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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한 권으로 보는 세계사2
(24)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뉴턴은 이미 17세기에 이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어렵다고 느껴지고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문제를 소상히 설명해 주고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죽던 그해(1642년) 크리스마스 날, 영국 링컨셔주 울즈소프라는 마을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이름은 아이잭 뉴튼, 몸무게 2㎏이 안 되는 미숙아로 첫돌이 지나서도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친구들은 그를 ‘시골뜨기’라고 놀렸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어 수학에 흥미를 갖기도 했고, 23살이 되자 어렵게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갔으나, 당시 페스트가 유행하여 학교가 문을 닫았으므로 그는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사과나무의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궤도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까?’하는 의문을 가진 것은 이 무렵으로 27세에 된 1669년 케임브리치 대학 교수가 된 그는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오랜 고립생활 끝에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발표했는데, 자신의 연구한 것을 종합한 것이었다. ‘중력’이란 원리로 전 우주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일관되게 설명했다. 즉 우주의 모든 천체와 입자는 서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에 비례하는 힘으로 끌어 당긴다.’는 것이었는데 이 힘이 바로 중력이라는 것이다. 중력은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듯이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중력은 우주의 모든 물체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이라 한다.
뉴튼은 만유인력을 연구하는 과정에 미적분의 기초와 반사망원경까지 만들었다. 1689년 뉴튼은 케임브리지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고, 1696년에 조폐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703년에는 왕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2년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과학자가 기사가 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는 만유인력뿐 아니라 미적분의 원리, 빛의 입자설도 발견했다. 그의 연구업적은 당대는 물론 이후 학문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관찰과 실험을 중시한 그의 방법론은 경험론을 낳게 했다. 뉴튼보다 열 살이나 위였던 경험론의 시조로 알려진 ‘존 로크’는 뉴튼을 스승처럼 숭배했다고까지 한다. 뉴튼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해 채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진행돼온 17세기 과학혁명을 완성시켰다. 그가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한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 발전에도 크다란 영향을 주었다.
(25) 아메리카 미합중국(USA)의 탄생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금으로부터 248년 전에 탄생했다. 물론 미국 땅이 발견된 것은 그보다도 282년 전이었고, 만들어진 것은 수십억 년 전 다른 대륙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도 하나로 결집하지 못하고, 서로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혹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인디언들을 몰아내려고, 아니면 이익을 많이 차지하려고 싸움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륙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았다. 연구에 따르면, 1530년경부터 노예무역이 시작되어 16세기에 90만, 17세기 275만, 18세기 4백만, 19세기 7백만 명 등 6천만 명의 노예무역이 있었다고 한다. 항해 도중에 여섯 명 중 다섯 명 꼴이 죽었다고도 한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턴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동인도회사 소속 배 2척에 괴한들이 습격해 배에 실려있던 차 상자를 몽땅 바닷속에 처넣고 도망쳤다. 342짝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1,500파운드에 달했다. 영국정부의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벌인 해프닝이자 독립전쟁의 발단이었다. 신분과 차별 없이 일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이주자들은 개척정신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에게 인디언과 대자연은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은 무차별 학살하고, 대자연은 끈질긴 도전으로 극복해냈다. 영국 정부는 재정난을 식민지 과세로 풀어보려고 했다. 조지 3세는 다양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악명높은 것이 인지세였다. 인지세는 신문이나 책, 공문서, 학위증명서 등에 인지를 붙이도록 한 것으로, 1765년 제정되었다.
동인도회사에 차 무역독점권을 주고 면세조치를 취하자 격분한 이들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1774년 9월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본국과의 통상 중지 등을 결의하자, 이듬해 4월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식민지 조직은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는 영국을 위해 프랑스와 용감히 싸웠던 인물인데도 이제 아메리카를 위해 영국과 싸워야 했다. 1776년 7월 4일 “정부의 권력은 국민의 동의하에 나온 것이다. 정부가 이런 권력을 파괴했을 때는 정부를 변혁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 국민의 권리다.”고 제프슨이 기초한 유명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은 후일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로써 프랑스·에스파냐·네덜란드는 식민지 정부를 지지하고, 러시아는 중립을 선언해 영국이 고립되었다. 식민지군은 열세로 악전고투했으나, 1777년 10월 사라토가 전투,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하여 대세를 잡았다. 영국은 8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1783년 13개 주 독립을 인정했다.
(26) 프랑스 혁명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세계를 질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속에 살던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월 14일 ‘힘에는 힘으로’라고 외친 혁명가 ‘카미유 데물랭’의 선동으로 파리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목표는 감옥 안에 있는 다량의 화약이었다. 감옥은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왕을 비판한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수감 돼 있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당한 순간 루이 16세는 화려한 베르사유 궁 정원에서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일기에 [7월 14일 : 아무 일 없음] 이라고 썼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처럼 신분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제1신분은 성직자로 프랑스 인구의 0.4%인 10만 정도였으나, 이들이 전국토의 10%를 차지하고 세금도 면제받았다. 제2신분인 귀족은 25만 정도로 국토 20%와 세금 면제는 물론 고위관리를 독점했다. 제3신분인 평민은 시민·농민·도시노동자들로, 그중에 상인·수공업자·변호사·문필가·하급관리들은 그래도 생활이 나은 편이었으나, 농민과 노동자는 겨우 간신히 생존할 정도였고, 각종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6세는 150년 이상 유명무실했던 삼부회를 소집해 왕실의 만성적인 적자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3신분의 반대로 난항을 거듭하자 왕은 의사당을 막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에 국민회의를 구성한 제3세력은 테니스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맹약’을 선언했다. 왕이 무력으로 탄압하리란 소문이 나돌자 파리시민들은 분개했고,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으로 이어졌다. 8월 국민회의 인권선언이 있었고, 10월에는 지독한 흉년이라는 소문이 나도는데도 베르사유 궁에서 대연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전해졌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이 전해지자 민중은 분노했다.
