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44년 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중국 서주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탈영하고 무장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는 김학규 장군이 이끌던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어 1945년 1월 동지규합 및 군자금 조달 임무를 받고 상해로 가게 된다. 다음은 현 광복회 회장인 김우전씨의 글의 일부분이다.
탈출 학도병 허암 동지, 사회인 박윤석 동지 등 10여명을 규합했고, 이들을 지대본부로 보낼 계획을 세우는 한편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상해 부호로 이름난 손창식 씨를 면담하려고 할 때 1945년 3월 13일 새벽 4시경 동포 김사해, 일본명 다마가와라는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일본특무기관원 10여명에게 급습을 당하여 한성수, 홍순명, 김영진, 허암, 박윤석, 성명 미상자 2명 전원 7명이 체포되어 월 여에 걸친 갖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일본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함께 재판을 받았던 김영진 동지의 목격담에 의하면 한성수 동지는 모진 고문에 몸이 지쳐 왜놈의 등에 업혀 군법재판장에 출정하여 7명 모두가 한 자리에서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고 했다.
최초 검찰관의 인정 심문으로 재판이 시작되었으나 한 동지가 일본어 사용을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부득이 통역을 대동하고서야 재판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를 쓰지 않는가?'' 라는 재판장 물음에 한성수 동지는,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한국말일 뿐이다'' 라고 역설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재판장의, ''대동아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너희들은 대일본제국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 라는 칼날진 물음에도 한 동지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마.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한다. 중,미,영 연합국의 합동작전으로 인하여 인면(印,緬) 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참패하고 무조건 항복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압제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 라고 분노의 언성으로 일갈했다.
재판장은 다시 한 동지의 마음을 떠보려고, ''어때! 너를 관대히 봐 줄 테니 다시 마음을 고쳐먹을 수 없겠는가?'' 라고 묻자 한 동지는 엄숙한 목소리로
''너희들이 너희 나라에 충성하려고 애쓰는 만큼 나도 우리 조국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싶다.'' 라고 강조했다. 이에 한 동지의 확고부동한 애국 신념을 알아차린 재판장은 잠시 휴정을 선언한 다음에 아래와 같이 피고들에게 선고하였다.
한성수 사형, 홍순명 징역 5년, 김영진 징역 3년, 그리고 그 외 4명의 동지들에게 각각 단기형 판결을 내렸고,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후략] (광복회보 2001.4.20)
치안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었다. 일제시대에도 '보안법'이라는 게 있었으나 오늘날 집시법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 일본 제국주의 비판은 이 치안유지법에 의해 처벌되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이 법이 만들어진 1925년부터 1938년까지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된 사람은 무려 17000명이 넘는다. 일제의 광란이 본격화된 1940년대를 빼고서도 그렇다. 무장독립투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가령 시인 윤동주도 치안유지법으로 처벌을 받고 복역중 사망했다.
......그로서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중략] 법률에 비추어 보건대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그 소정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고...... (윤동주 판결문 중)
시인 윤동주를 잡아넣었던,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투옥시켰던 ''국체를 변혁할 목적으로'' 라는 조항은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라고 하는 국가보안법으로 아직도 한반도 땅에 살아 있다. 맥아더가 일본에 진주하고 난 후 가장 먼저 취한 조치 중의 하나가 바로 치안유지법의 폐기였다. 일본 본토에서도 폐기된 법이 해방된 지 60년이 된 조선 땅에 살아있는 것이다. 애초 이 법은 워낙 악법이라서 1925년 당시 일본 본토에서도 논란이 되었고, 의회에서도 통과가 불투명했다. 그러자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여 일본에는 실시키 불능이라 하더라도 조선뿐만이라도 금일의 時勢에 照하야 특별히 제령의 형식으로라도 실시함이 필요치 아니할까 하나니 적어도 국체를 파괴하려 하는 행위는 비록 예비행위까지라도 취체할 필요를 확인한다. (조선일보 25.3.5.)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일본 의회에서 부결되더라도 조선땅에서는 법률이 아닌 제령의 형식으로라도 시행하고 싶다고 했을까? 사이토 총독의 그런 '소망'은 그로부터 23년 후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된다. 치안유지법을 베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조선 땅에서 시행되게 된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당시 6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7조로 이루어진 치안유지법 중 두 조항을 하나로 합쳐 적절히 베낀 것에 불과했다. 치안유지법 : 국체를 변혁하거나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조) 치안유지법 : 전조 1항의 목적으로써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한 자는....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을 선동한 자는.... (2조, 3조) 치안유지법 : ...죄를 범할 목적으로 금원 기타의 재산상의 이익을 공여하거나 또는 그 신입 또는 약속을 행한 자는.... (5조) 치안유지법 : 죄를 범한 자가 자수를 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6조) 치안유지법 : 본법은 하인을 불문하고 본법시행구역 외에서 죄를 범한 자에게 또한 이를 적용한다 (7조)
물론 1948년 제정 당시 6조에 불과하던 국가보안법은 많은 개정을 거쳐 오늘날 25조에 이르는 긴 법률이 되었지만, 잡담만 해도 잡아가던 일제시대의 '협의'는 오늘날 '회합통신'으로, '선동'은 '고무찬양'으로 남았고, 치안유지법 5조는 오늘날 '편의제공'으로 명칭만 바꿔 살아남았다. 그리고 '국체를 위해'한다는 조항은 오늘날 '반국가단체'라는 기막힌 단어로 변신했다 (물론 오늘날에도 조갑제 같은 인간들은 '국체'라는 단어를 매우 애용한다). 지난 26일 헌법재판소는 단 한 명의 소수의견도 없는 가운데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한나라당 김형오 사무총장은 이 결정을 환영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법안을 내겠다는 것은 대한민국 헌정을 헌법 질서까지 무시하겠다는 안하무인적 자세''라고 얘기했고, 전여옥 대변인도 ''헌재가 모처럼 정치적으로 독립된 판단을 한 점을 환영한다''고 평가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자유총연맹 명의의 ''대한민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요즘 밤마다 올림픽을 보며 우리가 매일 응원하는 대한민국이, 하느님이 보우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이, 일제의 국가주의를 정통으로 계승하는 계승자라는 사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지사들이, 만주 벌판을 떠다니며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던 투사들이 다시 살아서 대한민국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국회 법사위 간사인 장윤석 의원은 ''국보법으로 불편을 느끼는 국민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치면 일제시대에도 치안유지법으로 불편을 느끼는 국민이 별로 많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전두환한테 죽임을 당한 국민은 전체 국민에 비한다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이 일제시대였으면 아마도 경성 시내 곳곳에는 ''대일본제국에는 치안유지법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을 것이다. 친일파들이란 머리에 뿔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단지 가치관이 국가주의적이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며 국가보안법을 지키자고, 국체를 보존하자고 울부짖고 있다.....
|
이 포스트의 관련글 키워드는 [친일파] , [국가정체성] , [국가보안법] 입니다. |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ww.mediamob.co.kr/asever/post/tb.asp?PKId=13621 |
첫댓글 나이쓰
명문이군요..
애국심이 강하신 분이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