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 외 2편
김 인 숙
그들은 이제 인력引力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얼굴 아래를 하얀 천으로 가린 부호가 걸어온다
자꾸 근육이 줄어드는 그들 똑같은
반쪽의 부호가 멀리 반쪽의 부호를 피해서 간다
묻어오거나 묻어가는 것에 손사래 치며
손잡던 습관을 내다 버린 채
공포가 공포를 밀어낸다
불신은 이제, 문장이 되지 않는다
해체된 부호들은 어떻게 사랑하는지
시의 집을 어떻게 건설할지
절규는 은폐의 방 안에서 홀로 잠기고
손이라고 쓴 부호는 손으로 지워진다
답답하면 꽃잎도 시들어 몸을 눕힌다
흩어진 부호가 야위어 가며
불안은 자꾸 자라고 키는 거꾸로 줄어드는데
척력斥力의 플랫폼
메신저로 부호와 부호가 회의를 한다
나뭇가지 같은 몰골로
투명 칸막이 너머에서
부호가 송신하고 부호가 수신한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깜깜하게 어두워지면서
만나자거나 밥 먹자는 부호는 어디에도 없다
섬망이
희미한 불면 안으로 들어서는
로우 앵글, 비대면의 대면이 창백하다
어쩌다가
키 낮은 나무와 몇 포기의 난이 이웃하여 사는 아파트 22층 베란다에 귀뚜리 운다 찌륵찌륵 목소리가 쉬었다 눈에 띄지 않는 어느 구석에서 홀로 운다 쉬엄쉬엄 힘없이 울다 말다 하는 그는 어쩌다가 이 높은 허공까지 올라왔을까 거리를 벌리며 기어오른 고공 탈출은 혈혈단신 푸른 풀밭이 있는 창밖 하늘 높이 철새가 날아간다 줄지어 간격을 유지하며
어쩌다가 나는
두 개의 창문을 가져서
저 슬픔을 들어야 하는가
밀어낸 거리만큼 죽어가며
우는 저 소리를
어쩌다가 나는 눈뜨고 보아야 하는가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는 모두
저 홀로 갇힌 것인가
수차가 있는 풍경
거울이 부서지고 있다, 하늘이 부서지고 뭉게구름이 부서지고 물가의 하얀 카페가 부서지고 마주 앉은 젊은 남자와 여자가 부서진다, 하얗게 반짝이는 거울의 부서진 살, 살아 있어 상처 받고 부서지는 것들이 하늘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부서져서 허공에 흩어지기이다, 하나의 손이 하나의 허공으로 들어선다, 수면이 설레인다, 숨 가쁜 풍경이 문득 반짝인다, 반짝이는 것은 부서지면서도 반짝인다, 가장 낮은 곳의 웃음은 부서지면서도 하얗다, 하얀 수차가 푸른 수면을 쉼 없이 부순다, 세상 끝으로 부서지는 하얀 슬픔, 반짝이며 일어서는 물의 몸, 반짝이며 흩어지는 물의 얼굴, 하나의 손이 하나의 허공에 하나의 무지개를 세운다, 물가의 하얀 카페를 바라보며 손끝으로 흩어진 채 비스듬히 걸린 풍만한 물의 살
코로나 블루
COVID-19가 들이닥쳤다.
중국 우한이 봉쇄되면서 세계는 미증유의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국의 경우, 2020년 1월 20일, 해외유입 중국인 확진자 1명이 발생한 후 한 달여를 누계 30명 이내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2월 13일에 문재인 대통령은 드디어 “코로나 종식이 임박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5일 후인 2월 18일, 대구에서 확진자 1명이 발생함으로서 전국의 확진자는 31명이 되었고 1차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매일매일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났다.
2월 20일에는 최초의 사망자 1명이 발생하였다. 2월 25일에는 전국의 확진자가 977명으로 증가하였고 이틀 후인 2월 27일에는 1,766명이 되었다. 이 중에서 대구·경북의 확진자가 1,477명으로 전국의 83.6%를 차지하였다. 이즈음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 사람들은 “마스크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나라가 과연 나라인가?”라는 자괴감으로 공황 상태가 되었다. 코로나 감염을 회의한 여성 1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태도 생겼다. 2월 25일, 23개국에서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였고 여당 수석대변인이 <대구 봉쇄 발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후 다음날 사퇴하기도 했다.
2월 29일은 전국 단위로 보았을 때, 1차 대유행의 최고 정점을 찍은 날이다. 일일 신규 확진자가 813명 발생함으로써 전국의 확진자는 3,150명이 되었고 대구ㆍ경북의 확진자는 전국의 86.5%인 2,724명이 되었다. 대구ㆍ경북의 확진자 중 1/2 이상이 감염원 불명이었다. 세계 72개국이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다.(이후, 세계 198개국 중에서 3월 5일에는 98개국, 3월 9일에는 106개국, 3월 24일에는 170개국으로 한국인 입국 제한 국가가 늘어났다.)
