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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길이다. 살아있는 길이다. 그래서 강은 움직이며 흘러간다. 그때 강은 우직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이다.
강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길이다. 강은 본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법. 그때 강은 겸손하지만 넉넉한 품이다.
강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길이다. 강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때 강은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이다.
강은 깊고 넓은 길이다. 강의 표면은 평온하지만 내부는 치열하다. 그때 강은 번뇌 속에 있지만 종내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다.
- 진뫼마을 ; 도수네집
지난 7월6일 오전 9시 광주 구 도청 앞. 김태성 기자와 함께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역을 향해 출발했다.
섬진강 도보답사 기획물 취재를 위해서다. 계속되는 촛불집회 참여와 연 이틀 통음을 한 까닭에 정신이 혼미하다.
누적된 피로와 수면부족 탓이다. 가는 길 내내 가수면 상태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오늘 하루 강의 길을 따라 걷다 찰나의 깨달음이라도 얻는다면 당장 죽어도 좋으리. 말해놓고 보니 폼은 나는데 후회막급이다. 개똥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오전 9시55분. 진뫼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섬진강 걷기의 종착지가 되겠다.
하지만 일정을 조금 바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굳이 시비를 걸겠다면 그간 전라도닷컴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라고 해두자.
“어머니, 아버지 가난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서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
김도수씨의 ‘사랑비’에 얽힌 사연은 그간 제법 많은 지면에서 활자화됐다. 더 이상의 언급은 사족일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부모의 고혈로 연명하는 자의 처지가 되고 보면 괜한 억하심정이라도 부리고 싶다.
갑자기 콧날이 찡해지는 게 착잡해지는 심정을 좇을 길 없다.
한동안 시선 둘 곳을 모르다가 마을 앞을 흐르는 강줄기를 보면서 마음을 다독인다.
최근 강우로 늘어난 수량 때문인지 강줄기는 제법 위풍당당하다. 강가에는 물잠자리와 각종 나비들로 지천이다.
매미소리, 풀벌레소리, 새소리 그리고 개구리 소리가 강물소리와 완벽한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다.
강둑 위로는 흑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강 건너편에서는 해오라기와 물새들이 먹이사냥에 한창이다.
인간과 새들 사이의 심리적 안정거리가 딱 그만큼인가 보다. 발길을 옮기자 이번에는 인적에 놀란 개구리들이
물 속으로 풍덩하고 잠수한다. 어느새 내 마음도 그 소리를 좇아 강바닥 어딘가를 더듬고 있다.
콘크리트 다리 아래쪽으로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는 돌 징검다리가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행여나 잊혀질세라 거센 물살에도 아랑곳 않고 끊임없이 존재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 자신도 인공구조물.
하지만 편리만 좇는 인간의 욕망에 묻혀져가는 풍경의 슬픔이란.
“그리운 고향집입니다. 편히 쉬고 가십시오.”
도수네 집. 정작 주인은 없고 화단에 핀 봉선화가 멀리서 온 객을 수줍게 맞는다.
안내문만 봐도 주인장의 몸에 배인 친절함과 열린 맘이 절로 느껴지는 것 같다.
뒤꼍에는 벗들을 위해 주인장이 묻었다는 세 개의 김칫독이 나란히 정겹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마당이며 살림살이들에서는 주인장의 살뜰함이 묻어난다.
도수네 집을 일별한 뒤 나선 길. 강가에는 분봉할 벌집을 손질하고 있는 아낙의 손길이 분주하다.
“한봉 한통에서 (분봉하면) 시통도 나고 니 통도 나. 아카시아 허고 밤꽃은 졌어도 지천에 꽃이 깔려있응께로 벌들이 계속 꿀을 날라 오제. 저그 재호네하고 두 집만 빼고 집집마다 한봉을 치는구먼. 알다시피 우리 진뫼마을 꿀은 완전 무공해 천연꿀이여.” 아낙의 진뫼마을 꿀 자랑은 끝이 없을 것만 같다.
- 관촌역~신평 ; 강물은 자기존재를 지우며 흘러간다
오전 10시12분. 진뫼마을을 빠져나와 길을 재촉하길 한참.
마침 동네어귀가 나타나자 길도 묻고 목도 축여갈 참으로 슈퍼에 들렀다.
