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종교.
그리스도교 성립의 배경
서력기원은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예수가 태어난 것은 BC 7년에서 AD 1년 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경건한 유대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유대교도들 사이에 퍼져 있던 신앙에 종말관(終末觀)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BC 8세기 말에 북반부가 아시리아에게 침략당했고, BC 6세기 초에는 남(南)유다 역시 바발로니아에게 멸망당했으며 여러 유대인들이 포로의 몸이 되었다.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된 뒤에도 독립국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 지배시대에 이르렀다. 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왕조에 의한 유대교 박해는 격심했으며, BC 2세기 중엽 독립전쟁에 의해 하스몬왕조가 성립했다. 그러나 다시 BC 63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예수 시대까지 이르렀다. 원래 유대백성은 하느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고유의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오랜 이방의 지배하에서 현실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에 받아들여진 것이 종말관이다. 악한 이 세계가 끝나고 하느님 자신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기다려졌다. 이때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죽은 사람도 부활하여, 의로운 유대교도가 이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하느님 나라가 오고 그 나라의 왕이 메시아이다.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교의 성립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교훈의 중심은 사랑(아가페, agape)이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2가지 사랑의 황금률(黃金律)에 예수의 신관(神觀)·인간관이 요약되어 있다. 당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던 유대교도에게는 최후의 심판에서 의롭다는 심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유대교는 이 자격을 명확하게 율법으로 규정했다. 의로운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심판받는 인간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자여야만 한다. 지도자인 율법학자 바리새파(派) 사람은 전국의 회당에서 예언서와 율법을 가르치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율법을 배우지 않아 암하렛(시골뜨기)이라고 멸시받던 사람과 율법을 운운할 수도 없는 죄인으로 불리던 사람들도 있었다. 나병환자·심신장애자·난치병환자는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문은 닫혀 있었다. 예수의 복음 대상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신관·인간관이 유대교를 초월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죄인도 포용하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사람의 가치에 높낮음이 없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갈(하느님을 사랑할) 때, 사랑의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교지도자에게는 율법을 폐하는 것으로 비쳤으며, 또 이 <죄인>과 접촉한 예수 자신이 <죄인>과 동렬시(同列視)되는 것이었다. 갈릴리지방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활동을 계속했을 때, 율법학자·바리새파·사두개파는 예수를 정치적인 반(反)로마의 메시아운동가로 몰아 로마관헌에게 고발하고, 민중을 선동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영광의 메시아로 기대했던 스승의 죽음을 보고 흩어졌다. 그러나 곧 예수 부활의 신앙이 일어났으며, 예수는 참된 메시아라는 신앙이 전개되었다. 다만 이 메시아란, 민족적인 유대의 구세주가 아니라 인류 생명의 구세주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헤브라이어 <마시아하>는 당시의 세계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기름을 붓다(크리오;Xrio)>의 변화형 <기름이 부어진 자(크리스토스;Xristos)>가 되고, 이것이 《신약성서》 안에서 정착되어 <그리스도>가 되어, 예수를 구세주(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러한 뜻에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원시그리스도교-예수의 제자와 바울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요한·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12사도들은 부활신앙의 뒷받침으로 예수야말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선교활동에 나섰으며, 새로운 신자를 모아가면서 교세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의 압박의 손길은 그들에게도 엄했다. 그들이 잇따라 순교자를 내면서도 추적을 피하며 실시한 전도는 오히려 지역을 넓혀갔으며 북쪽은 사마리아에서 시리아, 남쪽은 아프리카, 서쪽은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스에 정착해서 만년까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우고, 아프리카 전도의 길을 열었으나, 다른 사도들은 순교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고난 중에서도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얼마 뒤 바울을 그들의 진영에 가담시켜, 급속하게 지중해 각지에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결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세계의 종교로 비약시킨 것은 바울의 전도이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헬레니즘적 교양을 몸에 지닌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엄격한 유대교도로서의 교육을 받아 바리새파에 속했다. 그도 처음에는 율법을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고 박해의 선두에 섰었다. 이러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에 눈뜬 것은 율법주의의 딜레마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율법은 의를 가르치고 죄를 가르쳤다. 그러나 죄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힘은 없었고 육신의 죄 속에 있는 한 죽음은 인간의 패배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고뇌에서 그를 구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랑의 신앙이었다. 회심한 뒤 그는 바르나바의 주선으로 베드로 등과 화해한 뒤 안티오크를 거점으로 하여 소아시아, 유럽 남안(南岸)으로 전도의 길에 올랐다. 그의 전도 대상은 이들 지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많은 이방인을 포함했다. 제1차 전도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바울은 예수의 수제자들과도 이방인 전도와 할레문제에 관해 협의하고, 베드로 등 사도의 동의를 얻었다. 그 뒤에는 바울 또한 박해·방해·투옥 등의 고난을 견뎌내면서, 제2차, 제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소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세계종교로 만들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나 유대교의 회당, 개인의 집, 카타콤(지하묘소) 등에서 집회를 가지고, 그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고린도전서(前書, 12:38)>에 의해 AD 60년 이전에 사도·선지자·교사 등의 직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디모데전서(前書)> <디모데후서(後書)>에는 장로·집사·감독 등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바울과 장로 요한의 지도하에 《신약성서》 시대에 예수의 신격화,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한 하느님과의 화해라는 그리스도교신학의 기초가 다져져 갔다.
