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윤희중의 모습은 바로 김승옥의 모습이자 1960년대를 함께 지나온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김훈은 문단의 대선배이자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과 함께 작품의 모델인 순천만으로 문학기행
을 떠났다.
‘순천과 순천만에는 「무진기행」을 구성하는 몇몇 중요한 이미지들이 분명히 살아 있었다.’
어정쩡한 모습의 대대포 갯벌과 긴 방죽, 순천시 금곡동 154번지 일대의 옛 모습에 작가 김승옥의 의
식 밑바닥에서 곰삭은 기억들이 합쳐져 「무진기행」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원작자와 함께 작품
기행을 떠난 김훈은 매사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작품 분석은 어느 때보다 정중하고 문장에는 백 번도
넘게 교정한 기미가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김승옥은 작가로 출발하여 교수로 변신했고, 김훈은 기자
로 출발하여 작가로 전향했다.
“나는 소년시절에 이 토담에 내리쬐는 햇빛을 보면 사람들이 지상에 세운 모든 것들이 햇빛에 몽롱하
게 풀리고 증발되어 안개처럼 허공을 흘러 다니는 것 같은 상상에 시달렸네.”
아, 그 선물 같은 벅찬 상상을 왜 시달린 것으로 해석할까? 나는 이 나이에도 어딜 가든 그러한 상상
이 끝 모르게 솟아올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황홀한 마음으로. 김훈은 작가의 고백을 들으
며 ‘무진에서는 시간도 생명의 내부에서 의미 있는 연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기루처럼 허공에
증발하여 사람과 무관하게 흘러 다니는 광경’이라고 술회했다.
김승옥은 서울대 불문과 4학년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아픔
을 잊기 위해 순천으로 내려와 골방에 처박힌 채 「무진기행」을 썼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문단의
샛별로 떠올랐다. 배신한 여자가 후회하고도 남았을 만큼. 그러나 김훈은 그런 사적인 얘기는 일언반
구도 없이 냉정하게 작품과 연관된 도시의 구도와 주인공들의 심리적 변화만 분석한다. 역시 ‘한국의
알베르 까뮈’라고 불릴 만큼 지각 있는 작가다.
김승옥은 일찍 사람이 살아가야 할 도리에 눈을 떴다. ‘칼을 들고 있는 여자가 원한서린 사람을 찌르
려고 할 때, 그러면서도 누군가 이 칼을 빼앗아주기를 바라고 있을 때, 그 칼을 빼앗아주는 심정으로’
하인숙과 정사를 벌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잊지 않는 남정네의 이기주의 - 주인공
윤희중은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는 자위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 작품은 내 일생 중 가장 슬픈 시절에 썼네. 괴어서 썩어가는 시간들과 천천히 바래가는 삶의 모
습,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마침내 도달한 내면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어두움, 그런 것들을 소설로 그
려낸 것이지.”
김승옥은 이런 창작동기를 밝힌 적이 없다. 아마도 김훈에 대한 애정과 신뢰의 표시인 듯.
윤희중은 하인숙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서울로 올라감으로써 배신자라는 낙인을 자초한다. 그것은 김
승옥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인에게 돌려줄 낙인이다. 윤희중의 뒤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김승옥은
「무진기행」을 기고한 뒤 서울대에 복학했다. 곧 이어 『사상계』를 통해 「무진기행」이 세상에
나오자 서울대가 발칵 뒤집혔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은 7년 선배인 전혜린이 김승옥을 명동으로
데려가 거창하게 환영파티를 열어준 일이었다. 전혜린은 합석하는 문인들에게 일일이 ‘장차 한국 문
단을 이끌 내 후배’라며 김승옥을 자랑했다. 김승옥은 우울하게 전혜린을 회상해놓았지만, 전혜린이
자신을 명동으로 데려간 석 달 뒤 스스로 세상을 버린 얘기는 차마 하지 않았다. 「무진기행」에서
도, 김훈과 함께한 답사여행에서도.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작가 김훈의 "흑산" , 정약용의 유배지 흑산, 조선시대를 배경한 천주교 박해와 민초들의 삶을 다룬 소설로 그 오묘 하고 깊은 삶의 민낯을 낱낱히 다룬 작가의 해박 과 깊이 였습니다. 책장 관심밖으로 꽂혀있던 묵을 책을 읽은 기억이 생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