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여섯 번째 시집 『새의 얼굴』
타자의 얼굴과 시선에 응답하는 ‘얼굴의 윤리학’, 그 안에 스민 지극한 연민과 휴머니즘…
198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윤제림 시인이 『그는 걸어서 온다』 이후 5년 만에 찾아왔다.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이홍섭 시인은 전작의 해설에서 “윤제림의 시는 누구보다도 세간(世間)의 윤리를 중요시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낸다”며 “그의 시가 연기론의 무상성에 기반하면서도 쉬이 빠지기 쉬운 허무로 기울지 않는 것은 세간적 삶의 중요성과 가치를 누구보다도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그동안 보여준 ‘낡거나 모자란 것’에 대한 관심, 연기론(緣起論)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삶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담으면서도 타자의 얼굴과 시선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응답, 익숙한 풍경의 바깥을 향한 관조와 통찰을 더욱더 농밀하게 보여준다. 특유의 이야기성이 강한 시들 역시 만날 수 있다.
『새의 얼굴』은 총 67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담겼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여행에 관한 시편들이 적지 않은데, 1부에 포진한 여행지는 2부에서 4부로 흘러가면서 자연 일반과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김소월, 박목월, 오규원부터 배병우 함민복까지 실존인물에 대한 회상과 인연에 대한 소회로, 마지막 4부에서는 별주부, 토끼 부인, 이몽룡씨 부인 등 시인 특유의 상황극적 시로 이어지며 의미와 논리로 가득 찬 세계를 일순간에 뛰어넘는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내가 살을 빼야 하는 이유
예토(穢土)라서 꽃이 핀다
설산 가는 길
설산 가는 길 2
설산 가는 길 3
안나푸르나 저녁놀
타클라마칸
낙타
물위의 학교
섬
섬 2
수몰(水沒)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은각사 가는 길
풍력발전
소나무는 언제나 절벽 위에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곳
2부
국세청에 드리는 제안
산수문경(山水紋鏡)
목련꽃도 잘못이다
우리나라 악기
돌탑 꼭대기에 저 돌멩이
의자들이 젖는다
진달래
춘일(春日)
숙련의 봄
작년 그 꽃
동갑
오십 청년을 위한 사랑 노래-소순의 결혼을 축하하며
쉰
우리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
떠나가는 배
하구의 일몰
안씨의 공부
백두산은,
3부
새의 얼굴
고양이가 차에 치었다
제물포 봄 밀물
박영준씨의 위로를 받으며 교문을 나왔다
오규원씨의 집
시인 이성선
냉장고도 없는 사람에게
지나가던 사람이-배병우 사진
세검정에서 벽계수를 보다
오류 선생은 낮술을 마신다
함민복씨의 직장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행선(行禪)
미당(未堂)의 숙제
춤
4부
가야산 홍류동
살아남은 자의 슬픔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幢竿支柱) 2
부석사에서
매미
옛사랑은 라디오를 듣는다
터미널의 키스
미국에 가면 워커를 찾으시오
꽃을 심었다
별주부의 근황-화순 쌍봉사에서
토끼 부인의 망부가
곽씨 부인 소식
이몽룡씨 부부의 일일(一日)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후일담
해설 | 풍경과 얼굴
|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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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인도에 도착할 것이다, 길을 모르니
릭샤를 부를 것이다
체중 미달로 병역이 면제된
본희 형보다 가냘픈 사내에게,
꽃을 밟아도 꽃잎 하나 다치지 않았을
피천득 선생만큼 가벼운 남자에게
몸을 맡길 것이다
사내는 나를 옮겨 실으며
눈으로 물을 것이다
—뭐가 들어서 이렇게,
불룩하지요?
그러고는 옛날 서울역 지게꾼처럼
기를 쓰고 일어나며 페달을 밟을 것이다
릭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맨발의 사내는
혼잣말처럼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무겁지요?
—「내가 살을 빼야 하는 이유」 전문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방법 하나는
노래하며 걷거나
신발을 끌며 느릿느릿
걷는 것이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눈물을 훔치며
손목을 잡는 버드나무가 있을라
마침 흰구름까지 곁에 와 서서
뜨거운 낯이 한껏 더 붉어진 소나무가 있을라
풀섶을 헤치며 나오는 꽃뱀이 있을라
옛사랑은 고개를 넘어오는
버스의 숨 고르는 소리 하나로도
금강운수 강원여객을 가려낸다
봉양역 기적 소리만으로도
안동행 강릉행을 안다
이젠 어디서 마주쳐도 모르지
그런 사람 찾고 싶다면
노래를 부르거나, 신발을 끌며 느릿느릿
걸을 일이다
옛사랑은 라디오를 듣는다.
—「옛사랑은 라디오를 듣는다」 전문
자고 일어난 산이 거울을 보네
못물 가득한 논에 엎디어
제 얼굴을 보네
작년 봄 뻐꾸기 울 때 보고 지금 보네.
그새,
당신이 좋아하던 꽃은 지고
내 머리맡에 와 울던 새도 멀리 떠났지,
늙은 굴참나무는 아주 눕고
내 놀던 바위는 저만치 굴러가버렸지,
창식이 삼촌은 죽어서 올라오고
몇 마리 짐승은 길에서 죽었지.
민박집 뒷산이 거울을 보며 우네,
작년 얼굴이 아니네
이 얼굴은 아니네
고개를 흔들며 우네.
장화 한 짝과 막걸리 병과 두꺼비가 보이는
논두렁에서 산이 우네,
식전부터 우네.
건너편 솔숲에서 자고 나온
백로 한 마리가 무심코 논에 들어섰다가
죽은듯이 멈춰 서 있네.
산수문 흐려진 거울 복판에
서 있네.
—「산수문경(山水紋鏡)」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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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 충북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자랐다. 1987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삼천리호 자전거』『미미의 집』『황천반점』『사랑을 놓치다』『그는 걸어서 온다』 등이 있다. 2013년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인의 말
어깨에 고장이 생겨서, 한쪽 팔을 잘 쓰지 못한다. 당연히 다른 한쪽이 수고가 많다. 일 없는 이쪽 팔은 하릴없이 두 곱의 일을 떠안게 된 저쪽에 미안해서, 숨도 몰래 쉬는 눈치다. 가만히 매달려 있다.
팔이 둘인 것이 새삼 고맙다. 양팔이 날개가 아닌 것이, 내가 조류가 아닌 것이 다행스럽다.
어떤 시간이 와도 시절을 탓하지 않고, 어떤 세상이 와도 공밥은 먹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 시는 조화와 평화를 꿈꾼다.
2013년 12월
윤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