가톨릭교회의 성립
2세기 이후 교회는 조직을 정비하고, 경전으로서의 《신약성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성서를 《구약성서》로 하여 그리스도의 준비서로서의 성격을 부여하였고, 모두 캐논(Cannon;聖典)으로서 채용했다. 또 140년경 로마교회에서 정한 <로마신조>를 비롯하여 신조가 제정되었다. 이 때부터 중세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성립 때까지의 초대교회를 고(古)가톨릭교회라고 한다. 이 교회에 명확한 개념규정을 부여하고, 교회 확립을 결정적으로 이룩한 것이 카르타고교회의 키프리아누스(190?∼258)이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통일에 관하여》에서, 교회는 지상에 실현된 유일한 구제기관이라는 것, 하나님과 사람을 매개하는 영적인 권위는 주교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또 그리스도도 하나, 진리도 하나인 것처럼 교회도 하나이며, 모든 주교는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의 권위를 이어받은 로마의 주교라고 주장했다. 고(古) 가톨릭교회는 교회제도의 정비와 함께 이단을 배제하면서 정통신학의 확립에 노력했다. 키프리아누스 외에 유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의 교부(敎父)들은 <호교파>라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그노시스파(派)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인정하지 않는 아리우스파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강조했다. 이 신학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세 위격(位格)이 하나의 신격으로서 일체를 이룬다는 <삼위일체설>을 중심으로 하는 교설을 형성시켰다. 교회는 종교회의를 거듭하면서 가톨릭신학과 조직을 굳혔으며 325년의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설을 이단으로 물리치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인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동질의 신격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교회와 로마제국
그리스도교는 그 초기에 급속한 발전을 이룩함에 따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가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네로의 박해(64)는, 네로가 로마의 대화재 책임을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제국의 압박이 종교상의 이유로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3세기 이후이다. 로마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國運)을 황제를 숭배케 함으로써 만회하려 하였으나, 이에 강력히 반발한 그리스도교회를 압박하게 되었다. 레키우스황제(재위 249~251) 때인 250년, 발레리아누스황제(재위 253~260) 때인 258년에, 황제숭배를 국민의례로서 강요받은 그리스도교도들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박해·처형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재위 284~305)는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전멸시키려고 대규모의 박해를 감행하여 여러 순교자를 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의 단결은 더욱 굳어져 제국측에서는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는 편이 상책이라는 방침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승인했고, 322년에는 이것을 공인종교로서 국가에서 보호해 주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392년에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여 모든 이교와 이단을 금했다. 그 뒤 그리스도교는 중세말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사회의 정신적 지도권을 확보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가톨릭교회는 교세의 신장에 따라 전 교회를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안티오크)·예루살렘 등 5교구로 나누었다. 그 중에 뒤의 3개는 7세기에 이슬람제국(帝國) 지배하에 들어갔고 앞의 2개는 동·서로 큰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동·서 교회는 각기 비잔틴제국(帝國)과 게르만민족의 여러 국가와의 사이에 서로 다른 정치관계로 말미암아, 그 사회적 역할도 달라졌으며 양 교회간의 관계도 분리되는 경향에 있었다. 동방교회에서는 비잔틴제국 치하에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에 입각한 그리스정교회가 형성되었고, 러시아 그 밖의 슬라브사회에도 세력을 뻗쳐 동방문화권을 만들었다. 한편 서쪽의 로마교회는 게르만민족의 이동과 함께 중세 서유럽사회에서 독립적인 입장을 확립하여 동방교회와의 협조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451년의 칼케돈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로마가 하위에 선다고 결정하여 대립은 깊어갔다. 또한 9세기 중엽의 교황 니클라오 1세(재위 858∼867)와 동쪽의 대주교인 포티오스(820?∼891?)와의 대립을 거쳐서, 11세기에는 교황 레오 9세와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의 상호파문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분열하여, 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로 갈라졌다. 로마의 신성정치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하여 그 양상이 바뀌었다. 프랑크왕국은 다른 게르만민족이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데 반하여, 이미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재위 481∼511)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들과 제휴하여 중세 서유럽사회에 세력을 폈다. 