이후 대구, 경북의 일일 확진자 수는 400명에서 600명씩 매일매일 증가하여, 3월 7일에는 전국의 90.6%를 차지하면서 누적 인원 6,133명이 되었다. 일주일 만에 3,409명이 증가한 것이다. 이날 대구에서는 특정 구역 전체를 격리하는 첫 코호트 아파트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구는 병실이 없어서 하루에 수백 명씩 집에서 대기를 하였고 대기 중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으며 의사도 사망하고 고등학생도 사망했다. 3월 11일에 WHO는 뒤늦게 팬데믹을 선언했다.
첫 사망자가 나온 2월 20일에 대구 시내는 생필품을 확보하러 나온 사람들로 크고 작은 마트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날 이후 시민들은 자율적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TV를 켜놓고 하루종일 뉴스만 보면서 불안에 떨었다. 현관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없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바이러스가 어디에 묻어 있을지를 몰라 어디든 손대는 일이 싫어졌고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고 또 씻어도 자신의 일부인 자신의 손조차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확진자는 이름이 아니라 대구-○○○○번으로 불리며 사람이 아닌 부호가 되었다. 의료진은 방호복을 입어야만 환자를 대할 수 있었다. 대면이 아닌 비대면이 상시화 되고 인력引力이 아니라 척력斥力이 지배하는 도심의 거리는 텅 빈 적막의 공간으로 변모해 갔다. 유령의 도시가 따로 없었다. 집안에 쓰레기가 쌓이고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분리수거장에 내려갈 때는 마스크를 꼭꼭 여미어 쓰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2020년 2월과 3월을 대구는 그렇게 보냈다. 대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었다. <대구 사람>이라면 어느 지역에서도 꺼려하고 거절당했다. 택배가 끊기기도 하고, 다른 도시에서의 숙박도, 병원도 대구 사람은 거부되었다. 인터넷에는 대구에 대한 악플과 독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억울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을 어느 순간 박탈당한 것 같았다. 거부당하고 외면당하고 죄인 취급을 당했던 대구 사람들.
집안에 유폐된 2개월의 생활을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이 주어진 시간은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가 버린 텅 빈 시간이었다. 한 줄의 글도 읽을 수가 없었고 한 줄의 글을 쓸 수도 없었다.
2월 19일, 서울을 다녀온 아들이 25일 아침부터 기침을 조금씩 하고 콧물이 나며 몸살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코로나19는 1주일 후부터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걱정이 되었다. 매일 규칙적 생활을 하도록 하면서 수시로 체온을 재고, 최대한의 휴식을 취하게 하며, 방에서 나올 때는 마스크를 꼭 착용하도록 하였다. 면역력에 좋다는 식품과 영양가가 많은 음식,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주로 먹였다. 마음 졸이며 증세를 살피며 아들의 회복을 밤낮으로 기도했다. 심리적인 안정이 더 우선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최대한 편하게 가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밤잠을 설친지가 2주 쯤, 차츰 아들의 혈색이 돌아오고 감기 증세도 회복하는 듯하였다. 3주쯤 지났을 때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로나였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른다.
이처럼 대구의 2020년 2월과 3월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큰 병원들은 일주일씩 폐쇄되었고, 환자는 찾아갈 병원이 없어서 집에서 스스로 병을 이겨내야만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참으로 나약한 처지의 인간을 처음으로 절실히 경험했다.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후 13일 만인 3월 9일부터 마스크 구매 요일제가 시행되었다. 일주일에 일인당 2매씩 공급되었고 4월 27일부터 3매씩으로 늘어났다. 말이 요일제이지 실상은 배급제였다. 초기에는 약국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사야 했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서 간격을 유지했다.
어느 금요일,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고 산책을 했다. 한적한 팔거천변을 걷고 팔달교를 건너서 금호강변을 걸었다.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산책을 하루 1시간씩 1주일, 2주일 계속하게 되었다. 조금 살 것 같았다. 글을 읽을 수가 있었다. 쓸 수도 있었다. 숨통이 틔었다고 할까.
걸으면서도 마주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멀찍이 피해서 갔고, 한여름에도 KF94 마스크를 고집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가지 않았다. 집밥만 먹으면서 영화도 집에서 보고 쇼핑도 인터넷으로 하게 되었다. 생활도 경제도 모든 것이 변했다. 투명 칸막이로 울타리를 치고 회의를 한다. 무관중 경기를 하고 비대면 화상 회의와 인터넷 강의를 한다. 최근에 어느 포럼의 대담 사회를 맡은 필자도 비대면 TV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연중무휴로 이끌어 가던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의 스터디는 일찍이 4월 12일부터 지금까지 인터넷 카페를 이용하여 비대면 사이버 스터디로 이어 가고 있다. 어쩌다가 사람들은 이제 아파트 22층 베란다에 갇힌 귀뚜리가 되어 가을을 울었다.
어느 날의 산책길에서 수차가 있는 풍경을 만났다. 수차가 돌아가면서 모든 것이 부서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면은 설레고 있었다. 부서지는 것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물가의 하얀 카페가 무지개 끝에 걸려 있었다.
COVID-19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끝날 것이다.
아니, 끝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하얀 카페에 걸쳐지는 무지개를 마침내 우리는 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소망한다. 얼굴 아래를 하얀 천으로 가린 지금의 가면을 벗고, 서로 온전하고 환한 얼굴을 보면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이야기하며, 분꽃처럼 오종종 웃을 수 있는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