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대해 몇 자 적다
어젯밤에는 묵정밭 아래 숲속에서 고라니가 울었다.
추석도 며칠 지난 터라 달은 자정 쯤 되어야 뜬다. 그래서 사위가 어두웠다.
저녁밥 먹은 뒤 마당 끝에 서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고라니는 길게 여러 번에 걸쳐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맑지는 않다.
마른 공기를 타고 어둔 허공을 타고 넘어오는 고라니 울음소리는 죽음을 촌각으로 다투는 노인네의 밭은 숨소리 같다.
고라니는 왜 혼자 어두운 풀숲에서 울었을까 ? 알 수 없다. 이 우주에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우주는 미지(未知), 거대한 알 수 없음이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태양과 위성들, 별들과 은하수들이 있는 공간인데 그것은 전체 우주에서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의 나머지 96퍼센트는 가없는 암흑물질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불가해한 세계다.
그러니 무엇을 안다고 우쭐거리는 사람을 보면 우습고, 감히 모른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새벽으로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
요즘은 주말마다 올라가는 경선네 황토방 옆에 있는 작은 연못 물속 수련 줄기 사이에서 헤엄을 치며 놀던 어린 뱀 두 마리도 안 보인다.
물이 차졌기 때문이다. 곧 상강(霜降)이다. 며칠 내로 살얼음이 얼 것이다.
색감이 좋게 단풍든 감나무 잎이 지자 낮은 촉수의 새끼알전구 같은 감들이 일제히 알몸으로 드러났다.
올해는 가지마다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작년에는 감이 적게 매달렸는데, 해거리를 한 것이다.
유실수라고 해도 나무마다 열매를 맺는 가지가 다르다.
사과나무는 2년생 가지에 열매가 맺고, 배나무는 3년생 가지에 열매가 달린다.
감나무는 1년생 가지에 열매가 달린다. 그래서 새 가지에 열매를 맺으려고 스스로 묵은 가지를 분질러 떨어뜨린다.
감나무의 뇌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감나무도 나름대로 머리를 쓰는 것이다.
감나무는 퇴비가 모자라면 풋감을 유난히 많이 떨군다.
그 풋감들을 다 키우는 게 버거워서겠지만 나는 왠지 감나무가 그 낙과들을 거름 삼아 제 모자란 자양분을 보충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퇴비를 충분히 줘야 낙과가 줄고 감의 단맛도 좋아진다.
감나무는 제 거주지를 스스로로 옮기지 못한다. 한번 뿌리내린 곳에서 평생을 산다. 이게 대다수 식물의 숙명이다.
식물과는 달리 동물(動物)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다. 그 운동성 때문에 동물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운동성이 의식의 뿌리다.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의식이란 움직임이 진화과정을 통해서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내면화된 것이다.
1) 움직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죽을 때 움직임을 멈춘다. 살아서 움직임을 멈춘 사람이 식물인간이다.
죽은 건 다 분해되어서 생명 이전의 원자로 돌아간다. 사람은 포유동물(哺乳動物)에 속한다. 고래도 포유동물이다.
말 그대로 젖먹이는 움직이는 것이란 뜻이다. 이 움직임은 늘 크던작던 방향성을 갖는다.
이 방향성을 결정하는 가장 큰 두 가지 요인은 먹이와 생식이다.
내 몸도 어떤 쓸모와 필요에 부응하려고 분주했다.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이다.
“등잔불이 타지만 실은 제 몸을 태우는 것이며, 계수 열매가 먹을 만하면 가지까지 꺾이고,
옻나무가 쓸 만하면 거죽까지 벗겨진다.”(『장자』, 「인간세」)
나는 제 몸을 태우느라 바쁘고, 가지까지 꺾이느라 바쁘고, 거죽까지 벗겨지느라 바빴다. 그 분주함으로 내 수족은 고단했다.
움직임과 그 동선의 궤적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중추기관은 뇌다. 그러므로 내 뇌도 아울러 고단했다.
아 ! 쉬고 싶다. 낮에는 한가롭게 산길을 걷고, 저녁에는 돌아와 등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고요함 속에서 옛사람의 창곡(唱曲)을 몇 곡 듣거나
겸재 정선의 그림을 그윽하게 감상하다가, 이윽고 깊은 밤에는 햇솜으로 새로 지은 홑청이불 속에서 단잠을 자고 싶다.
추수가 끝난 논에 나가보면 빈 우렁 껍데기들이 나뒹군다. 짙푸른 하늘에는 기러기떼가 줄지어 날기도 한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 논두렁 / 남은 발자국에 / 딩구는 / 우렁 껍질 /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
하관(下棺) / 선상(線上)에서 운다 / 첫 기러기떼.”(박용래 , 「하관」)
수레바퀴 지나가 움푹 패인 자리에 물이 괴고, 그 물에 살얼음이 낀다.
시인은 그 살얼음 밑바닥까지 내려오는 햇무리를 바라본다.
아마도 박용래 시인은 가을걷이가 끝난 뒤 들을 거니는 취미가 있었나 보다.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다. 지구의 나이는 그보다 적다. 가을이 생긴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그래도 가을은 항상 새로운 가을이다. 올해의 가을은 작년의 가을과 다르다. 모든 가을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을이다.
이번 주말에는 경선네 황토방에서 제수씨가 떡을 한다고 한다. 올 가을은 경선네 황토방에서 떡을 먹은 가을이다.
가을은 조락과 결실, 그리고 긴 휴식과 죽음의 예비 기간이다. 먼저 해가 짧아진다. 해가 짧아지니 일조량이 준다.
이 사태에 모든 식물들이 먼저 즉물적으로 반응한다.
더 이상 활발한 광합성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활엽의 나무들은 잎을 떨군다. 식물은 혹한의 시절을 대개는 씨앗으로 견딘다.
동물들의 피하에 지방층이 두터워지고, 몸을 덮은 털은 무성해진다.
곰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 땅으로 굴러본 뒤 아프지 않으면 비로소 겨울잠에 들 채비를 한다.
겨울을 날만큼 지방층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듯 가을은 본디 덜 움직이고 신체의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하는 계절이다. 우리 몸은 그걸 계통발생 기억으로 갖고 있다.
동물들도 휴식의 한가로움이 필요하다. 한가로움은 돈 되는 일이 아니므로 세상 사람들이 등한히 하는 바다.
나는 이 가을 세상 사람이 바삐 여기는 바에 게을러지고 세상 사람이 능히 게을리 하는 바에 바빠지고자 한다.
가장 지혜로운 동물은 동면에 드는 동물이다. 곧 서리 내리고, 뱀들은 바위틈으로 들어가 동면에 들겠다.
공중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달도 별도 싸늘하게 어는 밤이 오겠다.
천지가 난분분 날리던 흰눈에 쌓인 한밤중에 부엉이가 울고, 너구리가 사는 굴속에서는 너구리 새끼들도 추위에 떨며 잠들겠다.
1) 박문호, 『뇌, 생각의 출현』(휴머니스트, 2008). 박문호 박사는 전자공학 박사인데, 뇌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분이다. 지금은 한국전자통신 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며칠 전에 박문호 박사의 초청으로 대전에서 백북스 클럽 회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올라왔다. 강연장으로 가기 전에 박문호 박사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전에 박문호 박사가 보여주는 외서에서 사람의 몸에 퇴화된 기관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물고기의 아가미 흔적을 보았다. 놀라운 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