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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 고통입니다. 마치 불청객 같습니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불시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한 바탕 휘저어놓습니다. 또한 고통의 강도가 셀 때나 오래 지속될 때, 우리네 삶은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모릅니다.
고통의 종류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질적 가난으로 인한 고통, 나와 다른 그로 인한 고통, 즉 존재로 인한 고통, 병이나 장애로 인한 고통, 이유를 끝끝내 알수 없는 고통, 노화나 죽음으로 인한 고통...
마치 큰 산 하나를 종주하는 느낌입니다. 고통의 산봉우리를 하나 겨우 넘어섰다 싶었는데, 또 다른 산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고통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언제쯤 끝날 것인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고통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고통 겪고 있는 우리 곁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비록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봄바람에 눈 녹듯이 순식간에 없애주시지는 않지만,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시며 우리를 위로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고통이 끝나는 길목에 고통을 잘 견뎌온 댓가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축복과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그 누구도 고통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 만나봤지만, 고통이 하나도 없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못만났습니다.
결국 고통은 우리네 인생의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관건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보다 큰 시선, 영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에 반드시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16,20-23ㄱ
성체성사 때 내가 만나는 예수님은 부활 전인가, 후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부활 제6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이별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그들이 겪게 될 슬픔과 혼란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해산할 여인이 출산의 고통 중에는 근심에 싸이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지금은 근심하겠지만 부활하신 당신을 다시 만날 때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16,21-22 참조)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묻고
대화하고 싶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단순히 질문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의심과 불안이 해소되고 충만한 신뢰와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의심의 단계를 지나 하느님 현존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체성사와 성령께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주인공 브루스 놀란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어려움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불평하는 지역 방송국 기자입니다.
그는 중요한 뉴스 진행자 자리를 놓치자 길거리에서 하느님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내 기도를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나를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한 거냐고요!"라며 소리치고, 심지어 하느님을 향해 조롱과 시험의 말을 쏟아냅니다.
마치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정말 당신이 전능하다면 내 삶을 이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하느님을 시험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하느님께서 브루스 앞에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브루스의 불평에 지쳤다며, 그에게 당신의 모든 권능을 일주일간 맡겨볼 테니 한번 세상을 다스려보라고 제안합니다.
신이 난 브루스는 처음에는 이 엄청난 능력을 자신을 괴롭혔던 동료에게 복수하고, 직장에서 성공하며, 애인의 사랑을 얻는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합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강력한 장난감을 얻은 것처럼 신기해하며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 합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는 모든 기도에 "예스"라고 답해버려 세상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집니다.
복권 당첨자가 수만 명씩 나오고,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아무리 전능한 힘을 사용해도 진정한 사랑, 특히 연인 그레이스의 마음을
강제로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레이스는 그를 떠나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게 된 브루스는 절망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진 채, 다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적은 세상을 뒤흔드는 거창한 능력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작은 친절을 베풀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거나 하느님을 시험하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내려놓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브루스는 비로소 내면의 평화를 찾고, 떠나갔던 그레이스와도 진정한 사랑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있을 때는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에 관해 묻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문득 지금의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실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던 때, 저는 직접 “어머니, 정말 제 어머니 맞으세요?”라고 묻지는 못했지만, 마음속 질문은 늘 그것 하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때는 ‘그래, 역시 우리 엄마가 맞아’ 하며 안도하다가도,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역시 친어머니가 아니어서 그런 거야!’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당신이 아침참으로 드시려고 아껴두셨던 따뜻한 단팥빵과 흰 우유를 제게 건네주셨을 때, 저는 그 사랑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다른 어떤 증거나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기쁨에 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때로는 그분을 시험하려 들기도 합니다.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번 일은 꼭 이루어지십시오!" 와 같은 조건부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시험했습니다.
물이 없을 때, 먹을 것이 없을 때마다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며 "주님께서 과연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탈출 17,7) 하고 시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내려주시고(탈출 16장 참조), 바위에서
물을 내시어(탈출 17,1-7; 민수 20,2-13 참조) 당신의 현존과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게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살아나게 하시는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민수 21,4-9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하느님 사랑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의심 없이 믿고, 당신과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사랑의 증표로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기념 예식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생명에 동참하는 거룩한 성사입니다. (1코린 10,16-17 참조)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 성체를 영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래, 너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느냐? 나는 너에게 내 전부를 주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저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의심하거나 여쭐 수가 없었습니다.
제 삶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랑의 확신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이 크신 은혜에 제가 어찌 보답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응답의 질문뿐이었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사랑이 너무나 명확했기에, 그분을 증명해달라고 다른 어떤 것을 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의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가, 예수님을 뵙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며 모든 의심을 떨쳐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그분과의 깊은 일치입니다.
이때 "이 은혜에 어찌 보답할까?" 하는 사랑의 응답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6,20-2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것이 부활 의미이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 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내가 희생과 고통을 바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바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바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바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1954년 전까지는 인간이 1마일(약 1.6km)을 4분 이내로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는 물론이고 의사까지 나서서 그 정도로 몸을 혹사하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대중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뢰도가 높은 전문가와 의료진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로저 배니스터가 1954년에 1마일을 3분 59초 4라는 기록으로 통과했습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한 선수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기록은 얼마 뒤에 새롭게 갱신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이 기록이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불과 3개월 만에 다른 선수가 두 번째로 4분의 벽을 깼고, 그 뒤로 2년 동안 무려 300명의 선수가 1마일을 4분 안에 주파하게 되었습니다. 전문가와 의사들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이 갑자기 강하고 빠른 존재로 진화한 것일까요? 아니면 폐활량이 커진 것일까요? 이것도 아니면 과학적인 훈련 방식의 새로운 도입 때문일까요? 정답은 자기 한계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에 머물면 안 됩니다. 한계에 머물면 불가능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한계에서 벗어날 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의 일은 모두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도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면서 원수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한계를 만들면서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이 가르침에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한계가 없음을 당신 부활로 직접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이로써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야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한계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계에 갇히면, 근심이 우리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커다란 기쁨 안에서 큰 희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만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만, 다른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있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창조된 모든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아니라 고통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할 때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은 우리 욕망의 무질서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행한 것은
우리가 받은 상처로 인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할 때까지
하느님의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산의 고통 뒤에 기쁨이 찾아오듯이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주님을 알게 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5.30.금."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22)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빼앗지 못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과
근심을 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슬픔이었고
사랑하는
제자들과의
이별은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체험하는
슬픔과 아픔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은 하나되는
현실이 됩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는
내면의 평화와
사랑의
생명력으로
우리를 가득
채웁니다.
십자가의
수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고난을 통과하며
더 깊어집니다.
기쁨을
주시는 분에게서
참된 기쁨을
배워나가는
참된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참된 기쁨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기에
평화가 있고
사랑하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듯
기쁨은
삶으로
살아내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살아가는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힘겨움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은총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납니다.
그 은총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