피핀(재위 751∼758)은 로마교황의 승인 아래 왕위에 올랐으며 답례로서 그가 정복한 롬바르디아의 땅을 교황에게 헌납했다. 이것이 <교황령>의 기원이며, 이러한 경제상의 거점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진리와 권위의 상징으로 되어 있던 교황은 세속적으로도 서유럽사회의 일대세력으로 되어갔다.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재위 769∼814)는 그의 영토를 크게 확대함과 동시에 영토내에 그리스도교를 보급시켰기 때문에 800년의 크리스마스에는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로부터 서(西)로마황제의 관(冠)을 받았다. 그는 교황의 지지 아래 옛 서(西)로마령과 게르만지역을 포함한 서유럽문화권의 통일을 완성했다. 대제가 죽은 뒤 제국(帝國)은 9·10세기 노르만인 등의 제2차민족이동과 함께 급속히 붕괴되었으며, 10세기 동(東)프랑크, 즉 독일에 오토 1세(재위 936∼973)가 일어나 제후를 눌러서 왕권을 굳힘과 동시에, 교황을 도와 이탈이아의 내란을 진압했으며, 962년 교황으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불렀다. 그 동안 로마교회는 9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서유럽 전토에 세속적인 세력을 신장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주교나 수도원장은 영주나 신도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강대한 봉건영주가 되었다. 교황은 오토 1세가 죽은 뒤, 차츰 황제에 압력을 가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85)는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황제 하인리히 4세(재위 1056∼1106)의 반대를 눌러 이를 파문하여 굴복시켰다. 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의 분쟁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교황의 권력은 황제권을 완전히 눌렀고 교황 인노젠시오 3세(재위 1198∼1216) 때에는 교황은 전 서유럽 군주 위에 군림하여 각국 내의 교회 및 교황령의 정치적 자주권을 쟁취했다. 로마교회의 조직은 로마 전통의 법적 정신이라는 토양 위에 정비되었고, 여러 법령이 정해졌다. 그 집대성은 13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41)가 제정한 《법령집(Gregoriana)》을 토대로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4)에 의해 성문화된 《교회법전》이다. 이것을 통해 교황의 여러 권한이 확립되고, 교황·주교·사제 등 성직자의 계층제가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조직이 정리되고 그 권위가 높아짐에 따라 세속화 경향도 증대해갔다. 그 가운데 본래의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생활에 철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수도원은 원래 오리엔트에 기원을 두지만 그것은 은둔적인 것이었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가 6세기 중엽 로마 근교에 건립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사회적 활동과도 결부되었다. 여기에서 수도사는 청빈·정결·순명(順命) 등의 엄격한 계율에 복종함과 동시에 <주에 대한 봉사>를 으뜸으로 하고 학문과 노동을 중시했다. 수도사는 훈련을 끝낸 뒤, 세계 각지로 파견되어 봉사생활을 통해서 전교했다. 그 뒤, 10세기에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에 의해 수도원은 교황 직속이 되었으며 중앙집권적이며 국제적인 수도원이 만들어졌고, 12세기에는 각지에 여러 수도원이 설립되게 되었다. 그 중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프란체스코회(會)와 도미니쿠스가 세운 도미니크회는 모두 걸식단(乞食團)이라 불렸으며, 청빈 속에서 탁발을 통해 전교했다. 가톨릭신학은 이미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기초를 닦았으며 중세의 스콜라학파에 의해 완성되었다.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말로 알려진 안셀무스·보나벤투라·롬바르두스 등이 스콜라신학을 체계화했으나, 이를 완성시킨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에 의해 권위가 뒷받침된 성사(聖事)는 1439년의 종교회의에서 <세례(洗禮)>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백(告白)> <병자(病者)> <신품(神品)> <혼인(婚姻)>의 7가지로 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몸인 가톨릭교회의 성사를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권세를 부리던 로마가톨릭교회도 중세 말에 이르러 쇠퇴기를 맞았다. 교회와 교황의 권력쇠퇴 요인의 하나는 십자군의 실패였다. 십자군은 셀주크터키인이 비잔틴제국을 위협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했기 때문에 성지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1096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재위 1089∼99)의 제창으로 조직되었으며, 1270년까지 약 200년간 7회에 이른다. 한때 원정의 성공으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크게 올라갔으나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 종교심의 쇠퇴와 교황권 실추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중세말 근세국가가 차츰 대두됨에 따라, 프랑스왕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14세기 초에 교황청을 남(南)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것이 아비뇽교황청(아비뇽의 유수)이다. 그 후에도 교회분열(1378∼l418)이 생기고 교황이 병립하여 싸우는 등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14세기말 영국의 J. 위클리프, 15세기초 보헤미아의 J. 후스 등의 종교개혁 시도가 시작되고, 농민봉기와 결합한 롤라즈의 난(亂), 후스파(派)의 전쟁 등이 잇따라 일어나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위협하게 되었다.