외침은 행진으로 이어져 베르사유궁으로 향했다. 당황한 왕은 미루던 인권선언을 재가했으나, 성난 군중에 이끌려 왕과 왕비와 아들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돌아왔다. 1791년 6월 왕은 왕비를 데리고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붙잡혀 다시 파리로 돌아 왔고, 1793년 1월 21일 왕은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되었다. 왕비도 그해 10월 16일 38세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로이션과 영국 등 각국은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자기 나라로 파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파리로 쳐들어갔다. 프랑스는 의용군을 조직해 이들을 막았다. 이때 의용군이 부른 진군가 ‘라 마르세예즈’가 혁명의 노래로 민중들에게 널리 퍼졌고, 지금의 프랑스 국가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 딸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 묻은 깃발은 날린다
피 묻은 깃발은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 야비한 무리들의 길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은 귀족들이 입는 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은 ‘상퀴로트’즉, 시민, 농민,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주역으로 부상한 세력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시민인 부르주아지였다.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 부르주아지 혁명이라고 하는 이유다. 다만 이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왕정과 봉건 잔재는 스러지고 근대 사회로의 막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27) 영웅이기는 한데 빛을 보지 못한 나폴레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프랑스 식민지이던 코르시카 섬에서 이탈리아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 포병장교가 되었는데,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으며, 또 기병이나 보병장교는 귀족 가문 출신에게만 허용되었으므로 그는 될 수가 없었다. 사관학교 졸업 성적은 58명 중 42번째로 좋지 않았으나, 역사와 수학은 뛰어났다. 22살 되던 해 집권 자코뱅 당에 가입하였고, 2년 뒤 툴롱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하여 일약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자코뱅 당수가 실각되어 처형당하자 그는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2년 후에 프랑스 동맹세력의 지휘관이 되었는데, 1,2군이 모두가 오스트리아에게 패했으나 그가 이끈 제3군은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쳐들어갔다. 오스트리아는 미리 겁을 먹고, 벨기에와 룸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프랑스에게 적은 이제 영국뿐이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했는데, 이집트 원정에나섰던 나폴레옹은 몰래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우왕좌왕하던 집권당인 지롱드 당을 몰아내고 새 헌법을 만들어 통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민중은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다시 굴복시키고, 1802년에는 숙적 영국과 조약을 체결해 평화를 맞이했다. 종신통령이 된 2년 뒤 국민투표로 황제가 되었다.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가 불과 10년 만에 다시 황제를 허락한 것이다. 유럽 전체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으나, 우수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만은 달랐다. 1806년 11월 넬슨 제독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국가들에게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필품을 수입하던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통상을 재개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었고, 추위와 눈보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버리고 걸어서 간신히 러시아 국경을 넘은 나폴레옹을 프로이센, 영국, 오스트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군대는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을 체포해 지중해 작은 섬 엘바로 유배보내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섬을 탈출해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파리로 돌아와 군대를 모았다. 그러나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집권한 지 꼭 100일 만으로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다. 영국군 감시하에 5년 반에 걸친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 1820년 5월 나이 51세로 눈을 감았다.
(28) 전설 같은 이야기,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는 나라
세계사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한다면, 쉬어가는 셈 치고 읽어 보기 바란다. “홍수전(洪秀全)은 1813년 광동성(廣東省) 화현(花縣)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이복형이 둘 있었으나 형들과 달리 농사는 짓지 않겠다고 하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1833년 그의 나이 21살 때 광주(廣州)로 시험 치러가다가 양아발(梁亞發)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홍수전에게 [권세양언(權世良言)]이란 책을 주었다. 책은 기독교 전도서였다. 하지만 홍수전은 책을 펴보지도 않았다. 4년 후 다시 과거에 응시했으나, 이번에도 보기좋게 낙방하자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40여 일 열병에 시달리던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궁궐처럼 으리으리한 큰 집에 이르니 금발 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속세의 마귀들을 쫓아버리고 형제자매를 구제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키가 장승처럼 큰선비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맏형이라며 역시 속세로 가서 마귀를 쫓으라고 하고는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6년 후 홍수전은 우연히 전에 받은 [권세양인]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꿈이 분명 하느님의 계시이며 키 큰선비는 예수 그리스도가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듬해 친구 풍운산(馮雲山)과 광서성(廣西省) 자형산(紫荊山)으로 가 상제회(上帝會)란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상제란 하느님을 말한다. 이때 홍콩에는 로버츠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에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광서로 돌아온 그는 교세를 늘리고 지도자가 되었다. 1850년 11월 홍수전이 거병하자 각지의 농민들과 비밀결사들이 속속 가담해와 세력은 단번에 광서성 영안을 점령하게 되자, 《태평천국》의 건국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태평천국은 ‘무릇 천하의 토지는 천하인들이 다 같이 경작할 수 있다. 천하 백성들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대복(大福)을 모두 받도록 하되, 밥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사용하여 어디나 고르고 또 의식이 넉넉지 않은 자가 없도록 한다…, 하늘에도 천국이 있고 지상에도 천국이 있으며 천상 지상은 다 같이 하나님의 천국이니 오직 천상의 천국만을 가르킨 것이라고 오인하지 말라…’강령일부다. 그가 세우고자 한 나라는 경제적·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의식이 풍족한 이상사회,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린 지상천국이었다. 그러면서 홍수전은 이민족인 청나라 지배를 타도하자고 했는데, 변발을 금지하고 복식을 바꾸었다. 한족 출신 지식인들은 태평군을 크게 지지했다. 1852년에 무창, 한양을 점령한 데 이어, 양자강 연안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이듬해 남경에 입성해 천경(天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정했다. 거병한 지 2년 3개월 만에 2백만 대군으로 불어났고 중국 동남지방을 완전히 석권했다. 그들은 법령을 반포해 토지의 공유, 엄정한 기율, 일부일처제, 창기(娼妓) 및 여성의 전족 금지, 여성의 참정권 인정, 아편, 도박 금지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유교 교육을 받은 식자층은 이들이 숭배하는 기독교에 심한 반발을 품었고, 혁명군 내분 등으로 1864년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이 이끄는 토벌군과 영국인 고든이 이끈 외인부대가 남경을 포위하자 위기에 몰린 홍수전은 4월 음독자살함으로써 태평천국은 무너졌다. 태평천국은 빈농들의 혁명운동이었다. 또 기독교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서양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민족운동이기도 했다. 훗날 중국인민혁명의 아버지 손문은 태평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외국에서는 다만 이론뿐이고 완전한 실행은 아직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홍수전 시대에 이미 실행한 바가 있다. 그가 실행한 경제 제도는 공산주의의 실천이지 이론이 아니다.”
