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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묵상글 ( 수호천사 기념일. - 하느님 없이는 천사도 없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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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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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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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0월 2일 수호천사 축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382006
김레오나르도 2020.10.02 03:24
- 하느님 없이는 천사도 없다.
수호천사 축일은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다가갈 주제가 아니라고,
특히 이 축일을 지내면서는 더욱 그렇게 접근치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로는 천사의 존재 그러니까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만 믿을 교리이고
천사와 관련하여 그 외 다른 주장은 믿을 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존재로 천사와 악마가 있는데
악마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존재인 데 반해
천사는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라는 의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천사 교리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천사를
실제로 만나는 것이고 그리하여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천사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천사란 우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파견된 존재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하느님을 떠나서 천사만 따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길을 가는데 길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누가 길을 가르쳐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천사라고 하고 고마워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우리는 믿어야 하고,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하며
그러므로 감사드려야 할 것은 그 천사뿐 아니라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사람을 보듯
천사의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 없이 천사를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존재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뿐 아니라
천사와 같은 수많은 존재가 있고, 그중에는 당연히 우리 인간도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천사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사람의 경우는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인데 그저 인간으로만 만나고,
분간을 잘못하여 천사를 악마로, 악마를 천사로 잘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는 확실하게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하느님께서 마련해놓으신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천사같은 악마일 수 있고,
악마같은 천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저에게 오게 하며,
하느님을 사랑케 해야 하는데 저를 사랑하는 것에 머물게 하는데
그 때 저는 무척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느님께로 가야할 분들을 제가 가로채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봤듯이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가 천사인데
이런 저는 정결하지 않고 천사일 수 없는 거지요.
같은 뜻에서 저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분보다
제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저의 잘못을 꼬집는 분이 저에게 천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를 때에는 이 고마운 천사를 원수로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천사들, 특히 저에게 맞춤형 도우미와 수호자와
인도자인 수호천사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매순간 느끼는,
그런 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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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00달러 지폐 속 인물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났지만, 대단한 세계적인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로그램 기술 등을 발명했습니다. 더군다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64년 동안 기록하고 실행한 13가지 덕목을 기본으로 하여 디자인한 시스템 다이어리로도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대부분 땅딸막하고 뚱뚱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100달러 속에 있는 노년의 프랭클린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제 키는 177cm로 그 당시에는 장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평생 꾸준히 운동해서 아주 단단한 근육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갈색 눈동자에 숱이 아주 많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100달러 속에 있는 인물과 왜 다를까요? 몸 좋은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이 좋을 때는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노년의 벗겨진 머리, 많이 나온 배만 두드러집니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성형도 하고, 또 명품으로 온몸을 감싸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큰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외모보다 삶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그 삶을 기억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말입니다.
예수님도 세속적 삶보다 영적인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면서 무시하곤 했었지요. 이렇게 보잘것없는 어린이가 오히려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른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가는 후회할 삶을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를 당신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큰 관심을 갖고 우리의 삶을 기억해 주십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누구의 수호천사로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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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이란 이어달리기와 같아. 내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건네지(발레리 폐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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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재가 존귀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냐?”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오늘,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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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태초부터 사탄과의 싸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실수나 잘못을 거울삼아 나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면 내 부족함을 챙겨봅니다. 누군가의 꾸중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내가 그 꾸중을 듣는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를 접하면서 저의 무뎌진 마음을 질책합니다. 나 자신을 보고, 또한 상대의 부족함을 어떻게 보완해 줄까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맑고 밝은 순수함은 그다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이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순진무구, 천진난만,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 수 배우시길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마음의 품이 넓어서 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 처리 능력이 있습니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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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얻는 쾌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흡연, 음주, 도박, 마약과 같이 중독성이 있는 것은 웬만한 결단으로는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도 있습니다. 특히 집단적인 선택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처음 전투에서 1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라도 정치인들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었으면 더 큰 피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12번의 전투를 더 벌였고, 700,00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나서야 전쟁을 끝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시청사 건물을 4000만 파운드를 들여 2년 안에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건설사는 비용이 더 든다는 이유로 예산을 청구했고, 시간도 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가 건설사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면 더 큰 손실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수렁에 빠져들 듯이 예산을 쏟아 부었고, 4억 파운드를 들여 5년이 지나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년 전에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1년 전에 해병 순직 사고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해서 군의관과 공공 보건의가 파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잘못하면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손 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발이 잘못하면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발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눈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책임자를 문책하고, 진실을 파악하고, 잘못된 것에 대한 사과가 있는 것입니다. 국회는 야대여소로 구성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행정부는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쌓여 있는 국가의 현안을 풀어가야 합니다.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분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가 가는 모든 길을 지켜 주시리라.” 누가 천사일까요? 아첨과 아부로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은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권력의 동아줄에 의지하려는 사람도 결코 천사가 압니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권만 챙기려는 사람도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연말연시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군인들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웃을 위한 나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눔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해도 함께 나누고, 잔치가 있으면 이웃을 초대하였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위해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전에 농경시대에 있었던 방식의 나눔이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나눔의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에 있는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 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수호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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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함께하고 있다고 교회는 말합니다. 즉 우리 옆에도 우리 개인의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수호천사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수호천사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고 그 위험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수호천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어두운 마음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할 때 수호천사는 우리에게 빛의 길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두운 길이지만 막대한 이익과 무언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이고, 또 하나는 빛의 길이지만 이익은 소소하고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길입니다.