아낙 서넛이 고구마 순을 다듬으며 수다삼매경에 빠져있다. 인기척을 내자 주인인 듯한 아낙하나가 엉거주춤 일어선다.
순간 아낙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린다.
그때 아낙하나가 힐끗 카메라를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여기 사람들 그만 찍어가” 한다.
다른 아낙들도 말은 안했지만 모두가 귀찮다는 표정이다. 그만큼 도시민들의 때가 많이 탔다는 증거다.
그 순간에도 주인장은 기어코 장삿속을 드러내 보인다.
“여기 있는 다슬기 다 사가면 강에 가서 다슬기 잡는 포즈를 취해주겠다”는 거다.
그냥 웃고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까지 다잡지는 못했다.
다시 이동을 시작해 오전 10시50분께 관촌역에 도착했다. 오늘 일정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역사 내부는 단촐 하고 한가했다. 아직은 비수기라 그런지 승객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를 막 나서려는 순간.
금방까지 흐렸던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햇볕이 쨍쨍하다. 대략 난감이다.
역사를 출발해 오원2교를 넘어서자 임실~관촌간 국도공사가 한창이다.
멀리 보이는 섬진강 제방 안쪽으로는 제법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일명 코들로 불리는 대리다.
대리 텃밭에는 옥수수, 참깨, 콩, 고추 등 밭작물들로 빼곡하게 넘쳐난다. 여전히 강바람은 시원했지만 햇볕은 씩씩하다.
그래서인지 강가에는 인적이 거의 없다. 다만 개망초와 이름모를 풀꽃들만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채 신선노름이다.
개망초 향기에 취했을까. 강가를 걸으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강물은 자기의 흔적(존재)을 지우며 흘러간다.
그럴수록 강둑과 강바닥 위로는 그 만큼 세월의 더께(기억)가 쌓여간다. 강은 자기존재를 지우지만 주변의 환경이
그 존재를 더욱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현재의 강둑은 오랜 세월 동안 강이 살아온 흔적일 터.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인간의 탐욕이 무지막지하다. 상념도 잠시.
“빠~앙”하고 지나가는 트럭의 경적 소리가 꽃향기에 취한 혼몽을 일시에 흩어 놓는다.
어느새 신평농공단지를 지나 대리마을이다. 이윽고 신평삼거리 초입에 들어섰을 때다.
끙끙대던 코가 일순 벌름거리기 시작한다. 한 뼘 그늘에 의지해 동네 청년들 너덧 명이 고기를 굽고 있다.
아마 새참을 준비하는 듯했다. 돌판 위에서는 지글지글 노래하듯 삼겹살이 노릿하게 구워지고 있다.
어느새 입안에 가득 고였던 침이 방정맞게도 꼴깍 소리를 내면서 연신 목울대를 타고 넘는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이 고통스럽다보니 오감이 통째로 고생이다. 행여 들킬세라, 차라리 고기 한점의 행복을 위해
순간의 망신을 감내하자는 비루한 생각 사이에서 번뇌의 시간은 참으로 길기만 했다.
결국 마른침을 집어 삼키는 선에서 혼자 궁싯거리기를 한동안. 신평면 소재지인 원천리를 지나쳐왔다.
샘이 많고 물맛이 좋아 시암내로도 불리는 원천리는 면소재지답게 다방, 슈펴, 미장원, 이발소, 식당 등
기본적인 편의시설들이 제법 구색을 맞춘 마을이다.
- 신평5거리 : 강점순 할머니의 사랑법
신평 5거리에서 다시 지도를 펼쳐들었다. 방향을 잡고 출발을 서두르다가 멀리 강둑과 인접한 텃밭에-아랫건매들-
계시는 할머니 한분을 발견했다. 강점순 할머니(79)다. 할머니는 훌쩍 자라버린 깨의 모종을 옮기고 계셨다.
방금 전 물을 줬던 깨 모종은 더 이상 땡볕을 참을 수 없었는지 이내 숨을 헐떡이며 지상에 배를 깔고 누워버렸다.
“땅이 완전히 모래땅이여. 아무리 물을 줘도 물이 너무 잘빠져서 가뭄을 많이 탄당께.”