종교개혁(宗敎改革)
로마가톨릭교회는 그 획일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서유럽의 귀족사회와 봉건사회에 공통되는 정신적 권위가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근세 시민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주적 성격이 저마다 스스로 신앙을 확립할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시대의 요청이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외적 권위로서의 가톨릭적 그리스도교는 내적인 개인의 신앙문제로서 개별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교회(가톨릭)의 모습을 다양한 형태의 프로테스탄트 각파의 운동으로 전개시킨 까닭이다. 또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왕권이 강하고 국가교회주의가 확립되어 있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시민사회가 발전했는데도 신장되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던 독일·스위스에서 급속하게 발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프로테스탄트의 발단은 가톨릭의 수도사 출신 M. 루터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개수비(改修費)에 충당하기 위하여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2∼2l)가 발행한 면죄부에 반대하여, 1517년에 <95개조(個條)의 논제>를 발표하고 공개적으로 항의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위클리프, 후스 등의 반(反)가톨릭적 운동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또 신학적으로는 M.J. 에크하르트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개인의 내면적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신비주의사상 등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은 가톨릭의 3가지 본질인 전승주의, 성사에 의한 구원, 사제제도(司祭制度)에 대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째로 하나님의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이고, 모든 신도는 직접 이 성서를 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 스스로 성서를 원어(原語)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도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하여 성사에 의한 구원을 부정했다. 셋째로 <모든 신도는 사제이다>라고 주장하여 <만인사제설>을 제창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시기를 거쳐서 다시 사회적으로 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제후의 보호하에 지방군주적 교회 통치제를 설립, 1529년에는 코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했다. J. 칼뱅은 1520년대 프랑스의 종교적 혼미 가운데서 인문주의 사상의 교육을 받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1534년 교황과 로마교회를 비난하는 <플래카드사건>을 계기로 프랑수아 1세가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자 즉시 스위스로 피신했고, 1536년 《그리스도교요강》을 저술하여 개혁적 입장을 밝혔다. H. 츠빙글리의 영향 아래 있었던 스위스의 개혁자들은 츠빙글리가 죽은 뒤 칼뱅을 제네바로 초청하고, 이 도시를 전형적인 그리스드교적 시민사회로 만들어 유럽각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운동은 큰 세력이 되었다. 그 운동의 특색은 가톨릭의 교회주의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내적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복음주의이고, 또 모든 생활의 성화(聖化)를 목표로 하는 사회실천운동이다. 제네바에서 구현한 신정정치체제는 그가 만든 <교회규정>에 따라 시민생활을 목사와 장로의 협의회 지배 아래 두었다. 이것은 루터가 시민의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으로 보고, 세속생활 속에서 신의 지배를 보는 근세적인 종교관을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칼뱅파교회는 유럽 각지에 퍼져서 개혁파교회라고 하여 루더파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두 주류를 이루었다. 루터와 칼뱅의 개혁은 교회제도나 의례(儀禮)와 사회의 관계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일변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르네상스와 동일선상에 있는 인간회복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주의이며, 신조나 신학(神學) 자체를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루터파나 개혁파도 그 신앙의 중심은 가톨릭 그대로의 <사도신경>이며,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예정설을 이어받고 있다.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은 오히려 정통파가 아닌 소수파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반권력적·급진적 운동을 전개한 재세례파, 교리·신조보다도 내심의 경건을 신앙의 기본으로 하는 경건단(敬虔團), 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예수의 인성(人性)을 주장하는 유니테리언 등의 각파가 그것이다. 영국국교회(國敎會)의 독립은 종교개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생긴 것이었다. 헨리 8세(재위 1509∼47)는 루터를 공격하여 로마교회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왕후와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로마교회로부터 이탈하고,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발표해서 영국왕을 국교회의 최고수장으로 하고, 교황령과 그 밖의 로마교회령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 후 영국국교회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퓨리턴운동(Puritanism) 등을 낳았으나, 가톨릭적 경향과 프로테스탄트적 경향을 아울러 지니게 되었으며 전자를 고교회파(高敎會派)라 하고 후자를 저교회파(低敎會派)라 하여 병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운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교회 내부의 혁신을 꾀하면서 반개혁운동(反改革運動)을 일으켰다. 1545년부터 1563년에 걸쳐 수차 개최된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모든 신조가 재검토되어 가톨릭신학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I. 로욜라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회는 강력한 군대적 조직을 통해 세계적인 프로테스탄트 배격운동을 전개하면서 전교(傳敎)를 추진했다.
