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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 션샤인》이 비장하게 막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대로 sad ending이었다.
고종 황제는 쫓겨났고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에 의해.
뻔한 결말인데도
나처럼 드라마 잘 안 보는 사람조차 전편을 본방사수 했을 정도로 흥미는 만점이었다.
김은숙 특유의 빠른 극 전개와
우리말과 영어와 왜어가 적절하게 섞여 있는 맛깔나는 대사,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곳에서조차 툭툭 튀어나오는 유머 코드 덕분이었다.
고애신 역을 맡은 김태리의 첫 TV 출연은 참으로 값진 수확이었다.
그녀의 연기는 완벽했다.
눈빛, 표정, 대사, 동작 - 모든 게 완벽했다.
그녀의 시선은 김갑수보다, 이병헌보다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오열하는 음정조차 연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천생 배우였다.
명작인 만큼 아쉬움도 컸다.
오천년 역사에서 늘 그러했듯이
상민인 쿠도 하나와 구동매와 유진 초이는 장렬하게 죽고
양반인 고애신과 김희성은 살아남았다.
상민들이 그렇게 목숨 바쳐 지킨 나라에서 주인은 항상 양반들이었다.
김희성 역을 맡은 변요한의 대사 처리도 24회 내내 거슬렸다.
무명시절인 《미생》과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길고 찬란한 김은숙의 대사를 처리하기에는 상굿도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회에서 김은숙은 정치판을 향해 따끔한 일침을 날렸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을 한자리에 모아 기념사진을 찍게 한 것이다.
자신들이 쫓아낸 황제의 옥좌를 둘러싼 채.
지금도 청와대와 내각과 국회에는 을사오적과 정미칠적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 싶으면 언제들이 나라를 팔아먹을 자들이다.
김은숙은 이들이 한껏 으스대며 매국의 증좌를 남기게 함으로써
논문표절, 위장전입, 탈세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뻔뻔한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고 언젠가는 준엄하게 단죄할 것이라고.
See you soon 김은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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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예는 어미가 뒷간 똥 위에 내질렀기 때문에 이름에 똥 자를 넣어야 명대로 산다하여 지은 이름이
다. 분례(糞禮)는 호적에는 한자로 올려야 한다면서 출생신고를 할 때 면서기가 임의로 바꿔 등재한
이름이다. 뜻글자인 한자의 ‘똥 분(糞)’ 자는 오묘하다. ‘쌀 미(米)’ 자와 ‘다를 이(異)’ 자가 합성된 글
자이니, 쌀이 달라지면 똥이 되는 것 아닌가. 5남매의 맏이인 똥예는 무위도식하는 아버지를 대신하
여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겨울이면 가까운 시름이고개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씩 해다 군불을 때는
데, 산에 갈 때마다 먼 친척인 용팔과 함께 간다. 그는 온 동네에 고자로 소문이 나 있어 똥예의 어머
니도 안심하고 딸려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용팔은 똥예를 눕히고 겁간을 한다. 소문과 달리 그는 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똥예
는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당했기 때문에 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아버지는
똥예를 노름꾼인 영철의 재취로 시집보낸다. 영철은 매일 노름을 하러 가고, 독수공방만 하는 똥예는
용팔을 그리워한다. 한편 읍내 극장 샌드위치맨인 콩조지는 미친 여자 옥화를 겁탈하여 아이를 낳자
자식이 없는 용팔의 집에 몰래 들여보낸다.