묻지도 않았는데 넘겨 짓는 폼이 영락없는 족집게다. 연세도 연만하신 분이 뙤약볕에서 일하시다 큰일이라도 당하시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벨 수 있어? 그냥 놔둘 수는 없고 이렇게라도 해야 제. 아무리 말 못하는 식물이라고 내비 두면 천벌을 받아.”
이웃집 할매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방치됐던 밭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말 못하는 식물이라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는 것.
강 할머니는 내년이면 팔순이다. 슬하에 6남매를 뒀는데 며느리가 다섯에 손자가 스물하고도 두 명이다.
자식.손자 농사만큼은 일류 농군이 부럽지 않다. 할아버지는 지난 5월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16살에 열 살 위인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60년을 동고동락했다.
“남편이 나이가 많이 먹었는데도 그때 중신을 선 할매가 일부러 속인 거였어. 나이도 많고 광대뼈도 불거지고 얼굴도 시꺼매서 나도 싫어했지.” 그 때문에 화가치민 친정아버지가 남편을 고소하고 내쳤단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임실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고 죽였다.
전쟁 후 다시 찾아온 남편이 친정아버지께 눈물로 하소연한 끝에 다시 결합한 것이 60년 세월이다.
미운 정 고운정이 다 들어서일까? 할머니는 “지금은 그런 영감이 죽도록 보고 잡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밭둑을 돌아서 나오는 길. 강 할머니의 여윈 발목이 가슴 시리게 눈에 밟힌다.
어쩌면 할머니의 삶이 강의 그것과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로 흘러들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강이다.
그 과정에서 강은 자신에게 의지한 뭇 생명들에게 가진 것 모두를 아낌없이 나눠준다.
강 할머니도 그랬을까? 모래땅 같은 자식들이 가뭄으로 고생할까봐 평생을 강처럼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더 큰 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것, 바로 사랑이다.
-신덕천 방죽 ; 빠가사리 낚시
신평을 빠져 나오다 덕암리 신덕천의 방죽(일명 뎃지보) 아래에서 고기잡이에 코를 빠뜨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른 둘이서 일명 빠가사리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원체 우스꽝스러워 잠시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하기로 했다.
방법이래야 간단했다. 엉성한 나뭇가지로 만든 낚싯대를 바위틈 사이에 막무가내로 쑤셔 넣었다가 빼내는 것이 고작이다.
“저래가지고 과연 고기가 잡힐까?” 옆에 있던 김태성 기자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여기저기 쑤셔 넣은 낚싯대를 꺼내보지만 매번 허탕이다. 보는 사람들이 더 안쓰럽다.
들이는 품에 비하면 수확이 영 시원치 않은 까닭이다. 저러다가 빠가사리가 사람을 잡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순간 강에서 환호작약하는 소리가 들린다. 눈 먼 고기라도 한 마리 걸려든 모양이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혹 그 낚시법이 옛 조상들의 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일행은 낚시꾼을 만나기 위해 본격적으로
바짓가랑이를 걷었다. 본의 아니게 세족을 하게 된 것이다.
“별다른 비법은 아니고요. 그냥 심심파적으로 하는 거쥬.”
전주에서 왔다는 김진홍(57)씨의 말이다. “뭐 안잡히먼 어때유. 시원하고 좋잖여유.”
맥이 딱 풀려 하마터면 물 속에 주저앉을 뻔했다.
정병수(62)씨는 “옛날 어렸을 적에 빠가사리를 잡던 방식”이라며 “왕년에는 고기깨나 잡았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고작 빠가사리 두 마리 잡았냐”는 기자의 핀잔에
“지금은 블루길이나 베스 때문에 토종물고기의 씨가 말랐다”고 옹색하게 현재의 처지를 변명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침나절 내내 고작 빠가사리 두 마리라니. 그것도 거의 치어 수준이다.
왕년실력을 들먹이지만 기자가 보기에는 그냥 어수룩한 낚시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기 잡는 한 컷 사진을 잡기위해 김태성 기자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서툰 낚시꾼 때문에 기자들만 애먼 고생을 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낚시꾼들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한 마리면 어떻고 또 열 마리면 어떠랴.