그때 어둠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눈 한 번 딱 감고 지나가면 편해질 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수호천사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어둠의 길은 나중에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수호천사는 우리의 기도를 하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가 미사를 봉헌할 때 우리 옆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하늘로 옮기는 일. 즉 우리의 기도편지를 하늘로 배달하는 집배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아 우리 곁을 지켜주는 천사에게 기도로써 고마움을 표현하면 어떨까요? 늘 내 옆에서 빛의 길로 인도해 줘서 고맙다고... 내 기도를 하늘로 잘 배달해 줘서 고맙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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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크기
세상은 돈의 크기를 영(0)의 개수로 말합니다.
그런데 삶을 살다 보면 돈의 크기가 꼭 0의 개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의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푼돈에 불과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의 개수가 적어도 큰돈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큰 결심이 필요한 돈이 큰돈이다.’
이 말은 돈의 크기에 대한 기준을 속적인 것이 아닌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마음의 크기가 돈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큰 결심으로 사용된 돈은 그 영의 개수와 상관없이 큰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작은 결심으로 사용된 돈은 작은 돈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늘 큰 결심으로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큰 결심으로 하느님 나라에 큰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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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길 위의 종교, 길 위의 그리스도, 길 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삶”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살게 할 좌우명시입니다. 선물처럼 찾아온 시입니다. 산은 ‘불암산’을,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강론 쓸때가 바로 주님앞에 서듯 하루중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날마다 기록을 남기듯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수도원은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지이자 세상의 축소판같은 곳입니다.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도 세상 공부가 가능한 곳입니다. 12세기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성 벨라도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책은 우리 체험의 책이다. 내 매일 삶의 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배울 때 전체를 한눈에 파악해서 매일의 일을 잘 통합하여 일관성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만이 렉시오디비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하루도 렉시오 디비나 대상의 또 하나의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될 아직은 미완(未完)인, 하루하루가 내 삶의 성경책 1쪽입니다. 어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형적인 가을이었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흰구름 가을 하늘보며 배밭사이 산책중 떠오른 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늦게 까지 수도원 초창기부터 수도원 제반 공사시 많이 봉사한 포크레인 기술의 달인, 요한 형제가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길 보수에 정성을 쏟고 있었습니다. 신고배 수확이 끝난 창고에 들리니 엄청나게 큰 배들에 경탄했고 부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저절로 나온 시입니다.
“배가
엄청나게 크다
밤낮
쉬지않고 컸구나!
나는
그동안 뭘했나?”
살아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배나무들이요 밤낮 쉬지 않고 큰 배들이 놀라웠습니다. 얼마전 루벵 대학교수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도 일부 생각났습니다.
“약자들을 배려하는 연민가득하고 포용적인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라. 이 불꽃이 내내 살아 있도록 하라; 영역을 확장하라! 쉼없는(restless) 진리 추구자들이 되라. 너희들 열정이 쇠퇴함을 허용하지 말고, 지적 무기력함에 항복하지 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욥이 그러합니다. 쉼이없이 참으로 치열히 한결같이 주님을 섬겨온 욥이요 예수님입니다. 훌쩍 뛰어넘어 욥기 9장을 공부하지만, 시간되면 생략된 4-8장까지 읽어보세요. 욥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왜 그토록 하느님의 신뢰와 인정을 받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아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신심깊은 욥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가 이런 엄청난 하느님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음도 평소 쉼없이 주님을 섬기고 공부하며 살아온 내공의 결과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중에 있는 예수님께도 이런 내공을 느낍니다.
길 위의 주님이요, 길 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은 집이 없었던 길 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길들(other Ways)에게 열린 길(the Way)이었습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예수님과 당신 일행의 집에 계시는 모습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새삼 ‘길 위의 그리스도(Christus Viator)’, ‘길 위의 인간(homo viator)’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길가는 사람인 구도자는 ‘정처없는 방랑자’가 아니라 ‘정처있는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문득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가 생각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끔은 이런 나그네 되어, 하느님 찾는 나그네 되어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생활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주의 ‘뿌리(root)’와 내적 여정의 ‘길(route)’이 공존하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하느님 기다리는 정주의 산이요,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물길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이어야 안주가 아닌 진짜 정주의 삶이 됩니다.