(29) 찰스 다윈의 진화론
우리나라에서 최재우가 동학을 창시할 무렵, 영국에서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발간하여 인류역사에 일대 혁명의 광기를 불어 넣었다. 다윈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캠브리지 대학 신학부에 들어갔으나,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중에, 식물학자 한슬러 교수를 만나 그의 권유에 따라 ‘비글호’를 타고 탐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나이 22살 때다. 비글호는 해군 측량선으로,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섬들,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해했는데, 다윈은 무보수 박물학자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5년간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비글호 항해기’를 썼고, 20년 후에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어린 생명이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며 늙어 죽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연도태 원칙에 의해 생존에 적합한 종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 예를 들어 기린은 살아남기 위해 목이 길게 발달하였으며,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바꾸는 생체조직을 개발한 것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종은 계속 그 생체조직을 발전시켜 수세대에 걸쳐 이런 변화가 지속되면 낡은 형태는 소멸되고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을 이룬다. 지구가 처음 생성되었을 때 존재한 종이 현재까지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종들은 원형에서 형질이 변화하여 현재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바뀐 것들이다. 인간도 이 같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화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인간도 원숭이로부터 환경에 맞게 진화 발달하여 인간이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새로웠으며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가장 발끈한 것은 종교계였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성경 말씀은 거짓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진리 수호를 다짐하며 진화론을 배척하고 다윈의 책을 읽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책은 날개 돋힌 듯 팔렸다. 초판 1,250부가 단 하루 만에 매진됐다. 사람들은 이전처럼 교회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화론이 부정적인 것을 낳기도 했는데, 인종차별과 서구 중심 민족주의를 정당화한 것이다.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착취하는 것을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였고, 한 생명의 번성을 위해 다른 생명이 말살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리하여 잉글로 섹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 튜턴 계열의 독일인들이 아시아·아프리카·슬라부족에 대해 민족 우월성을 갖게 되었다.
(30) 미국의 남북전쟁
1861년부터 4년에 걸쳐 있었던 미국의 내전인 남북전쟁은 링컨에 의한 노예해방 전쟁이었고, 유명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그 위대한 사명에 우리 스스로를 바쳐야 합니다”라고 한 ‘케티스버그 연설’을 낳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노예해방은 표면상 이유였고, 근본적인 원인은 신흥 상공업에 기반을 둔 북부의 산업자본과 노예제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자본간 대립이었다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는 남부가 우세했다. 영국은 이익에 따라 남부를 지원했다. 전쟁 중인 1863년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부 흑인 노예 400만 명이 해방되어 전세는 북부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쌍방의 사상자는 무려 60만 명, 전비는 100억 달러에 달했다. 링컨은 승리하고도 관대했다. 그의 목표는 미합중국의 단결과 통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남부출신 청년에게 저격당해 죽고 말았다.
흑인들은 백인과 똑같이 한 시민으로서 자유와 선거권을 보장받았으나 흑인들이 얻은 자유는 굶주림의 자유였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흑인 노예들은 북부로 이주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옛주인 믿으로 들어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노예해방과 함께 ‘면화 왕국’은 무너지고 그에 기초했던 정치세력도 쇠퇴했다.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을 전개하여 자본주의의 꽃을 피웠다. 북부의 승리는 미국자본주의의 승리였다.
(31) 알프레드 노벨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말했다. “내 재산은 모두 돈으로 바꾸어 기금으로 만들고 해마다 이자로 지난 1년 동안 인류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금으로 주라.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한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 또는 전쟁 준비를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또는 평화회의를 열거나 확대하기 위하여 가장 훌륭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도록 하라. 이런 부문의 상금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 주어도 좋다.”
유언에 따라서 9백만 달러에 달하는 기금이 마련되었고, 상의 이름은 ‘노벨상’최초의 수상식은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거행되었다.
노벨은 스톨홀롬에서 태어났고 네 형제 중의 셋째로 어려서 매우 병약했다. 가난한 발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가 문학에 심취해 장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발명가가 되기를 바랐다. 1850년 17세 되던 해 혼자 미국, 프랑스로 건너가 기계공학을 공부한 뒤에 돌아와 아버지가 하던 무기 공장일을 도왔다. 1862년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은 보통 화약의 몇십 배 강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문지르기만 해도 폭발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이것을 안전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강력한 힘을 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듬해 특허를 따내고 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 옴메베루그 광산에서 그가 만든 화약이 최초로 실험 사용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광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화약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나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생 에밀과 직공 셋, 근처를 지나던 행인까지 목숨을 잃었다. 스웨덴 정부는 화약 제조를 금지시켰고,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노벨은 형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로 가서 공장을 세우고, 여기서 생산된 화약은 독일·오스트리아·영국·미국·호주 등으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폭발사고는 끊이지 않았는데, 심지어 파나마 운하를 지나던 화물선이 폭발하여 476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벨은 액체를 고체로 만드는 것을 연구했고, 결국 ‘다이나마이트’를 만들었다. 2천년 전 이집트에서 수로 17㎞(그중 6㎞는 터널)를 만들 때 3만 명이 11년이나 걸렸으나,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면 100명 정도가 단 10개월이면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발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였지만, 인간의 생명을 대량 살상하는 무기로 만들어졌다. 노벨은 만년에 이 점이 마음에 걸렸든지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번 돈을 희사하겠다고 했다. 노벨상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32) 마르크스, 스에즈 운하, 비스마르크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꿈꾼 칼 마르크스(1801∼1883)는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쓴 논문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아내와 프랑스로 도망쳤다. 