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세계에서는 9단을 일컬어 ‘입신(入神)’이라고 부른다. 신선(바둑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바둑실력이 제아무리 높아도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선의 경지는 득도의 경지이며, 득도는 인격의 완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4년 당시 바둑계의 최고수인 조훈현은 9세의 어린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여달라는 주변의 요청에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이창호에게 도무지 번뜩이는 기재(棋才)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훈현 자신은 소년시절 동시에 두어지는 3판의 대국을 혼자서 기록했고, 단 5분이면 300수에 달하는 기보를 완전하게 해독할 수 있는 천재성을 지녔던데 비해, 이창호는 바둑도 성격도 투박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창호를 내제자로 맞아들인 뒤, 시간이 갈수록 밍밍하고 둔한 이창호의 바둑에서 현란한 자신의 바둑 넘어 있는 또 다른 세계의 묵직한 힘에 점점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조훈현 9단의 홈페이지엔 이창호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있다.
거의 매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창호의 방에서는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방이 국수의 침실. 국수는 그런 소음이 좋았다. 어린 시절 듣던 야경(딱딱이) 소리 같기도 하고 평생 귀에 달고 살아온 익숙한 소음이기에 편안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소음이 국수의 의식을 번쩍 깨우치게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잠이 들려는 순간 제자의 방에서 딱! 하고 돌 소리가 나면 수면의 안개가 일시에 걷히고 의식의 백열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설쳐야 했다. 국수의 아내 정미화씨는 창호의 노력을 대견스레 생각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심야의 바둑돌 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통증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저 자식 같기만 한 창호가 어느덧 절세고수로 성장해 남편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제자 생활 2년 만에 프로기사에 입문하고, 4년 만에 역대 최연소로 타이틀을 획득한 이창호는 그 후 각종 진기록을 수립하며 스승이 보유한 타이틀을 하나 둘 탈취하였다. 스승에게서 처음으로 타이틀을 쟁취한 날의 분위기를 묘사한 이야기를 보자.
1990년 2월 2일. 관철동이 발칵 뒤집히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14세의 풋내기가 세계챔피언을 꺾고 신문기전에서 우승한 것이다. 스승 조훈현이 20년 전 생애 최초로 획득했던 타이틀(최고위전)을 제자가 이창호가 빼앗아 갔다.....
스승이나 제자나 그 상황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날 밤 조훈현 국수의 집 분위기는 기묘했다.
피로에 절은 조 국수가 힘겹게 현관을 들어섰고 그 뒤로 그림자처럼 소년이 들어섰다. 장한 쾌거를 거두었음에도 소년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집안 어른들을 맞았다.......
늦은 밤이었지만 창호는 대충 얼굴을 씻고 방에서 혼자 복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곧장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로 옆 방에서 제자는 두어 시간 넘게 바둑알을 만지고 있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내내 나는 상왕십리에 있는 한국기원에서 사이버기원 구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 때 이창호는 거의 매일 한국기원에 출근했다. 국내 기전은 물론 세계 기전을 거의 다 차지해 국위를 선양한 공로로 군복무 기간 동안 한국기원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병역특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대국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 아침 일찍 한국기원에 출근하여 연구실에서 나이 어린 후배 기사들과 어울려 바둑연구를 하거나 코흘리개 연구생들 바둑을 지도했다. 지금 세계 최강의 기사가 된 이세돌, 박영훈, 최철한, 조한승 등이 그들이다.
이창호는 어린 후배 기사들의 우상이었다. 당연히 후배 기사들은 이창호를 목표로 공부했다. 실력을 키워 명실공히 세계 최고수인 이창호와 당당히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되는 것이 모든 후배 기사들의 꿈이었다. 그것은 곧 프로바둑계에서의 성공을 의미했다.
이창호는 모든 후배가 자신을 목표로 수련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후배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정신적인 무림의 세계에 비유할만한 승부의 세계에서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승 조훈현이 내제자인 이창호에게 한 달에 고작 한 두 번 지도대국을 해 준 것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큰 공헌이다.