근대의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사상이 큰 전환을 보인 것은, 종교개혁시대가 아니라 근대에 와서 자유주의와 과학의 진보에 의한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6세기에 네덜란드의 개혁파교회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운동이다. J.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인간의 타죄(墮罪)와 구원예정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과 신의 보편적 구원을 주장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 설립된 유니버설리스트는 이러한 흐름에 입각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한 교파를 형성했다. 이신론(理神論)은 근세의 영국의 경험론, 나아가 프랑스로 건너가서 유물론으로 발전하는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17∼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리스도교 사상사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특색의 하나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계시된다고 하는 계시종교적 성격이다. 그러나 이신론은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을 인정하나, 계시에 수반되는 여러 불합리를 피하려고 시도하여 계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연종교의 입장에 섰다. E. 허버트는 이신론의 시조라고 하는데, 그가 제창한 5개념, 즉 유일신의 존재, 예배, 예배의 기본은 경건과 덕행에 있다는 것, 회개와 도덕적 진보에 의한 속죄, 현재와 장래의 하느님의 상벌(賞罰)은 이신론의 기본개념이 되었다. 이신론은 프랑스로 건너가 더욱 급진화하여 그리스도와 예수를 구별한 J. 루소, 그리스도교를 정면으로 비난한 볼테르 등의 사상을 낳았다. 또한 백과전서파를 거쳐 회의론이 되었으며, P.H.T. 돌바크의 《자연의 체계(1770)》는 무신론자의 신앙고백이라고 일컬어졌다. 독일에서도 합리주의의 풍조는 높아져, 이신론의 영향은 먼저 H.S. 라이마루스에게 나타났다. 그는 유물론·무신론에 대해서는 자연종교를 변호했지만, 동시에 성서의 불합리한 부분을 비판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공격했다. 이 라이마루스의 논문은 뒤에 G.E. 레싱에 의해 《무명인(無名人)의 단편(斷片, 7부, 1774∼78)》으로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레싱은 한편으로는 라이마루스를 비판하면서, 성서비판과 그리스도교사상은 달라야 하며, 예수의 종교의 본질은 성서에도 교리에도 없고, 사랑의 가르침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현자(賢者) 나탄(1779)》을 저술하여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3대종교가 그 목적을 같이 한다고 말하고, 그리스도교만이 신의 계시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위와 같은 계몽사상의 합리주의는 성서의 고등비판이라는 획기적인 연구를 낳아, 그리스도교의 기본신앙에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다. 성서는 이때까지 그리스도교의 어떠한 입장에서도 신성시되었고, 하느님의 진리의 오류 없는 계시로 여겨왔다. 이것은 하등비판이라는 성서 텍스트의 문헌적 연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전제였다. 그러나 고등비판은 성서 또한 인간의 손으로 된 역사상의 문서라는 인식에서, 여기에 객관적·역사적 분석을 가했다. 그 극단적인 것은 성서 전체를 신화로 보고 예수의 역사성까지도 부정하기에 이르렀으나, 전반적으로는 성서에서 볼 수 있는 신학적 또는 신화적 겉치레를 씻어내고, 예수 및 원시그리스도교의 참 모습을 밝혀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유신학은 개념적인 합리주의에서 역사적인 구체적 사실을 기초로 하여 예수의 기본정신을 살리려고 하는 새로운 신앙적 입장을 굳혔다. D.F. 슈트라우스의 《예수전(1835∼36)》은 합리주의를 뛰어넘은 역사신학으로의 길을 열어서 현대에 이르는 새로운 성서연구의 기초를 제시했다. 종래의 성서연구는 성서 전체를 하느님의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 보거나, 합리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하는 2가지 입장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이 반대처럼 보이는 2가지 해석이 실은 성서 전승의 배후 하나하나에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하는 공통되는 전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서 전승의 배후에 또 한가지 다른, 신앙이라는 심리적인 역사사실이 있으며, 이것을 탐구하는 데 역사 연구의 한 과제가 있다고 했다. 이 방법은 특히 복음서연구에 있어 <튀빙겐학파>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성서를 구성하는 원자료가 차츰 밝혀졌다. 또 문서자료의 근원이 되는 구전(口傳) 단계에까지 거슬러올라가려는 시도가, 개개의 설화 양식의 차이를 산출(産出)해 낸 <생활의 자리(Sitz in Leben)> 가운데서 포착하려고 하는 양식사적(樣式史的) 연구로 발전했다. 또 타종교와의 비교연구도 도입하여 <종교사학파>가 생겼다. 위의 양식사적 연구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R.K. 불트만은, 역사적 연구가 그 분석적 태도에 따라서 《신약성서》 전반(全般)을 뒷받침하고 있는 신화를 간과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개의 신화를 선택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전체를 비신화화함으로써, 《신약성서》 전체의 선교를 근대적인 인간의 결단을 재촉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합리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은 근대조직신학에서도 F.E.D. 슐라이어마허의 새로운 종교론의 전개로 이어진다. 그는 그의 주저 《종교론(1799)》과 《그리스드교신앙(1821∼22)》에서 종교를 철학이나 윤리와 분명히 구별하여, 직관과 감정에 의한 개인의 절대귀의(絶對歸依)의 체험이라고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자연종교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증종교이며, 그리스도교는 역사종교를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A. 리츨은 I. 칸트의 인식론 위에 그의 가치판단설을 세워 근대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판단은 인간의 자연존재임과 동시에 정신적인 인격(人格)이라는 판단이며, 이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정신적인 승리를 얻은 실천적인 활동이 종교라고 했다. 