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선조들의 생활 지혜들에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콩을 삶아 으깨어 메주 덩어리로 만들어 한 1년쯤 공기 잘 통하는 처마 밑에 메달아 두면 콤팡이가
생기고 이 메주를 장독에 물과 소금을 풀어 발효 시키면 된장이 되어 긴요한 먹거리가 된다.
그리고 보리에 물을 뿌려 새싹이 나오게 키워 새싹난 보리를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쌀밥과 섞어 따뜻하게
띄우면 식혜 즉 단술이 된다. 이를 끓여 졸여서 엿을 만들기도 한다.
막걸리 농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밀을 좀 거칠게 가루로 빻아서 물에 으깨어 손벽 두께 정도에 한뼘
정도 크기로 둥글게 만들어 약간 어두운 곳에서 바짝 말리면 막걸리 발효 누룩이 되는데 이것들을 어둡고
건조한데다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막걸리를 만드는데,
밥을 질지 않게 꼬두밥으로 만들어 이 꼬두밥을 식혀서 누룩을 가루로 부셔서 꼬두밥과 골고루 섞어서
방구석에 장독을 들여 물을 붓고 담요를 덮어 따뜻하게 한 열흘 두면 막걸리로 발효가 된다. 물은 좋은
생수를 써야 발효갸 잘 된다.
쌀이 귀하던 시절에 밀가루를 쪄서 만들면 우리가 대학시절 학사주점에서 마시던 밀가루 막걸리가 되고
조를 쪄서 만들면 조껍데기 막걸리, 보리밥으로 만들면 보리 막걸리가 되기도 했다.
보통 이 술독을 내 작은 방에 두었는데 발효되는 과정에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술 익는 냄새를 내는데
보릿대를 빨대로 만들어 빨아 먹으면 달부래한 알콜 음료에 약간 취기가 생기기도 했다. 술이 다 익고
나면 위에 맑은 액이 고이는데 이를 떠낸 것이 바로 청주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청주를 떠내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막걸리 맛이 덜하기 때문이다.
술 익고 약 한달가량 두면서 필요할 때마다 퍼 내어 채에 물을 부으며 걸러내면 막걸리가 탄생하는데
물 조절하며 걸러 내리는 손맛에 막걸리 맛이 좌우된다, 막걸리 거르고 남는 술찌꺼미에 사카린을 타서
먹었는데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에는 약간 알콜 기운도 남아 있어 먹을 만 했던 것 같다.
먹다 남은 술은 식초에 부어 두면 막걸리 식초가 되고 양이 많이 남으면 걸러서 소주를 만드는데
막걸리를 가마솥에 붙고 솥뚜껑을 뒤집어서 솥꼭지 밑에 그릇을 밭치고 불을 때면 증기로 된 소주가
솥뚜껑 꼭지를 따라 그릇에 모이게 된다, 그러니까 간이식 증류주 소주 제조법이다.
농부들에겐 농주가 되어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고 수퍼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손님을 모시고 술상을
채리기도 하는 농가의 필수품 이었지만 문제는 인삼 재배, 담배 재배와 더불어 술 제조가 국가 전매품
이라서 세무서의 단속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거제 관할 세무서는 통영에 있었는데 양복을 입은 낯선 사람 두셋이 마을 어귀에 나타나면 먼저 본 사람이
뭐하러 온건지 뭐하는 사람인지 은근히 살피며 경계 태세로 들어가는데 밀주 단속의 기미가 보이면 모두가
농주를 담궈 먹는 탓에 이를 온동네에 알리는 비상 경보가 발령된다.
"술 치러 왔다아 ~~~"
"술 치러 나왔단다아 ~~~"
일 하러 나간 논이야 밭이야 온 마을에 울려 퍼지면 각자 자기 집으로 내달려서는 만들어 둔 누룩을
숨기고, (누룩이 적발되도 벌금을 낸다) 담아둔 막걸리는 푸세식 변소에 갖다 붓고 난리통이 벌어진다.
온 동네가 밀주단속 대비태세가 완벽했던 탓인지 우리 집은 한번도 적발되지는 않았었다.
우리동네 만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이 오십줄에 밀양에 잠시 살아 경고 밀양 동창회에 나가곤 했는데
고참 선배들이 대부분이었고 20회가 밀양 세무서장으로 부임해서 자주 참석을 했는데 선배들이 세무서장
보고 우스게 삼아 하는 인삿말이
"오늘 어디가서 술 치고 왔능교? ㅎ ㅎ ㅎ"
생탁이니 산성 막걸리니 국순당 막걸리니 지역 특성 막걸리가 많지만 나는 팔고 있는 어떤 막걸리도 잘
마시지 않는다, 어릴 때 어머님이 담궈 걸러 주시던 그 걸죽한 농주 막걸리만한 막걸리를 어디서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