참으로 뿌리와 길의 모순을 절묘하게 살아내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요 예수님과 당대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끊임없는 주님을 향한 길 위의 삶이지만 정주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내린 삶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와 부활의 도상이라는 아주 절박한 시점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역시 길을 가는데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나 이제나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세 경우의 주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평생 화두가 됩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삶이 변질되고 타락했는지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 뿐이 없습니다.
1.“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
하느님만을 정주처로 한 나를 과연 따를수 있겠느냐며 첫째 사람의 요구를 은연중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결코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절실하게 살아내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2.“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두 번째 나를 따르라 할 때 아버지의 집에 가서 먼저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자에 대해 에둘러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절박성을 앞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모르는 죽어있는 이들에게 장사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목표는 단 하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3.“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 번째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추종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참 냉혹해 보입니다. 역시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절박한 삶에 부수적인 것들은 생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 지향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주옥같은 말씀은 무뎌지고 세속화되는 우리를 부단히 일깨우는 평생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뿌리의 사람이자 길의 사람이 되어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줍니다.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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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어진 눈길>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땅에서
우리에게 닿은
우리의 천사들의 눈길은
하늘에서
하느님께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하느님께 닿은
우리의 천사들의 눈길은
땅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지지요
땅에서
우리의 천사들에게 닿은
우리의 눈길은
하늘에서
하느님께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우리의 천사들에게 닿은
하느님의 눈길은
땅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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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순진한 어린이로 돌아가라
주님께서는 우리기 어린아이의 본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육체와마음의 악덕을 어린 아이의 순진함으로 없애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귀 기울임의 신앙을 통해 믿음에 든 모든 이를 어린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린이는 아버지를 따르고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재산에도 관심 없습니다. 교만을 모르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을 믿으며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가 습관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몸에 벤다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이 우리에게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의 아름디운 겸손을 지니
게 될 것입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권의 책을 쓰면서 인간 존재들애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인간은 실체적 형상이 들어 있는 한 사람과 똑같습니다. 이 형상은 사람에게 존재와 생명을 주며, 지성의 기능을 지닌 피조물 - 여기에는 천사들이 포함된다 - 이든 지성이 없는 피조물 - 여기에는 모든 질료적 피조물이 포함된다 - 이든 간에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와 생명을 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사들이 이데아와 형상을 지닌 모든 피조물을 지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각각의 것 자체를 지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천사들이 이러한 지적인 통찰력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도 지성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의 이데아와 형상을 낱낱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속해 있어서, 그들을 사람답게 한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것이 최고의 의미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 인간 존재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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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는 동물들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어딘가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한 마리의 개와 한 명의 아이에게서 배운 것을 예로 든다. 그는 이들에게서 에너지와 존재를 깊이 공유하는 것을 배웠다고말한다.
“내가 사막에 홀로 있어 두려움을 느낀다면, 나는 한 아이가 나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는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합니다. 나와 함께 있어 줄 아이가 없다면, 나는 적어도 한 마리의 동물을 데라고 가서 위로를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검은 표지의 책 속에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자들이여, 그대들을 돕도룩 한 마리의 동물, 한 마리의 개를 데려가십시오. 그러면 그 동물 안에 있는 생명이 그대들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이는 평등이 만물에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명 자체의 힘”과 “만물에게 힘을 주는” 평둥에 대한 탁월한 증언이다. 이 증언으로 엑카르트는 만물의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만물이 평등한 까닭은 그들이 하느님, 곧 존재의 신성한 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엑카르트의 이 이야기를 한 젊은 목사와 함께 나눈 적이 있다. 그가 답례로 해 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 부부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을 아주 싼값에 장만했다고 한다. 그 집에 입주한 첫날 밤에 그들은 두려움과 기분 나쁜 느낌 때문에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밖으로 나가 지신들의 어린 아기를 안고 와서 자신들 사이에 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그날 밤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기가 그들과 그들의 새집에 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하다.