프랑스에서도 추방당하자 브뤼셀로, 영국으로 떠났다가 1848년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고 1867년에 〈자본론〉을 발표하여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마르크스 사상은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흡수하여 종래 관념론을 뒤집는 유물철학으로, 그는 인류사회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변화발전하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 확신으로 평생 혁명을 꿈꾸고, 일하고, 글을 썼다. 그 혁명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는 1869년 10년간 대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운하는 162.5㎞에 불과하지만, 바다와 바다를 잇는 세계 최대의 운하다. 운하 개통으로 런던에서 싱가포르까지 2만 4천㎞에서 1만 5천 27㎞로 거의 절반가량 항로가 줄었다. 운하는 공사도 공사지만 개통 후 운영권을 두고 프랑스와 영국, 이집트 간 여러차례 전쟁이 일어나 승리한 영국이 3C(캐이프타운-카리로-캘커타)정책으로 아프리카로 진출하게 되고 다른 유럽 각국도 아프리카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프리카는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였다. 아프리카의 나라간 국경은 다른 대륙과 달리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열강들, 즉 정복국들이 편의에 따라 지도를 놓고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기억하는 만큼 독일에는 비스마르크(1815∼1898)라는 인물이 있다. 독일은 빈 회의 결정에 의해 35개 국가와 4개의 자유시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프로이션은 그중의 한 소국이었다. 프로이션국왕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등용했다. 군대와 고위관리 등을 독점해 국왕의 충실한 지지기반이 되어 준 그는 청년 시절 28번의 전투 경험을 가진 열혈남아였다. 32살에 의원으로 당선되어 보수정치가로서 입지를 굳혀갔다. 국왕의 충실한 꼬봉이었던 그는 1862년 수상이 되었다.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누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한 그는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오늘의 문제는 말이나, 다수결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의회에서 연설했다.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의회를 4년 동안 누르고 세금으로 군비 확장에 총력을 기울여,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왕가의 상징인 베르사유궁에서 독일 제국 황제 취임식을 열었다. 이로써 수십 개로 분립해 있던 독일연방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33) 자연빛으로 인공빛을 만든 에디슨
토머스 엘버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막내로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고 엉뚱한 짓을 곧장 해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곤 했는데 초등학교 성적은 꼴찌를 면치 못했다. “넌 머리가 썩어빠졌어”라는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고는 3개월 만에 학교를 집어치워 버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준 〈자연과학 학교〉라는 책을 읽고 지하실에다 실험실을 만들고는 ‘에디슨 연구소’라고 불렀다. 12살이 되어 열차 신문판매원으로 일하면서 열차 화물칸에서 실험을 하다 불을 내고는 차장에게 얻어맞아 귀가 나빠졌다. 그러나 열차에 깔릴 뻔한 역장의 아들을 구해준 보답으로 전신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이곳저곳 떠돌면서도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에디슨은 1870년 하루 4시간만 자고 일과 실험에 몰두했다. 2중 전신기, 4중 전신기, 등사판, 전기펜 등 갖가지 제품을 발명하고, 1876년에는 축음기와 송화기를 발명했고 벨이 만든 전화기를 한층 개량했다. 지금까지 5,6초 이상 불을 밝히지 못하던 백열전구를 수학자 엡튼, 유리기술자 보엠과 연구해 만들고 이듬해에는 무명실을 태워 만든 필라멘트 실험이 성공했다. 이 전구는 40시간 이상 빛을 발했다. 이외 영사기, 전기철도, 축전기 등 무려 1,300여 가지 발명을 이룬 그는 무엇이 성공을 이끌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상상력과 큰 희망,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의지이다”라고.
(34) 인류 평화를 위한? 축제 올림픽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독립협회가 창간되어 〈독립신문〉이 발간되던 그 무렵인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열렸다. 물론 우리는 이런 축제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 처음 시작되었다. 올림푸스 산에 산다고 믿은 제우스 등 12신에게 4년마다 한 번씩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체육대회도 같이 열었던 것이다. 이게 올림픽의 기원이다. 그리스 각 폴리스의 대표들이 명예를 걸고 승부를 겨루었으며 최후 승자에게는 생명의 신 아폴로의 나무 월계수로 만든 관이 주어졌다. 하지만 노예·여자·외국인은 배제되고 오직 그리스인만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종목은 단거리 경주·5종경기·레슬링·권투·전차경주·경마·판크라티온(격투기)등 이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서기 393년까지 1100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열렸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이교도의 제전이라 하여 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근대올림픽을 제안한 쿠베르탱은 1863년 프랑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육군학교에 들어갔으나, 16살 때 중퇴하고 교육학을 공부한 뒤 영국에서 유학 중 청소년 교육의 중심은 스포츠여야 한다고 믿고,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를 조직하고 2년 뒤,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참가해 10개 종목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메달 수에 따라 순위가 정해졌는데 1위 그리스, 2위 미국, 3위는 독일이 차지했다. 1·2차 세계대전으로 3번 중단된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4년 도쿄대회는 백인국 아닌 곳에서 열린 최초이고,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린 최초의 대회였다. 동계올림픽은 1924년 시작되었고, 우리나라는 1932년 제10회 LA대회부터 일본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904년까지 흑인과 유색인종은 참가가 금지되었다가 1921년 제정된 올림픽 헌장에서 인종·종교·정치적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생겼다. 이념과 달리 오늘날 올림픽은 자국의 이념을 선전하고 경제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또 하나의 국제 정치무대가 된 것은 ‘스포츠=국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35) 퀴리부인
아버지가 폴란드 고등학교 과학교사였던‘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는 스물넷 늦깎이로 파리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 결혼했고, 부부는 피에르가 근무하던 공업물리학교 바라크 건물을 빌려 거기서 실험에 몰두했다.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1895년 독일의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고, 이듬해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벨이 방사선을 발견했으나, 방사능이 어디서 나오는지 밝혀지지 않았는데, 마리아는 우라늄보다 훨씬 활성적인 물질이 나오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연구를 거듭했다.
우라늄 광석 20㎏을 체로 걸러서 황산에 졸여 침전시켜 결정을 만드는 일을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했는데, 너무나도 고된 일이었다. 마침내 1902년 두 사람은 순수한 라듐 결정을 추출해 냈다. 4년 동안 8톤의 광석에서 추출한 양은 0.1g 이었다. 그녀가 34살 때였다. 부부는 「방사성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학위 논문을 파리대학에 제출했고, 그해 11월 스웨덴 정부는 퀴리 부부와 베크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했다. 노벨상이 수여된 지 세 번째로 퀴리부인은 최초의 여성 수상자였다. 그러나 건강상 이유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06년 남편이 마차 사고로 죽었고, 퀴리부인은 파리 대학 이학부 교수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이 학교 교수가 된 최초의 여성이었다. 1911년에는 두 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36) 일본제국 : 대한제국
* 일본제국(日帝)은,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 열도와 식민지를 통치했던 국가를 말한다.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2일까지 존속했다. 동양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하여 아시아 각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를 칭해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되었다. 대한제국은 조선과 별개의 나라가 아닌, 연속된 계승국으로 전제군주제 국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멸망했다.
