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운융창, 불법홍포, 국민 가내평안, 자손 공직진출 기원” 영선사 합동기일추모재 봉행 (음) 시월 십일 오전 09시 30분 “(계묘년(2023) 양력 11월 22일(수) 선망 조상(조상) 위로, 추모 기도”
효도(孝道) “孝”
오봉산 영선사(五峯山 靈仙寺)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2023년은 11.22 수(水))에 가정 내 조상의 합동제사로 인해 서운한 마음이 드시는 소중한 님, 후손이 없거나 방치되어 소외되신 외로운 영가님, 혹은 혼인을 올리지 못한 미성년으로 생을 마감한 사유 등 다양한 이유로 정상적인 본인의 기일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되신 선망 조상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영선사 ‘합동기일추모재(合同忌日追慕齋)’를 봉행합니다. 함께 하실 님들은 아래 안내를 참고하시고 동참해 주세요.
불교에서의 ‘효(孝)’는 산자와 망자 모두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법신 비로자나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대우주를 잉태하신 어머니이시기에 불교에서는 어머니의 은혜를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지장왕보살의 근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하늘은 여성들에게 아이를 잉태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습니다. 합동기재는 그 효를 행하는 일의 한 가지임을 잊지 마세요.
참고삼아 아셔샤 할 점은 가정에서의 9.9재(구월구일재 9.9)는 우리 민족 명절의 하나로 그 제사를 받는 주인공은 임자 없는 조상이 아니라 가내의 신중님들이라고 합니다. 명절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제사 의식도 그러하답니다. 가내 성중님들이 먼저 받으신 이후 그 분들의 허락하에 조상영가님들이 받을 수 있답니다. 물론 가내 성중님들은 넓은 의미로 조상님 속에 들어가긴 합니다만 급이 다릅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가정에서 차례, 제사 등을 모실 때는 이점을 잘 기억하시고 이런저런 불평불만이 표출하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영선사의 ‘합동기일추모재’는 본래부터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목적으로 개설 되었는데요 그 취지에 맞게 잘 운용되고 있습니다.
-일 시 : 양력 11월 22일(수) 오전 9시 30분 합동기일추모재 봉행(음 10월 10일) -장 소 : 영선사 영산전 법당 -준비물 : 기도비와 백미 2되 -기도비 : 기본 동참 기도비 및 공양, 설판재자
(설판과 공양 동참님들은 별도로 영가님 외에 생축, 가족 축원이 올려집니다.) (그 외 동참자 생축은 별도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햅쌀 2되를 영선사에 부탁하는 준비 가격은 1만원이며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올렸던 음력 10월 제천행사(祭天行事)의 의미를 살리고자 함입니다.)
☛접수신청 : (안내문 받으시고 바로 신청해 주세요) ☎010-3681-1201(대성보살)// 063-636-2195 이메일 : jakbup@hanmail.net
☛온라인구좌 : 송금계좌는 (우체국 400960-01-001394 (조계종 영선사)) 사찰로 보내는 모든 기도비 송금, 송금자 뒤에는 모두 '기도'라고 통일해서 적어주세요. -------------------------- 요즘 세상이 이상해져서 과자봉지에 마저도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라’ 이따위 쓰레기 같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과거 조선 선조 때 이 땅에 ‘임진정유(壬辰丁酉) 조일7년전쟁(朝日七年戰爭),
(흔히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일본을 얕잡아 본 것으로 명칭을 바꿔야 합니다. 저 두 전쟁은 정식 국가간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전력은 충무공 이순신 지장보살 화신께서 판단하시길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력 차이는 5대 1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지면서 ‘전국시대(센고쿠 시대,戦国時代)라 불리던 시절이었는데 일본 전체가 내란이 있은 뒤 통일을 한 상태였기에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충무공이 꺾지 않았다면 일본은 세계를 정복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이것을 겪으신 서애 유성룡선생은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년에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책의 제목은
"나 지난 일 뉘우쳐 훗날의 근심을 삼가하리(조심하리라)(予其懲而毖後患)“
라는 ‘시경(詩經’‘주송(周頌)’편‘소비(小毖)’라는 시가 그 출처라고 합니다.
서애선생은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뼈아픈 경험을 하셨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앞날의 국가와 개인적 과오를 책에 적으셨습니다. 그것을 줄였더니 시경 주송편의 ‘소비’라는 시였다는 거죠. 이것을 요즘에는 ‘징전비후(懲前毖後)’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말하기도 합니다.