어느 날 영철은 돈을 엄청나게 따 가지고 와서 똥예에게 맡기며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
지만, 며칠도 못 가서 그 돈을 도로 가져나가 다 잃고 만다. 한술 더 떠 영철은 똥예가 바람을 피웠다
고 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두드려팬다. 똥예는 결국 실성하여 친정으로 와서도 계속 어디론가 달아
날 궁리만 한다. 친정으로 찾아온 용팔은 똥예를 강제로 끌고 가서 가두어놓지만, 똥예는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한다. 똥예가 기어이 저만치 달아나자 용팔은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잘 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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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례기」의 무대는 작가 방영웅이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냈던 충남 예산이다. 예산고등학교를 졸업
한 방영웅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그 돈으로 대학에 진학할 작정이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실의에
빠져 죽기로 결심하자 각중에 정신이 맑아졌고, 그때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그대로 쓴 장편소설 「분
례기」가 계간(季刊) 『창작과 비평』 여름‧가을‧겨울 호에 연재되면서 혜성같이 등단했다. 「분례
기」는 간결한 문장과 빠른 전개, 객관적이고 향토색 짙은 언어 구사, 대담하고 원색적인 性묘사 등
으로 발표와 동시에 문단에 큰 화재가 되었다.
작가의 부친은 똥예의 아비처럼 무위도식하여 부부싸움이 잦았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매우
다정다감하여 집에 있는 몇 권 안 되는 책을 읽어주거나 다양한 옛날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의
그러한 습관은 방영웅의 문학적 감성을 일깨워 일찍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작품의 배경
으로 나오는 시골풍경은 모두가 예산 인근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며, 극장 샌드위치맨 콩조지
와 미친 여자 옥화는 실존인물이었다. 기자가 작가 방영웅과 함께 예산을 찾아갔을 때도 마을 사람들
은 다들 콩조지와 옥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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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예는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이땅에 살던 모든 여인들의 모습 그대로다. 그네들은 가난과 무
지와 폭력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산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극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작가는 조
금의 미화나 과장도 없이 보고 들은 실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분례기」가 처음 나왔을 때 예산
어른들은 고향을 너무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책망하기도 했지만, 문단에서는 오히려 작품의 짙은 향
토색이 타 지역 사람들의 예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높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현재는 예산 주민들도
「분례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방영웅과 함께 예산으로 문학기행을 떠난 박래부 기자는 ‘지난 세월은 우리 사회가 가장 의욕적이고
총력적으로 경제건설을 밀고 나갔던 기간’이라며 김훈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긍정적으로 평
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예산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과 산지가 되고 벼 품종 개량으로 농가소득이
크게 증가한 것은 모두가 박 대통통의 절대적인 공적이 아닐 수 없다. 똥예가 나무를 하러 갔다가 용
팔에게 겁탈을 당한 시름이고개도 구공탄 개발을 비롯하여 다양한 산림녹화 노력 덕분에 지금은 원
시림처럼 숲이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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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작가와 함께 똥예의 집이 있던 호롱골에서 시댁이 있던 새말까지 1㎞ 남짓한 거리를 걸었다.
아름드리 버드나무를 대문삼아 서 있던 똥예의 시댁은 작가의 생가 앞집을 모델로 묘사한 것인데, 지
금은 버드나무가 사라지고 싸리 삽작문은 낡은 양철대문으로 바뀌어 있다. 작품상의 시장‧국밥집‧기
생집 등도 모두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사람들은 새벽마다 밥을 얻으러 다니던 미친 옥
화가 죽은 게 20년은 실히 되었을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마을은 변했고, 「분
례기」를 발표할 때 25세였던 작가도 기자와 함께 문학기행을 떠났을 때는 어느덧 40대 중반을 넘어
서 있었다. 2018년 현재 작가 방영웅은 76세를 맞이했으니,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 나이 그대로 남고
작가만 홀로 늙어간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핍박한 삶을 살아온 우리네 흔적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뚜렷한데 이 짧은시간에 부와 번영을 누리는 나라로 우뚝 자리매김 하였으니 실로 대단한 성과가 아닐수 없습니다. 똥예, 분례기의 생활사가 우리 엄마,누나들의 고달푼 인생사 였지만 잊혀져 가고 있는 시대상 입니다. 고달푼 삶은 자식과 후대를 위한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