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키건의 『전쟁의 얼굴』, 병사들 경험 생생하게…‘전쟁의 민낯’을 포착하다
승패 요인보다 실제 전투 모습·병사의 심정 등에 집중
“무기체계 변해도
궁극적으로 보병에 의해 결정” 주장
전투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결국 ‘의지’가 가장 중요
제임스 피들(James P. Peadle, 1863~1947). '솜 전투: 얼스터 사단의
공격'. 캔버스 유화. 벨파스트 시청 소장
기사사진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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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스터 사단의 돌격 - 영국의
36사단은 모두 아일랜드 얼스터 출신의 신교도로만 구성된 자원부대(당시 국방장관의 이름을 따 '키치너'부대라 불림)로 '얼스터 사단'이라
불렸다. 첫날 돌격에서 독일군의 두 번째 참호선까지 진격하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처음 이틀 동안 5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참혹한
공격이었다. |
전쟁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책은 승패의 요인을 찾는 데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양측의
전력이나 전투의 전개과정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다. 정작 실제 전투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병사들은 어떤 심정으로 전투에 참여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은
찾기 힘들다.

영국의 저명한 군대역사학자 존 키건(John Keegan·1934~2012)이 1970년대에 저술한 이 책은 전쟁의 생생한 민낯을
보여준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쟁을 다룬 많은 책들이 어떤 장군이 어떤 전략과 어떤 정신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지 잘 분석하고
있지만, 실제 전투에서 '어떻게' 궁수가 중갑 보병을 물리쳤는지, 병사들은 '왜' 총알이 빗발치는 적진을 향해 돌격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극단적인 위험에 처해 있는 병사의 입장에서 볼 때 전투의 본질은 '개인의
생존'이다.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용감하게 싸워주기를 바라겠지만 한 번 전열이 무너지고 나면 오합지졸로 변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지휘관의 '승패 위주'의 가치체계는 부하들의 관심과 무관하거나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저자는 그래서 실제 전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병사들은 어떻게, 왜 두려움을 억누르고, 부상을 처치하며 죽어가는지를 말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통해 '전쟁의
민낯'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투 경험의 상이함
저자가 선택한
전투는 아쟁쿠르 전투(1415), 워털루 전투(1815), 그리고 솜 전투(1916)다. 샌드허스트(영국육군사관학교) 교수답게 영국군이 프랑스
원정에서 치른 역사적 전투를 골랐다. 이들 전투는 각기 다른 무기체계(장궁, 화승총, 기관총과 대포)를 대표한다.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전투가 벌어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는 아쟁쿠르 전투를 12개의 주요 사건으로 구분하고 이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면과
가능한 형태를 세밀히 분석한다. 이를테면 양측의 대치 거리는 장궁의 사거리(230m)를 감안해 230~270m 정도 되었을 거라 추론한다. 이는
프랑스 기병이 시속 20~24㎞로 달릴 경우 약 40초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는 것이다. 영국 장궁병이 10초에 1발씩 쏠 경우 3발 정도
발사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프랑스 기병이 눈앞에 왔을 때 숨겨둔 말뚝 뒤로 물러섰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식이다. 140㎏이
넘는 기마가 최고속력으로 돌진할 경우 갑자기 등장한 날카로운 말뚝 앞에 멈춰 서기에는 너무 늦다. 선두에 선 말들은 말뚝에 찔려 고꾸라졌고
뒷줄의 기사들은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기병대가 가하고자 했던 충격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충격이 먹혀들지 않았을 때 공격
측이 오히려 그 반동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다분히 심리적이다.
키건은 워털루 전투에서 무적의 프랑스 근위대의
퇴각을 세밀히 분석하면서 전장에 선 병사의 불안을 부각하고 있다. 문제는 전술의 실패에서 출발했다. 영국은 선형의 횡대 전열로 화력을 집중시킨
반면, 프랑스군은 종대(縱隊)로 진격했다. 종대는 전열의 화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상대 사격에 둘러싸일 위험도 컸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초기
공격에 큰 피해를 보았지만 괴멸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후미였다. 전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후미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충돌음과 고통스러운 외침, 그리고 급박한 진동에 휘말려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분석은 합리적 추론이나 심리적
분석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장에서 부상했거나 죽음을 감당해야 했던 병사의 고통까지 쓰다듬는다. 1916년 7월 1일 7시30분 개시된 솜 전투는
이날 하루에만 6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이 중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후송돼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살아날 가망이 있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양측 참호 사이에서 2~3일씩 방치되면서 그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저자는 전투에서 발생하는 부상과 그로
인한 고통을 세밀히 묘사하면서 전투의 참혹한 얼굴을 드러낸다.
전투의 본질은
변하는가
500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 발생한 전투는 상이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활과 총, 대포와
기관총은 발사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전술적 운용과 살상력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전투의 모습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전쟁의 얼굴을
보여주기로 한 저자의 목표는 어쩌면 그런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보편적 용어로 치환할 수 없는 개별 전투의 개성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전투의 본질은 시대와 함께 변하는 것일까? 저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있지만 인간에게
본질적 동질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전투의 본질 또한 있다고 말한다. 우선 변화를 인정한다. 새로운 기술 발달로 무기체계의 변화는
싸우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아쟁쿠르의 프랑스 기병이나 솜의 영국군처럼 새로운 무기와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참혹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궁극적인 전투는 보병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첨단 무기가 사용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결국 보병이 투입돼야 했다. 보병 간 전투에서 승패가 결정된다면 결국 '전투 의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못지않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영국군이 끝끝내 전열을 유지한 것은 강고한 전투 의지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의지 자체는 심리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형성되는 데는 역사적 전통, 사회적 구조, 문화적 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또한 기억할 만하다.
서론 격인
1장은 군대역사학에 관한 다소 지루한 논의를 담고 있어 역사학자가 아니라면 뛰어넘어도 될 것 같다. 3개의 전투를 다루는 본론은 매우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비교 분석이 많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다. '미래의 전투'를 다룬 5장은 다소 논쟁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만, 진지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 전투가 어떤 모습을 띨지 궁금해하는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