우리가 다른 피조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근원과 그들의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을 낳을 때, 아버지께서는 나도 낳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흘러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뿌리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공통 조상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고 만물의 형제애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느끼고 인식한다." 존재의 원 안에서, 중심점은 원둘레의 다름 모든 점과 같은 거리에 있다. 이 중심점이야말로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존재의 원초적 근원이다. 엑카르트는 인간 우월주의와 생물 우월주의를 배격한다. 그는 피조물 전체가 신적인 평등을 똑같이 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평등하다. 실로 이 평등은 하느님이 자신을 비웠기에 기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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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마태오 18,10)
예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저도 학생들과 마니또 게임을 통해서 자신이 뽑은 형제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하고 말없이 도와주다가 어느 정한 시기가 되면 미리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내가 바로 너의 수호천사였다, 하고 고백하도록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수호천사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는 사실이 삶에 큰 위로와 힘이 되리라 봅니다. 또 누군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수호천사임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가 잘되길 바라면서 살아갈 때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본인 역시도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호천사가 분명히 누구인지 알지는 못해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어느 분의 묘비에 ‘당신의 나의 천사’였습니다, 라는 표현을 보면서 더 실감 나게 다가왔었습니다.
사실 과거보다 현대에 들어와서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존재마저 의심하는 경우가 많음을 느낍니다. 어느 분의 표현에 의하면, 이런 현상은 성전 건축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중세기부터 근대 이전에 봉헌된 유럽의 성전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천사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이 요즘 현대식 성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저도 안식년 동안 유럽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러더군요. 이는 곧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행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오늘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하고 외치면서(묵4,8) 성인들과 함께 천상 예배를 드리며, 지상에서도 수많은 영혼과 함께하여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 미사 감사송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클레멘스 10세 교황(1670-1676)은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온 교회가 기념토록 하였습니다. 수호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히1,14)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호천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위험과 악마의 해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며, 선한 생각과 관심을 불어넣어 주며,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 대전에 올려주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시선에서 시편 8편을 음미하면서 들어 보도록 합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8,5.7.10) 오늘 수호천사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섭리와 배려에 감사하면서 늘 수호천사들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에 힘입어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로서 품위와 존엄함을 잃지 않도록 깨어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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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수호천사와 함께 하느님 영광 드러나도록 /
박윤식 [big-llight] 2024-10-01 ㅣNo.176463
10월 2일은 수호천사를 공경하는 축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의 동반자, 보호자로 천사를 보내셨는데, 그는 각자의 여정을 지키고 보살피는 역할을 한다. 이 일을 하는 영적 존재를 수호천사라 한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따라 우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가는 길마다 우리를 단단히 지키고 시중들며, 때로는 하느님께 기도도 전달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에 놓일 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수호천사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이렇게 그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러 주면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는 하느님 분신이기에.
교회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사들의 존재를 신앙교리로 선언했다. 그러나 천사들의 구체적인 것은 구분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이외의 다른 천사의 이름은 금한다. 따라서 천사들의 축일도 세 대천사 축일(9월 29일)과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만을 정해 천사 공경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호천사는 우리를 우리가 믿는 그분께로 이끌면서 죄의 유혹에서 보호한다. 예로부터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께서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지키고 도와주게 하셨단다. 그게 다 그분만의 각별하신 사랑이셨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자신들의 수호천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이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이다. 또 누구나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기에. 그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자신들의 천사를 기억하자. 그리고 이 어려움 겪게 하는 것도 그분 뜻임을 받아들이자. 우리가 비록 의식 못해도, 천사는 늘 내 앞 밝히고 마련한다. 먼저 움직이시고 먼저 배려하시는 이가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그러기에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해도 우리를 보호하는 수호천사는 있다. 이렇게 그 천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면서, 우리를 악에서 선 쪽으로 되돌리며 우리를 늘 그분 곁에 두려한다.
따라서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특사를 임명하셨다. 그래서 그이를 보호하며 이끌도록 하셨다. 수호천사는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존재이면서, 우리의 기도를 그분께 전달해 주고,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나는 모든 악과 불행에서 지켜 주면서 우리가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따라서 모든 이가 수호천사를 모시고 있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내 수호천사의 인도를 바라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수호천사는 하느님 곁을 떠나려하는 우리를 늘 지켜주신다.
어쩌면 천사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역할일 게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맡기어 준 임무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때, 우리도 수호천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이리하여 하느님 손발이 되고 목소리가 되어 이 세상 모든 이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면서 그분 말씀을 전하고 현존을 드러낼 때, 우리도 지상에서의 천사와 같은 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큰 천사가 아닌 작은 천사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작은 소망’으로 살아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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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수호천사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들 곁에 천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이들, 그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 있는 천사들과 하느님 때문에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까요?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할 때는 언제나 그를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바라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의 근거를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근거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형 폐지 문제로 가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생명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은 그의 ‘뒤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복음의 작은 이들에게 돌아와 봅시다.
그 작은 이들이 어린이들이나 겸손한 이들만이 아니라 사회의 많은 사람이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흉악범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또는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이들, 나와 맞서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들에게도 그들을 돌보는 천사가 있습니다.
저런 인간을 왜 천사들이 돌보느냐고 투덜거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천사들의 돌봄에 감사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천사들에게 이끌려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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