그냥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심의 한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연어는 몇 년을 대양에서 살다가 강(기억)을 거슬러 올라와 2세를 산란한 후 최후를 맞는다지 않던가.
아마 그 낚시꾼들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다 뭔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낚았는지도 모른다.
- 용암리 석등 ;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에 감탄사가 절로
길을 달려 용암리 북창 보건진료소 골목을 끼고돌면 ‘광명등’이라 불리는 용암리 석등을 만날 수 있다.
안내표지에 따르면 석등은 보물 267호로 지정돼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의 높이는 5.18m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석등 윗부분이 파손돼 원래 모습을
상실한 것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이 감탄사를 절로 토해내게 한다.
석등이 자리하고 있는 중기사는 신라중엽 때 처음 지어져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지금 건물은 1924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전 발굴 당시 ‘진구사’라는 기와 와편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절터는 ‘진구사’ 터로 추정되고 있다.
용암리 석등을 뒤로하고 국도로 접어드니 운암면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벌써 12시33분이다.
강둑에는 수석채집을 나왔는지 몇몇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들을 까뒤집고 있다.
그늘이 없어 쉴 곳이 마땅하지 않은 사람들은 임운교 아래에 자리를 펴고 솥까지 내걸었다.
아마 삼계탕이라도 끓이는 것이리라. 순간 뱃속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쪼르륵하고 민망함이 파도를 친다.
한참을 가도 운암면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 목적지로 가는 행로를 이탈해 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맨 사실을 알아챘다.
강만 따라 내달리다 낭패를 본 것이다. 다시 지도를 펼쳐들고 서툰 독도법에 의지해 운암면 소재지인
쌍암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 4분이다. 임실영어체험학습센터 간판이 보인다. 시골까지 영어바람이 불고 있나 보다.
-운암면 쌍암리 ; 명동옥집 신막래 할머니
금강산도 식후경.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다 들어선 곳이 명동옥집이다.
주인의 추천 메뉴는 쑥 다슬기 수재비다. 주인 신막래(68) 할머니는 이곳에서 30년 이상 장사를 해온 터줏대감이다.
서른세 살부터 시작한 일이 지금은 천직이 됐다.
수재비는 국물 맛이 시원하고 담백한 것이 일품이었다. 섬진강에서 직접 잡은 다슬기로 국물을 우려냈다고 한다.
쑥이 들어간 수재비도 쫄깃하고 향이 좋은 것이 먹음직했다. 거기에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담근 천연 무공해
김치와 즉석에서 따온 청양고추, 상치, 토종 콩으로 만든 재래식 된장까지. 수재비의 맞을 더하는 비결들이다.
신 할머니는 “사는 것이 지겹다”고 했다. 그녀 자신의 삶터가 또 다시 수몰예정지구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처음 기자일행이 들어섰을 때 감정평가사인줄로만 알았단다.
현재 운암면 일대 233세대는 수몰로 인한 보상 때문에 감정평가를 받고 있다.
“물에 잠겨 불문 더는 못살지. 인자 늙어서 어디로도 못가는디. 자꾸 이사가라해서 골치가 아파 죽겄어.”
운암초.중등학교 아래쪽에 집단이주지를 만든다고 한다. 신 할머니는 의지에 반해 떠밀려 가는 삶이 서럽다.
예전에도 수몰로 한차례 삶의 터전을 빼앗겼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터전마저도 수몰될 위기에 처해있다.
“사람 살만한 데가 못돼. 그래도 떠나면 그리워지겠지.”
신 할머니의 배웅 속에 운암면소재지를 빠져나오는데 이주비 보상을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낀다.
‘50년의 고통과 피해를 보상하라!’
- 옥정호 ; 산 속에 강이 있고 강 속에 산이 있더라
드디어 국사봉(475m)과 옥정호 드라이브 코스에 들어섰다. 국사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옥정호는 가히 장관이었다.
산 속에 물이 있고 물 속에 산이 있었다. 강 둔덕은 강렬한 연둣빛으로 산과 물의 중간색을 띠고 있다.
국사봉 뒤쪽으로는 오봉산의 다섯 봉우리들이 제각각 잘남을 뽐내는 듯하다.
국사봉을 내려와 옥정호를 끼고 한참 돌다가 운암정에 닿았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다.