- 1853년 일본 미국에 의해 개국
- 1867년 일본 메이지 유신 단행.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으로 불림
- 1876년 2월 27일, 전년도 9월에 있었던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은 자신들이 미국에 당한 방식으로 조선과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할 수밖에 없었다.
- 1882년 임오군란 발발.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 13개월 치 체불된 임금을 조선 조정이 저급한 불량쌀로 지급하자 일어남.
- 1894년 전봉준 등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키다.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민씨정권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군대를 보냈다.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청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행동으로 8월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군사력이 강했던 일본이 승리했고, 이해 조선은 1,2차에 걸친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 일으킴.
-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 25일까지 고종과 왕태자 순종이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과 친일내각이 장악한 경복궁(건청궁)을 탈출하여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을 말한다.
- 1898년 러시아 독일·프랑스의 후원을 받아 극동으로 진출해, 요동을 청에 돌려 줄 것을 요구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삼국간섭’으로 여순·대련의 조차권을 러시아가 얻었다.
-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義和團)사건이 터지자, 러시아는 18만 군대를 파견하여 만주를 장악했다. 러시아 울릉도 채벌권, 경원·종성 채광권,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이권을 차지했다.
- 1902년 일본 영·일동맹을 맺고, 청나라는 영국이, 조선은 일본이 권익을 나눠 갖기로 하였다. 서울-인천간 장거리 전화개통.
- 1903년 러시아 압록강 주변 용암포를 조차지로 만들기 위해 군대를 여기에 보냈다.(용암포 사건)
- 1904년 2월 러시아가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자, 일본이 여순항을 기습 공격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5월 대한해협에서 일본함대가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였다.
- 1905년 미국 포츠머스에서 미·일회담을 열어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루즈벨트 대통령 특사 테프트가 밀약을 갖고, 일본에게 한반도 지배권과 요동반도, 사할린 남부를 넘겨주고 베링해 어업권도 양도하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경쟁자가 없어진 일본은 조선과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 1906년 일본 조선통감부를 설치했다.
- 1907년 고종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했으나, 이로 인해 퇴위당함.
- 1909년,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총살.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됨.
(37) 손문(孫文)
어린 푸이(溥儀)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실권을 쥔 서태후는 예상과 달리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마지못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1908년 헌법을 발표하였으며 1911년 첫 내각을 소집했다. 하지만 내각 대부분이 만주족으로 한족의 불만을 샀다. 곳곳에서 입헌제가 아닌 공화제를 수립하자는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손문은 광동성 향산 빈농에서 태어나 13살 때 형을 따라 호놀룰루로 건너갔다가 1894년 그곳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다.
이듬해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광동으로 돌아와 청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으나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미국, 영국 등에서 견문을 넓히고는 삼민주의를 외쳤다. 민족·민권·민생의 3민은 왕정 타고, 공화정 수립, 경제개혁 등 삼민주의는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이념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발발로 단체들을 모두 해체하고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총재가 되었다. 동맹회는 ‘중화민국’을 표방하였고, 민중봉기에 성공한 14개 성이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가결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손문은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총통에 취임했다. 신해혁명이라고 하는 이로 인해 10월 10일 쌍십절 날에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재정위기에 빠진 혁명군에게 정부의 실권자 원세개(遠世凱)가 손문과 밀약을 맺고는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우되 초대 총통으로 원세개를 세우기로 했다. 2월 선통제(宣統帝-푸이)를 퇴위시키고, 3월10일 원세개가 초대 총통이 되었다. 원세개는 이듬해 국민당을 해산하고 국회를 정지시켰다. 그의 야심은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6년 그가 죽자 손문은 중국공산당과 제휴하여 국민당을 개편하고는 국공합작으로 군벌축출을 꽤했지만, 혁명완수를 보지 못하고 1925년 3월 12일 60세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38) 두 발의 총성
1914년 6월 28일 맑고 화창한 일요일 오후,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오스트리아 육군대연습(사열)을 참관하고 돌아가고 있었는데, 오픈카가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한 청년이 권총을 발사 대공 부부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청년은 체포되었다. 범인은 세르비아인 카브리엘로 프린체프로 19살의 대학생이었다. 그는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저항하기 위하여 이 ‘사라예보 사건’을 저질렀다.
발칸반도는 유럽 제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지역으로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트루크와의 전쟁에 패배한 이래 러시아·트루크·오스트리아 등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78년 트루크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1908년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아 등을 병합당했는데, 사라예보 사건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황태자 부부의 죽음에도 오스트리아는 냉담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황태자 부인 조세핀이 보헤미아 백작의 딸이었으나 신분이 낮아 황태자비로 대우받지 못하던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에는 황제도 황족도 참석하지 않았다. 죽음을 애도한 것은 세 명의 자식들 뿐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대외적으로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해 7월 23일 ‘세르비아 내의 반오스트리아 출판물 금지, 반오스트리아 단체의 해산, 암살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 참여, 오스트리아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 파면’등을 요구하며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그중 일부만 받아들였고,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이 보낸 통첩은 온건하고 타당한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취했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되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맺고 있었고, 영국·프랑스·러시아는 삼국협상을 갖고 있었는데, 발칸을 잃고 싶지 않았던 러시아는 노동자 파업과 차르 타도를 외치는 혁명운동 등 내부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어 이를 돌파할 명분이 필요해 전쟁에 참여했다. 독일은 이에 대항하고자 8월 1일 러시아에게 8월 3일에는 프랑스에게 각각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중립국이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단숨에 제압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자 영·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조심스럽던 영국도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선전포고 했다. 11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오스만트루크가 독일·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자 오랫동안 트루크의 지배를 받아온 아라비아가 트루크에 대항해 영국편을 들었다. 식민지이던 인도도 참전하면 독립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영국에 협력했다. 또한 불가리아는 독일 편에, 루마니아, 그리스는 연합국 편에 가담하는 등 세계전쟁 양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한편, 사라예보 청년 프란체프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지만 자신이 저지른 세계전쟁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1918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39)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2월 22일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그전에는 페테르스부르크)에는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품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안 군중들은 빵 가게, 식료품점들을 마구 급습했다. 가난한 병사의 아내와 여공들이었던 이들은 다음날도 사회주의 단체들과 ‘부녀자의 날’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빵을 다오, 차르를 타도하자”구호가 난무하고, 10만의 노동자가 이날시위에 참여했으며, 24일에는 20만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이 수는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튿날 시위에는 학생들도 가담했다. 경찰과 군인들도 시위에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진압군은 발포를 명했고 시위대 15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2월 27일 드디어 병사들이 총부리를 장교들에게 돌렸다. 시위대는 노동자 1천 명당 1명, 병사 1개 중대당 1명의 대표를 선출해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평의회)를 결성했다. 이에 의회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황제를 퇴위시켰다. 300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했다. 당시가 3월이었으나 러시아력에 의하면 2월이었으므로 ‘2월 혁명’이라고 한다.