이 실천적인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 건설의 기초라고 하는 인식을 불러일으켜 여기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의가 완수된다고 했다. 합리주의에서 자유주의·역사주의로의 전환은, 그러나 객관주의라는 동일선상에 있다. 제1차세계대전 전후의 사회 혼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불안한 그림자를 가져오고 있다. 불안한 심리는 냉정한 객관적 인식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철학계가 칸트·G.F. 헤겔을 거쳐 생(生)의 철학, 실존철학과 주관적 입장을 명확히 하듯이 그리스드교신학은 네오오서독시의 신풍(新風)으로 전 신학계를 뒤덮을 경향을 보였다. K. 바르트·E. 브루너·R. 니버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신학의 유력한 일파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講解, 1919)》에서 근대적·문화주의적 신학사상을 격렬하게 공격하고, 신학을 모든 인간학적 전제에서 해방시켜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 위에 기초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이 학파의 신학자라도 반드시 바르트를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니다. 브루너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쪽의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려고 한다. 미국의 니버·P.J. 틸리히에 이르면 사회윤리적인 성격을 밝히게 된다. 교회사 면에서도 근대의 합리주의적인 경향에 대립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미 살펴본 경건주의의 교회활동은 단순히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J. 웨슬리의 운동은 이성주의에 대항하는 실천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되었다. 그 교의의 중심은 타죄를 구속(救贖)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에 의한 거듭남(重生)이었다. 이것은 이성적·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영감에 의한 종교적 체험으로서 파악되어 왔다. 이러한 입장은 개인의 금욕생활 방법의 엄격함을 요구하여 메더디즘(감리교)이라고 하는데, 영국의 산업노동자들 사이에서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보급되어 감리교회를 일으켰고, 나아가 미국에도 크게 세력을 뻗쳐 침례교회와 함께, 미국의 2대 복음주의교회로서 신대륙의 프론티어 세계에 교세를 폈다. 근대적인 그리스도교의 흐름은, 그러나 착실하게 교회에 새로운 세력을 낳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가 새로 한 교파가 되었으며, O. 크롬웰의 청교도혁명에서 회중파(會衆派)가 생겨났는데,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정통파의 근대교파가 되었다. 이들 교파는 소수파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퀘이커·유니테리언 등과 함께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여 그리스도교를 근대사회의 휴머니즘 흐름 속으로 전개시키는 데 성공했다. 광교회파(廣敎會派;Broad Chruch Party)는 이러한 사회운동을 영국에 전개시킨 대표적인 교파이다. 영국에서는 1833년부터 1840년에 걸쳐 옥스퍼드대학 관계자를 중심으로, 옥스퍼드운동이라는 고교회파(高敎會派)의 복고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자유주의 풍조에 반대해서 교회의 의례와 사제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권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광교회파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톨릭적 반동이라고 주장하여, 비국교도도 포함하는 입장에서 더욱 사회문제 전반에 그리스도교운동이 관여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작가 C. 킹즐리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운동을 일으켜서 산업조합과 노동학교를 설립했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의 수용
서 로마가톨릭교회는 보통 천주교로 알려져 있고,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신교 또는 기독교로 부르고 있는데, 가톨릭교는 18세기에, 프로테스탄트교는 19세기에 한국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가톨릭교는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 M.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같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들이 조선에 도입되면서, 서학이라 하여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관심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9)에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北京(북경)]에서 J.J. 그라몽에게 영세 받고 돌아와 이벽(李蘖)·정약전(丁若銓)등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신앙집회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1794년 베이징주교 A. 구베아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복음전파를 위한 명도회(明道會)의 조직과 성공적인 전교활동 등에 힘입어,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000명이던 신자수가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조선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와 이승훈·정약종(丁若鍾)·권철신(權哲身)·황사영(黃嗣永) 등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하였다. 이후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B. 브뤼기에르는 베이징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의 초대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병사하였고, 1837년 조선교구 제2대교구장 L.M.J. 