‘징비(懲毖)’... 제목 자체만으로도 오류가 있던 앞을 통렬히 반성하여 기록한 책인데 왜 반성을 했겠습니까? 당했더니 너무 아프더란거죠. 뒷 사람은 그러지 말라고 글을 남기신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잠시 왔다 가는 곳입니다. 길어야 100년인데 그게 무어 그리 소중하겠습니까? 인간의 삶이 끝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과거-현재-미래’가 연속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무슨 대단한 존재입니까. 당연히 그 법칙 속에 있죠. 지금의 삶은 다음 생을 위한 준비기간이에요. 불가마에 넣어둔 도자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도자기죠. 그거 그냥 완성 되는거 아닙니다. 불, 공기, 습도... 이런거 잘못 맞추면 슬모 없이 됩니다. 중간에 불때기 멈추고 가마 열어버리면 모조리 절단 나는거죠. 그게 ‘자살’입니다.
물로 그 과정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종교라해서 모두가 욿은거 아니고 스님이라해서 다 같은 스님 아닙니다. 올바름의 기준은 뭘까요? 불교는(우주는) 시비(是非)가 기준이 아니라 선악(善惡)이 기준입니다. 그리고 선악은 공동체를 우선시하냐 아니냐로 판별합니다. 이것을 일러 불교에서는 예불문(禮佛文)에 박아놨습니다.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이것을 풀어쓰면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남을 위해서도 아닌 우리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자.“ 이게 됩니다.
--------------- 추가로 서애 선생이 지으신 징비록의 서문은 전체가 서애선생의 글이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이상한 문장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요. 뒤의 본문과 당신의 전쟁을 치루고 낙향하시면서의 삶의 모습을 보면 징비록 서문하고는 전혀 안 맞습니다. 그러니 이건 필시 누군가 가필(加筆, 조작)한건데요 성중님께 여쭈니 맞답니다. 그런데 그 중 당신이 직접 남긴 내용이 바로 제목 부분이라고 해요. 그건 직설이랍니다. 그래서 그걸 좀 알아보겠습니다.
알려드렸듯이 서애선생은 예전(현생 인류 이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에 나셨던 부처님의 진신으로 지장보살의 화신이신 충무공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오신 분입니다. 실제로 일평생을 충무공과 궤를 같이하셔요. 그 부처님이 ‘징비(懲毖)’를 책으로까지 남기셨으니 우리는 깊이 새겨 들어야 합니다. 조일7년전쟁을 예로 들셨지만 우리의 인생, 이시대의 우리로 가져와서 ‘징비(懲毖)’하셔야 합니다. -------------- "나 지난 일 뉘우쳐 훗날의 근심을 삼가하리(조심하리라)(予其懲而毖後患)“ ‘시경(詩經’‘주송(周頌)’편의‘소비(小毖)’라는 시. 그 숨은 내용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평정한 후 죽고 태자 송(誦)이 즉위했고 성왕(成王)이라합니다. 성왕이 나이가 어리고 나라가 아직 체계가 안 잡혀 숙부였던 주공(周公)이 제후들이 배반할까 두려워하여 왕을 대신하는 섭정(攝政)을 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나라(殷墟(은허), 중국에서 상(商나라라 부름. 성중님께서 본래 발음은 ‘ᄋᆞᆫ’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쪽나라라는 의미.)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의 나라입니다. 동이족 제국이 중국 한족이 세웠던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한 것은 은의 30대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妲己)라는 여성에게 빠져 국정소홀하고 간신배들이 설치고 그들에 의해 폭정이 실시된 탓입니다. 알려지기는 주왕이 폭정을 했다하지만 그것은 승자의 기록이고 주왕은 폭정을 안했고 간신배들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징비(懲毖)해야 할 일. 당시 주나라는 큰세력이 아니어서 은의 백성들에게 자기를 낮추고 포용하려했다고 합니다.)
주공의 형제인 관숙(管叔), 채숙(蔡叔)은 은나라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과 결탁하여 주공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는데 아직 어린 성왕이 차츰 그 말을 믿어 주공을 의심하게 되었고 주공이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성왕의 곁을 떠났다고 해요.
주공이 물러나자 관숙과 채숙 등은 반란을 꾀하였고 성왕은 그때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급히 주공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해요. 주공이 돌아와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섭정을 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물러났다고 합니다. 나중에 성왕이 이 일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면서 여러 신하들 앞에서 시를 썼는데
-나 지난 일 뉘우쳐 훗날의 근심을 삼가리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스스로 꿀벌을 손에 놓고 만지다 아프게 쏘였지만 늦었다 막여병봉자구신석(莫予荓蜂自求辛螫) -저 뱁새가 크게 되어 움직여 날아 공격을 당했는데 조윤피도충연비유조(肇允彼桃蟲抁飛維鳥) -집(국가)은 어려움이 많아 견디기 어렵고 나도 또한 아픈 괴로움 속에 있구나 미감가다난여우집어요(未堪家多難予又集於蓼)
이내용이고요 이것을 소비(小毖)라는 시라고 부르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