4월 3일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왔다. 작은 키, 낮은 코, 작은 눈과 벗겨진 머리는 다분히 동양적 용모를 지닌 그는 할머니가 몽골계 타타르인이었고, 아버지는 교육 관리였고, 어머니는 교양이 풍부한 여인이었다. 그가 혁명가가 된 것은 1887년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다니던 형 알렉산드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기 위해 여섯 명의 동료들과 폭탄을 만들다가 체포되어 처형 당한 때문으로, 레닌은 교내 시위와 관련하여 사형수의 동생임이 밝혀지자 제적, 카잔으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카잔에서 돌아온 레닌은 독학으로 대학 졸업시험에 통과한 뒤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해방투쟁 결성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망명길에 올랐던 그는 2월 혁명 직후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10월 25일 새벽 시가를 장악하고 그날 밤 전 러시아 병사·노동자 대표들이 소비에트대회를 열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고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는 레닌을 의장에, 트로츠키를 외무위원, 루이코프를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것이 ‘볼세비키 혁명’으로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짐으로써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40) 파쇼, 로마를 꿈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미국이다. 채무국에서 채권국이 되고 세계금융의 중심은 런던에서 미국 월가로 옮겨갔다. 영국 등과 삼국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60만이나 되는 사망자를 냈음에도 강화회의에서 아무런 댓가도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승리의 열매를 도둑맞았다고 분개했다. 전쟁 후 극심한 인플레와 외채에 시달렸고,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3세의 통치는 무능했다. 이때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되면서 등장한 인물이 무솔리니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전진)〉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명확한 사회주의 이론도 없이 니체와 미키아벨리에게서 배운 권력지향적 개인주의와 뒤섞여 매우 불안정했다.
1919년 3월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파시스트 당을 결성했는데, 이탈리아어인 ‘파쇼’는 결속을 뜻하고, 여기서 유래한 파시즘은 후에 전체주의·독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거액의 자금을 주어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들은 ‘검은 샤츠’란 행동대를 만들어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을 습격하거나 파업을 분쇄하고 다녔다. 파시스트 당이 1922년 총선에서 22석을 확보하자 그해 10월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파시스트 내각 수립을 주장했다. 낙담과 실의에 빠져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가 난국을 타개하고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아 줄 영웅으로 생각했다. 로마로 진군하자 국왕은 아무 제재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수상에 임명했다.
수상이 된 무솔리니는 새 내각을 조직하고 이듬해 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를 준비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파시스트당은 65%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으며,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1929년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협정을 맺고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주기고 했다. 무솔리니는 강철 헬멧에 번쩍이는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고대 로마 케사르를 연상케 했다.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41) 보이지 않는 손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가의 한 빌딩 꼭대기에 한 남자가 올라갔다. 순식간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틀림없이 뛰어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이미 11명이 근처 빌딩에서 떨어져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증권에 투자한 사람들이었다. 어제까지도 사지 못해 안달이던 주식을 오늘은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5일 후 주가는 다시 폭락했다. 불과 30분 사이에 20억 달러가 날아갔다. ‘암흑의 목요일’에 이어 ‘비극의 화요일’이었다. 이후 주가는 계속 하락해 11월에는 9월의 절반 이하로, 다음 해 7월에는 8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담보를 잡히고 대부받은 투자자들은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파산된 것이다. 이번에는 대출한 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은행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예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고, 부도를 낸 은행은 5천여 개,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휴지쪼가리로 변하고, 수만 개 기업이 파산했다. 당장 2,500만 명의 실업자가 저리로 쫓겨났다. 상점에 상품은 넘쳐나는데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다. 상품은 많아도 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고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니 공장은 문을 닫거나 생산량을 줄였다. 실업자는 늘어났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훔치러 다녔다.
미국 경제의 불황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미국은 유럽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였다. 금은 사장되었고 캐나다는 밀을 불태우고 브라질은 커피를 바닷속에 처넣었다. 4년간 지속된 이 세계 대공황으로 수천만에 달하는 실업자가 양산되고 생산 감소, 무역감소로 농산물 가력폭락, 금융시장의 정지 사태를 불러왔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자본가는 소비자의 구매 능력과 관계없이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판다.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이 오르면 생산량을 늘린다. 그러면 가격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처음으로 말한 것으로 완전한 자유경쟁, 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것으로 생각한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는 금과옥조 같은 신념이었다. 그러나 공황은 실제로 10년 주기로 반복되어왔다. 1929년 미국발 세계공황은 그 규모가 세계적이었을 뿐이다.
(42) 뉴딜정책
대공황에 빠진 미국을 일으키라는 책무를 지고 루즈벨트는 1933년 3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하루빨리 미국을 재건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개입하여 공공사업으로 수요를 창출하고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뉴딜 법안을 만들었다. 이것은 아담 스미드 이래 자본주의 경제의 철칙인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츠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한다는 것은 공산주의나 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케인즈는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냐는 질문을 한동안 받았다고 한다.
루즈벨트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농업 부흥이었다.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정부 통제하에 경작면적을 제한하고 과잉생산물을 사들여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 테네시강에 16개의 댐을 건설하여 수력발전으로 종전의 1/3가격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며 노동시간과 최저임금을 규정하기도 했다.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양로연금을 지급하고 실업자에게는 일정기간 동안 실업수당을 지급했다. 뉴딜정책으로 대외정책도 바뀌었다. 미국은 소비에트연방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는데 제정 러시아 시대 외채를 지불하지 않고 혁명을 선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소련을 승인하고, 쿠바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다.