운암정은 먼저 온 사람들로 만원이다. 아쉬운 대로 휴게소 간이의자에 앉아 차가운 음료수를 홀짝거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운암정 맞은편엔 조선 숙종 때 효자 운암 이흥발의 효행을 기리는 조삼대가 있다.
조삼대는 운암이 중병에 든 홀어머니를 위해 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하루는 물고기 대신 산삼을 낚아 병을
치유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옥정호에 또 다른 다리가 들어서고 있는 모양이다. 운암대교 아래로 옥정대교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운암삼거리 막은댐에서 만난 두 어른신은 과거 영화를 회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막은댐 지역은 섬진강댐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막은댐은 선착장이 있었던 자리로 낚시꾼들에게는 매우 유명한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선착장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관광버스가 실어 나르는 수많은 낚시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낚시꾼들이 하루 낚시를 하면 다 들고 가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고 했으니까.”
섬진강댐 건설로 농사짓던 땅이 수몰되자 이사를 나왔다는 윤효상(60)씨의 말이다.
“섬진강댐이 원래는 다목적댐이었는데 전라북도의 물 부족 때문에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상권이 다 죽었어.
영화는 다 옛말이고 지금은 장사도 안돼. 특히 옥정대교가 완공되면 그나마 다니던 차량도 이 곳을 찾지 않을 것 같아.”
멀리 강을 응시하던 윤씨가 갑자기 입맛을 쩍쩍 다신다.
“예전에는 정말 물 반 고기 반이었어. 도랑을 타고 고기들이 시커멓게 올라가던 시절이 있었지.
근디 지금은 블루길허고 베쓰 땜에 토종물고기를 찾아볼 수가 없어. 생태계가 완전 절단난거지.”
곁에 있던 최용만(71) 할아버지가 거들고 나선다.
“뭣이라도 있어야 살기가 좋아지지. 옛날보다 살기가 더 팍팍해진 것 같아.
마을이 수몰된 후 주민들 대부분이 전주나 인근 지역으로 다 떠나고 지금 남은 사람은 몇 안돼.”
옛날 두 어르신들에게 섬진강은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에도 몇 수십 번씩 물과 뭍을 넘나들었다.
자가용이라고 부르는 나룻배를 타고서다. 나룻배는 직접 만들어 썼다. 한번에 최고 10명까지도 태울 수 있었다.
댐건설로 강도 사람도 삶의 터전을 온전히 보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 같은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옥정호 주변은 난립하는 별장과 펜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일부 땅 부자들이 이제 경관마저도 독점하고 있다.
- 임실 필봉~덕치면 백운마을 ; 살 제 남원, 죽어 임실
옥정대교는 한창 공사 중이다. 그런데도 지도에는 버젓하게 다리로 명기돼 있다. 운암대교를 지나 옥정대교를 한참 찾았다.
식당 주인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맹글어지지도 않은 다리를 찾으믄 어떡케 헌다요.” 면박만 당했다.
모든 것이 지도 탓이다. 다시 차들 돌려 운암대교(350m)를 지나 강진면을 향해 달린다.
임실 필봉농악전수관에 도착하니 오후 3시56분이다. 풍물관 공사가 한창이다.
2009년 5월까지 전시관, 체험관(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각정자, 야외공연장 등 7개의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전수관에서는 대학생 대여섯 명이 우리가락을 전수받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조선의 꽹과리 소리는 조선인의 혼 깨우는 소리. … 남원골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하늘의 뜻이 있어
한 명인의 탯줄 끊으시니 그 울음 만고의 소리로 화하고 깽매깽매 꽹과리 소리 속에서 세상 만들며
소리 속에서도 깨치며 가난도 고통도 소리로 바뀌어 흥겨운 농악굿! 신명굿! 일체가 아니면
전무 예도의 그 한길 외길이었어라.’ 필봉 양순용 선생의 삶을 기리는 문병란 시인의 추모사가 절절하다.