재작년 중국에서 주최하는 세계바둑대회 대국을 마친 후 이창호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적이 있다. 진단 결과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뇌를 너무 혹사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무렵부터 타이틀을 하나 둘 잃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무관왕으로 전락했다(다행히 최근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 올랐다). 10년 전 상왕십리 한국기원에서 내가 보았던 수줍고 예의 바르던 청년 이창호. 그의 나이가 올해 서른 여섯이 되었다.
벤쿠버 동계올림픽 1000m 경기에서 혼신의 힘으로 달렸지만 메달 순위에 들지 못한 이규혁 선수에게 국민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보통 금메달을 딴 선수 위주로 보도하는 언론들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9위에 그친 이규혁 선수를 1면 메인 기사로 실은 파격을 보여준 신문들도 있다.
『 출발 총성이 울리고, 이규혁이 뛰어나갔다. 온 힘을 짜내듯 이를 악물고 달렸다. 이규혁의 미니홈피를 방문한 김혜인씨는 ‘20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쏟아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던 당신의 모습은, 이제껏 제가 봐왔던 그 어떤 선수보다 최고의 올림픽 영웅’이라고 적었다. .....(중략)
모두가 이규혁을 응원하고 있었다. 600m 랩타임은 41초73. 이날 뛴 그 누구보다 빨랐다. 이규혁의 힘찬 발짓이 이어졌다. 악물었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마지막 250m를 앞두고 코너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표팀 김관규 감독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힘내, 규혁아!” 이규혁은 힘을 모두 쏟았다. 마지막 순간 날을 들어올릴 힘도 없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이규혁은 링크 안쪽에 지쳐 쓰러져 누웠다. 1분09초92로 9위. 20년 스케이트 인생을 쏟아 부은 마지막 올림픽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이규혁은 말없이 퇴장했다.
백범은 “눈밭을 함부로 걷지 마라. 그 발자국이 누군가가 따라올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규혁이 20년 동안 지친 스케이트 자국은 대표팀을 세계 최강 반열에 올리는 길잡이였다. .....(중략)
팬들은 ‘무관의 황제’에게 더 값진 메달을 안기고 있다. 이날만 이규혁의 미니홈피에는 수만명이 다녀갔고, 그들은 입을 모아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적었다. 』
『 ‘영웅’은 레이스를 마쳤다. 이번에도 메달은 없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가 뿌린 씨앗은 모태범·이상화의 금메달로 활짝 꽃피었다.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을 이끌어 온 이규혁(32·서울시청)이 18일(한국시간) 열린 밴쿠버 겨울올림픽 빙속 남자 1000m에서 9위를 기록하며 모든 경기를 마쳤다. 13세에 태극마크를 달았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세계스프린트선수권 3회 우승 기록도 세운 이규혁. 그는 다섯 번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이규혁 키즈’를 남기고 떠났다. 모태범은 “규혁 형은 언제나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제 주법도 규혁 형이 가르쳐 주셨습니다”며 선배를 얼싸안았다. 』
첫째 단락은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고, 둘째 단락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중앙일보 1면에 실린 기사다. 스포츠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하더라도, 보수신문마저 바람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파격적인 모양새가 가상하다.
이규혁 선수는 부모가 모두 스케이팅 선수 출신이라 아주 어린 나이에 스케이팅을 시작하며 스케이팅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프로기사인 이창호가 일곱 살 나이에 바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둑 신동 소리를 들은 것처럼.
13세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선수가 된 후 20년 간 국내 대회 석권은 물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하며 기록을 갈아치운 것도 이창호가 11세에 프로에 입단하여 20여 년 동안 숱한 기록을 경신하며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한 것과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배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는 공통점이 훌륭하다.
이창호와 이규혁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자 영원한 챔피언이다.
첫댓글 이창호와 이규혁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는 공통점이 훌륭하고,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자 영원한 챔피언이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 글 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