뉴딜정책으로 미국은 불황을 극복해 갔고 루즈벨트는 재선에 성공했다. 뉴딜정책은 미국 경제와 정치를 중앙집권화시켰으며 고전적 자본주의로를 국가가 적극 개입한다는 수정자본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미국, 영국과 달리 독일·일본·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라는 극단적인 전제주의가 생겼다. 파시즘은 경제불황을 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43)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두 번이나 아내를 잃고 24살 연하의 클라라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아돌프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1907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그는 3년간 빈의 무료숙박소에서 살면서 그림엽서나 작은 풍경화를 그려 팔다가 1913년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피해 독일 뭔헨으로 도망쳤다. 이듬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병사로 자원입대했다. 독일은 그에게 무공훈장 청십자훈장을 두 번이나 수여했다. 1920년 독일노동자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개칭됐는데,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zialist)를 줄여 ‘나치’라고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는 당의 이론가, 선동가로 급성장했다. 나치의 집회를 방해하는 자에게는 폭력을 서슴치 않았다. 1923년 11월 8일 뭔헨의 맥주홀에서 돌격대를 이끌고 나타나 이른바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으나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고 히틀러는 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 베르사유 조약 폐기, 사회주의자와 유태인 배척 등 자신의 소신을 주장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이끌었다. 이때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석방된 뒤 당 재건사업을 펴 1925년에는 2만 7천에 불과하던 당원이 7배로 늘어났다. 이때 독일의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패전으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데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경제에 치명타를 주었다. 1932년 실업율은 무려 44.4%에 달했다.
1937년 37.3%의 지지를 받고 제1당이 된 나치당은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해 공산당의원 81명을 추방했다. 1933년 총선에서 승리하자, 이듬해 히틀러는 대통령과 수상을 겸하는 총통이 되었다. 정권을 장악하자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괴멸시키고, 노동조합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신문 방송을 철저히 검열했다. 유태인이거나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교수들은 대학에서 추방했다. 학교는 나치즘 선전장으로 바뀌었다. 그런 가운데 대규모 군수 사업을 일으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실업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치의 경제정책에 독일국민은 환호했다. 게다가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독일국민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영웅화되었다. 희생물은 유태인이었다. 572만 명이 학살당하고 온갖 생체실험의 도구에 써졌다.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더럽고 위험스런 바이러스’정도로 취급되었다.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것이 나치즘의 특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29일 새벽 히틀러는 동거했으나 결혼을 하지 않았던 에바 브라운과 지하 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 날 오후 에바는 독약으로,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게르만 민족의 세계지배’라는 히틀러의 야심도 끝이 났다.
(44) 홍군(紅軍) 대도하(大渡河)
모택동을 위시한 중국 홍군(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우기 위해 혹은 자파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단행한 행진을 대장정이라고 하는데, 이의 클라이막스는 대도하(大渡河)였다. 이곳을 무사히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는 홍군의 운명이 달려있었다. 만약에 이곳을 건너지 못하면 2천 리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은 곧 홍군의 전멸을 뜻했다. 1935년 5월 임표가 이끄는 제1군단 선봉대가 대도하에 도착했다. 국민당 장개석 군대는 홍군의 도강을 저지할 목적으로 배를 모두 불태우고, 들판의 곡식까지 모두 거두어 버렸다. 선봉대는 남은 배 3척을 빼앗는 데는 성공했으나, 3척의 배로는 1군단 병력이 건너는데 사흘이 걸릴 정도였다. 이런 속도라면 포위당하고 말 판이었다. 임표·모택동·주은래·주덕·팽덕회 등 수뇌부는 회의를 열고 서쪽 400리 지점에 있는 노정교(瀘定橋)를 점령하기로 했다. 노정교는 깎아 지른 협곡 사이에 매달린 다리였다.
험하고 험한 다리에 다다랐으나 노정교는 길이 900m에 육중한 쇠고리 줄이 강을 가로질러 있고 바닥에 널빤지가 깔려 있었으나, 적들이 이미 널빤지 절반 이상을 뜯어내 버린데다 적이 강 저편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1개 연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군이 미치지 않았다면 널빤지가 없는 쇠줄을 밟고 다리를 건너진 않을 것’이고 생각했다. 그런데 홍군은 바로 그 미친 짓을 했다. 돌격대 30명이 지원했고, 쇠줄을 타고 건너자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대부분 떨어져 강에 수장됐다. 그러나 적탄을 뚫고 건너간 용사가 수류탄을 적진에 던졌다. ‘홍군만세, 대도하의 영웅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개석은 손문이 국공합작을 통해 군벌타도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죽자,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7년 4월 12일 지주·자본가·상인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파기하고 공산당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이로써 공산당 4/5가 살해당했다. 하지만 공산당 지휘부는 정강산을 근거로 다시 세력을 키웠는데, 장개석은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국민당 기관지는 이 과정에 100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공산당은 내륙지방으로 퇴각한다는 문제를 검토했고 드디어 10월 16일 장정을 개시했다.
대장정은 1년 만인 1935년 10월 끝이 났다. 그동안 홍군은 중국 대륙 남쪽을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리, 즉 1만㎞를 걸었다. 홍군은 18개 산맥을 넘고 24개 강을 건넜다. 그리고 12개 성을 지나면서 62개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으며 6개 이민족 지역을 통과했다.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 대장정을 완수한 사람은 열 명 중 하나꼴이었고 여자는 35명 뿐이었다. 모택동의 두 번째 부인 하자정(賀子貞)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완수했다.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홍군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공산당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45) 시안사건
2만 5천 리 대장정 끝에 섬서성 시안에 도착한 홍군의 뒤를 쫓고 있던 장개석은 1937년 12월 7일 전용기를 타고 시안으로 날아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시안에 주둔 중이었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상태였다. 그것은 “중국인끼리 싸워 선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는 홍군의 항일 통일전선에 장학량의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2일 새벽,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 바람으로 뒷산으로 달아났다. 바위틈에서 장개석을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고는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기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의 구국 요구서를 제출했는데, ‘내전정지, 거국일치의 항일’이 그것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시안사건〉이다. 이로 인해 홍군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장학량의 비행기를 타고 시안으로 날아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정치주임을 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왔다. 홍군은 장개석 휘하의 제8로군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7개월 후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 시안에 갔을 때 제8로군 진지를 답사했던 생각이 나 옮겨보았다.