강진을 지나 옥정호의 마지막 지점인 회문산에 도착했다. 멀리 섬진강 수력발전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섬진강이 소수력발전시설 건설을 둘러싸고 시끄럽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잠시 잠복상태지만 언제 불거질지 모르는 불씨를 안고 있다. 중국 쓰촨성 지진에서 보듯이 어떤 학자들은
댐을 많이 건설할수록 지진이 많아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댐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물을 아껴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회문산을 돌아내려오면서 덕치면 백운마을을 들렀다. 강둑을 타고 걸으면서 바라본 수변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인근 다리 위 물가에서는 오누이로 보이는 초등학생 둘이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전주에서 왔다”고 한다.
‘살 제 남원, 죽어 임실’이라는 말이 있다. 살았을 적에는 물산이 풍부한 남원에서 풍족하게 생활하다가 죽어서는
산세가 빼어나고 명당자리가 많은 임실에 묻히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백운마을 강가를 보면서 그 말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된다.
섬진강 이어걷기 세 번째 날 일정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오는 길. 덕치마을 휴게소인 일중슈퍼에 잠시 들렀다.
음료수를 샀더니 졸음운전 말라며 껌을 한통 더 끼워준다. 그 마음 씀씀이에 이내 피로가 풀린다.
노경식(76), 나분님(70) 부부.
나 할머니는 일중슈퍼의 주인이다. 노경식 할아버지는 한양약방 약업사시다.
1976년 약업사 자격증을 획득해 임실군 덕치면에서 첫 번째로 허가를 받았다.
현재까지 덕치면 일중리의 유일한 약방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약방만 운영했는데 약국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이후로는 슈퍼랑 병행하게 됐다.
최근에는 슈퍼 매출이 훨씬 높다. 그래서 노 할아버지는 차라리 대나무, 대추, 살구, 텃밭 등을 일구는데 품을 더 들인다.
슈퍼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이른바 만물슈퍼다. 평일에는 거의 손님이 없고 주말과 휴일에 반짝 손님이 대부분이다.
매일 진안 마이산으로 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잠시 들른다고 한다.
나 할머니는 지나가는 손님들을 배려해 가게 바깥에 식수대를 설치해 놓았다.
사비를 털어 관정을 개발하고 전기모터를 돌려 지하 80~90m에서 천연 암반수를 퍼 올리고 있다는 것.
그런 나 할머니도 식수대 문제로 종종 속을 끓인다.
“물을 떠갈 때 말이라도 고맙다고 허믄 나도 좋고 이녁도 좋을 텐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하고 물을 떠가는디.
그때는 정말 화가 난다.”
덕치마을 일중리에는 인심 좋은 할머니가 산다. 혹 그 마을 앞을 지나갈 일이 생기거든 주저 말고 일중슈퍼의
문을 두드리시라. 그리고 시원한 물맛을 본 후에는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마시라.
첫댓글 ^^산 속에 강이 있고 강 속에 산이 있더라^^ (옥정호)
섬진강 상류쪽인가? 기행문 잘 읽었다. 마을 한 분 한 분 인터뷰라고 해야하나.. 암튼 새롭고 한번 가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섬진강이라고 해서 하동쪽에 왔다갔나 했지만 말야. 수고혔다.
고백할게 있다. 난 이제야 철이 들고 있다.남들은 지새끼 낳아보면 엄마마음 안다고 하던데 난 이제야 모든것이 가슴으로 이해되고 진심으로 숭고하게 엄마께 고개를 숙인다.전화드렸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엄마 미안해 무슨 놈의 철이 마흔둘이되어서 드는지..내가 엄마하고 같은 처지였다면 난 엄마 절반 만큼도 현명하지 못할 거라는 걸 두손들고 인정한다.마흔 둘 이제야... 늦은 건 아니겠지..내가 얼마나 소중한 걸 놓칠 뻔 했는지..이제야 알것 같아..
영대, 너는 그 고운 사람들 그리고 자연들을 그리 자주 만나니 금방 해탈허것다.하기야 이미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만.. 부럽다.섬진강이라..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그립고 감동이다. 언제였던가..그리운 이 찾아 강경 금강에 앉아 본 일이 있는데..ㅎㅎ 사람은 잊었어도 그 금강의 도도함은 아직도 내가슴에 흐르는데...그 시절엔 왜 이 놈의 가슴이 습자지처럼 생겼었을까? 아직도 가슴이 싸~아 해..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면..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