앵베르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886년 조·프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개항지에 정착하여 건축을 할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됨으로써 본당의 조직이 크게 발전하였다. 가톨릭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 대상이 되어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와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 등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원인은 조선왕조의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에 의해 유교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단시하여 가톨릭교를 사교로 낙인찍었고, 쇄국양이주의(鎖國攘夷主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교는 가톨릭교에 비해 100여 년 뒤에 수용되었다. 1884년 9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의료 선교사 H.N. 알렌이 입국하였는데, 알렌은 서양의술로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어 1885년 4월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였고, 이를 계기로 선교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달에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H.G.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H.G. 아펜젤러가 인천에 왔으며, 5월에는 북감리교의 W.B. 스크랜턴 모자가 도착하였다.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W.D. 레이놀즈·L.B. 데이트·W.M. 젠킨 등의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고, 남감리교에서는 1895년에 C.F. 리드를 파송하여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밖에도 성공회는 1891년에, 캐나다장로교는 1893년에, 침례교는 1889년에, 제칠일안식교는 1904년에, 성결교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특징 있는 선교를 전개하였다. 즉, 감리교는 선교역량을 교육과 부녀사업에 치중하였고, 장로교는 네비우스방법이라는 토착과 자립원칙의 선교정책을 적용하였으며, 구세군은 처음부더 사회봉사와 자선사업에 치중하였다. 초기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조선사회 전통과 척사위정이라는 명목 아래 박해를 받으면서 민족교회로 그 자리를 굳혀 갔다.
일제강점기의 그리스도교
점하에서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사참배의 강요와 선교사들의 추방, 조선교회의 약세화 등 일제의 탄압 속에서 역사참여와 민족 구원의 열망을 대변하였다. 가톨릭교는 비록 독립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평신도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서상돈(徐相敦)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였으며, 강화·광주 등지에서는 가톨릭교인이 만세시위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3·1운동으로 인하여 53명의 가톨릭신자가 투옥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40년대에 이르러 외국인 교구장을 일본인 교구장으로 대치하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구금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구는 발전하여 1911년에는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었고, 동시에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되었다. 1920년에는 원산교구가, 1927년에는 평양교구가, 1928년에는 연길교구, 1937년에는 전주교구와 광주교구, 1939년에는 춘천교구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전주교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짐으로써 처음으로 방인교구(邦人敎區)가 탄생하였으며, 이어 서울교구장직이 한국인 신부 노기남(盧基南)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주교가 탄생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회도 일제의 탄압 아래서 전국적인 조직과 해외선교, 그리고 농촌·사회운동을 통해 민족교육의 장으로 되어 갔다.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었으며, 감리교회는 토착화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이와 같은 저력으로 3·1운동에 임하여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앞장섰다.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오화영(吳華英) 등 16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국내의 각지로 선언서의 배포 및 연락을 취하여 일제히 3·1운동에 참여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 주도하의 독립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총 117회에 달하였다. 1925년부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예수교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농촌운동이 전개되었는데, 1929년에는 전국 27개 도읍에 대규모 농촌강습소를 개설하여 농촌개량·농사기술·협동조합·법률문제·의식화교육 등을 이끌어 나갔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절대 통제를 위해 신사참배 강요에 나서 교회의 굴복을 강요했다. 교회는 신사참배 거부의 자세를 굳혔는데, 이 문제로 신학교가 폐쇄되고 200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000여 신도가 투옥되고 50여 교역자들이 순교하였다. 전쟁 말기가 되자 일본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져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38년 YMCA와 YWCA를 해산하여 일본 YMCA에 종속시켰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또한 해산되어 조선기독교연합회로 변질되었으며, 1940년에는 침례교를, 1943년에는 안식교와 성결교회를 폐쇄했다. 교회의 실질적 말살을 꾀하였던 일본은 남은 교회들마저 해체, 병합하여 조선교단을 만들어 일본교단에 종속시켰다.