(46) 5천만 명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단치히 항을 순양함으로 공격했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40년 4월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해 항복을 받고, 5월에는 네덜란드를, 2주 후에는 벨기에를 침공한 뒤 프랑스로 진격했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독일에 가담했다. 독일은 유고슬라비아에 이어, 스위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소련으로 진격했다.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와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국토 서쪽 대부분이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1940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맺고, 일본은 대동아 공영을 외치며 동남아로 진출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미국이 참전하고 격전이 벌어지면서 점차 연합군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으로 승기를 잡은 뒤, 8월 솔로몬 군도와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일본은 고립되었다.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 대부분을 잃었으며 핀리핀을 잃었다. 아이젠하워가 이끈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함으로써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45년 5월 1일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자결하였고, 5월 7일 독일이 항복했다. 일본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다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8월 8일 소련의 선전포고에 밀려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6년간의 전쟁은 끝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 병력 1억 1천만,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제1차 세계대전의 3배가 넘는 숫자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47) 모택동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 마을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글을 배우면서 아버지는 유교 경전과 주산 같은 것을 배우라고 강요했지만, 그는 상향의 신식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중국의 현실을 알게 됐고 호남 제1사범학교를 졸업한 1921년 스승인 양창제의 딸인 양개혜와 결혼했다. 그녀는 1930년 장사에서 모택동의 여동생과 함께 국민당 군대에게 처형당했다. 1927년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기하자, 농민부대를 조직 봉기하였으나 실패함으로써 1천여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강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개혁을 위한 홍군을 길렀다. 정강산 산적들을 교화시켜 홍군의 전사가 되게 했다. 장개석은 홍군을 공격했다. 공격을 피해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이것이 유명한 대장정의 시작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장개석이 연립정부를 제안했으나 결렬되고, 1946년부터 국공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양측은 항일전선의 주도권을 놓고 공공연히 투쟁을 벌여왔다. 장개석은 1948년 5월 총통이 되었으며, 미국과 서구 열강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도왔다. 그러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홍군이 국민당의 주력군을 무너뜨리고, 1949년 대만과 티벳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에 미국은 국민당 지원을 중단했다.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피했다. 3월 모택동은 북경에 입성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에 선출되었다.
(48) 중동분쟁
1880년까지만 해도 아랍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인 유태인 간은 평화롭게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는 50만, 유태인은 2만 5천이었다. 나치스 등에 의해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자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어 왔다. 시오니즘이란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말하는데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서 따온 말이다. 유태인들은 어디에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할 것인지 찾던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야 말로 유태국가를 세울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1차 대전이 한창일 때 팔레스타인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터키는 독일 편에 가담해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영국은 아랍이 전쟁에 협력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에게 돌려주겠다는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이에 메카의 수호자 후세인은 영국인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터키군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 내 유태인들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참전시키고자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유태인들은 영국의 비호하에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계속해 1936년 우수한 기술과 자본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산업시설을 갖추었으며 과격한 시오니스트들은 비밀리에 군대를 길렀다. 독립의 꿈이 무산된 아랍인들은 시오니스트와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할 유태인과 아랍인이 각각 독립 국가를 세우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 민족의 땅이라고 주장 제안을 거부했다. 영국이 손을 떼고 철수하자 1948년 5월 15일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라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하루아침에 100만에 달하는 아랍 난민이 생겼다. 아랍국가들 속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아랍의 반이스라엘 투쟁은 자연스럽게 반미투쟁으로 진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49)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페레스트로이카」
1986년 2월 25일부터 3월 6일까지 소련 공산당 제27차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서방측 공산당과 사회당, 좌익정당 대표들도 초청되었는데, 113개국 152개 정당 대의원 4,993명이 참가했다. 여기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소련 사회의 침체 원인으로 타성, 관료주의, 관리 형태와 방법의 경직성, 동적인 사업 경향 감퇴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현대 과학기술 진보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경제 재편, 식량문제의 최우선 해결, 새로운 경제관리 메커니즘 창출, 경제성장의 잠재력 활성화, 인민복지 증진과 사회적 공정성 확립을 주장했다.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만성적인 물자 부족과 품귀현상 실업자는 없지만,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무사안일주의와 형식주의 만연 등 소련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스탈린식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가로 떠올랐다. 동유럽 인민들은 개혁과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졌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불가리아 동독 등 수백만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각국의 공산당은 자구책으로 개혁과 개방으로 재편을 서둘렀다. 고르바초프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제창하며 동유럽의 개혁을 지지했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결국 무너졌으며 공산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고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동독은 서독으로 흡수 통합되었으며, 소련은 각 공화국의 분리 독립운동으로 인해 연방이 해체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공평한 삶의 기회를 누리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50) 베트남 전쟁
프랑스·일본·미국과 싸워 끝내 독립국가를 세운 베트남, 세계역사에서 이들처럼 강대국과 맞서 끈질긴 싸움을 벌인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인도도 200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스스로 독립을 쟁취했고, 우리도 나름대로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으나, 그들에 비길 바는 아니다. 베트남의 근대사도 매우 험난했다. 1883년 프랑스는 캄보디아, 라오스까지 병합해 인도차이나반도 절반을 손에 넣고 냉혹한 지배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베트남은 반발했다. 1920년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고,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일본이 들어왔다.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일본 두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자,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은 8월 13일 봉기하여 호지명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우리처럼 연합군은 북위 17도선 남쪽을, 북쪽은 장개석군이 들어왔다. 프랑스와 영국은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베트민을 진압했다. 장개석은 일찍 손을 떼었지만, 남쪽 베트민은 항전을 계속했다. 1954년 봄 베트민은 디엔 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휴전을 제안한 프랑스는 17도 이남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철수해 버렸다. 총선거는 유산되고 미국의 지지를 받은 ‘고 딘 디엠’의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섰다. 17도선은 군사분계선에서 국경선이 되었고, 남북으로 양단되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와 물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디 엠 정권의 전횡과 탄압, 무능, 부패는 남베트남을 저항의 길로 내몰았다. 디엠과 미국은 이들을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라고 불렀지만, 처음부터 이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1960년 남베트남 혁명세력은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미국은 주둔병력을 증강시키고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전면전을 시작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당연히 미국의 승리가 예견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교묘한 유격 전술, 대중의 정치투쟁, 남베트남 군에 대한 설득 공작으로 미국에 등을 돌리게 하고, 미국을 괴롭혔다. 지칠 대로 지친 미국은 1973년 2월 아시아의 일개 후진국과 협정을 맺고 물러나기로 했고, 4월 23일 포드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