8·15 이후의 그리스도교
5와 6·25를 거치면서 남한의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군정시기에 가톨릭교는 교회조직면에서 충청남도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대전교구로 독립하였고, 한국교회에 교황사절이 부임하였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결과적으로 북한 교회의 전멸을 초래하였고,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종교말살정책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반면, 남한의 가톨릭교는 휴전 당시 16만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1962년에는 53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1962년에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많은 교구의 증설이 이루어졌고, 이 해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로 교회의 미사는 모국어로 집전되고 전례와 예식이 간소화되었다. 19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84년 한국가톨릭교회는 창설 200주년을 맞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오늘의 한국 가톨릭교회를 있게 한 순교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여 그들을 모두 성인품(聖人品)에 오르게 하였다. 1989년 10월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하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이 성체대회에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세계 76개국의 가톨릭교회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오늘날 200만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교구수는 14개 교구로, 그 중 서울·대구·광주의 3교구는 대교구이다. 한편, 8·15 후 새로운 선교지로 등장한 한국에 대해 해외 여러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했다. 이로 말미암아 교파 교회로서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따라서 그러한 교파의 열의에 의한 수세적 확장에는 성공했으나, 반면 교회론의 기본적 약화를 초래하는 교회 불일치의 부정적인 면은 제거하지 못하고 말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분열 극복의 신학을 성서적 근거에서 재발견하고 에큐메니컬운동에 정진하였다. 신학교육에서의 초교파적 연합운동은 1964년 4월 연세대학교 안에 연합신학대학원을 설치하여, 어느 교파 출신이건간에 함께 가르치고 배우게 함으로써 구현되어 나갔으며, 1965년 전국교회가 단결하여 추진한 <전국복음화운동> 등은 에큐메니컬 정신의 실현이었다. 1970, 1980년대의 고도경제성장 과정에서 똑같이 성장을 거듭하여, 공칭 1000만 신도까지 거느리게 된 한국 그리스도교는 교단 내 또는 외부로부터 그 사회적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신앙의 내적 개혁에 의해 사회적 신용을 얻으려고 힘쓰는 한편 고도경제성장 이후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였다. 가톨릭교단에서는 1989년에 가톨릭의 최대 행사라고 할 제44회 세계성체(聖體)대회를 로마교황을 맞아 개최하고 그것으로서 성장한 한국 가톨릭의 현황을 널리 내외에 알렸다. 신앙 분야에서는 한국 고유의 전통양식과 가톨릭 전례(典禮)를 절충한 새로은 <차례 규정>을 만들기도 하여 신앙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또한 사회운동의 일환으로서 등장한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이 강화되어 근로자를 위한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서울의 명동성당은 노동운동의 메카로서도 유명해졌다.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1982년의 선교 100주년을 계기로 하여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있었던 각 교파간의 통합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신학교의 학제(學制)를 개편하거나 통일적인 신앙고백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와같은 움직임은 개혁파의 그리스도교장로회로 이어지고 보수파의 예수교장로회도 한국 사회에서의 대중화나 신앙 토착화가 중요한 신앙상의 과제임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수는 가톨릭측보다 많기는 하지만 조직력이나 사회적 영향력에서는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프로테스탄트도 각 교단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노동운동이나 인권문제에 관한 서명 운동을 솔선해서 하는 데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그리스도교의 공동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것은 북한에 대한 선교 문제이다. 미국교회협의회 대표가 방북(訪北)하여 가정교회(家庭敎會)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 밝혀지자 남북문제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교류를 위해 북한에도 대표단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