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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안내] 스크랩 [충북]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북 옥천 (1)
박충식 추천 0 조회 26 09.07.05 21: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북 옥천
차마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향수'의 고을

고향! 산업화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우리는 늘 고향을 그린다. 고향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여우(首丘初心)나, 북풍에 몸을 의지한다는 호(胡)나라 말, 남쪽 가지에 깃든다는 월(越)나라 새 이야기(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를 꺼내기 않더라도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특히 온갖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가을은 누구라도 고향쪽을 향해 목을 쭈욱, 빼는 계절이 아닌가.

그리하여 충북 옥천(沃川)으로 간다. 가을날 고향을 그리는 여행지로는 옥천만한 고을도 없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 시인의 ‘향수’란 시 덕분에 옥천은 어느덧 ‘만인의 고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 둔주봉에서 내려다본 조망. 금강 물줄기와 산줄기가 만나 한반도 지형을 이뤘다. <사진=옥천군청>

 


▲ ①안내면 향토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청석교.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으나 경부선 철도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②청산 덕우리 산골의 풍경. 마을 입구에 있는 천년 묵었다는 소나무가 농촌 풍경을 소박하게 빚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중략)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시인의 ‘향수’ 중에서


▲ 옥천의 중심을 굽이돌아 흐르는 금강. 옥천의 자연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금강 강변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봐야 한다.
평론가들은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구절에서 시인의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찬탄한다.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게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이요, 또 1927년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시적 표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노래에서 일관되게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갖고 있는 정서인 고향의 이미지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아들어선 옥천 읍내. 아담한 옥천읍은 크게 두 군데로 권역이 나뉘어져 있다. 옥천역과 옥천 나들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신가지’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옥천을 다스리던 중심지였던 ‘구읍’이다.

구읍은 전통적으로 옥천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구읍엔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옥천향교와 옥주사마소라는 문화유산과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교사가 보존되어 있다.

또 구읍 골목길엔 전통가옥이 제법 정겹게 자리 잡고 있다. 어느 골목은 소박하고, 어느 골목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옛날 대감이 살았다는 이런 큰 집들은 대부분 고급 한정식집이나 민박집 등으로 바뀌었으나, 그 주변을 기웃거리다보면 당시 옥천 고을을 호령하던 큰 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 ①옥천 구읍엔 으리으리한 전통 가옥이 많지만, 대부분 한정식집이나 민박집으로 바뀌었다. ②구읍의 춘추민속관을 찾은 아이가 전통 가옥을 둘러보고 있다. ③아담한 초가로 복원된 정지용 시인의 생가. 1927년 발표된 ‘향수’란 시는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애송시로 꼽힌다. ④정지용 시인 생가 바로 옆에 자리한 정지용 문학관. 시인의 시문학 세계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중에서도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은 옥천을 찾는 방문객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곳이다. 방문객들은 정지용 생가를 둘러보면서 시에 등장하는 ‘실개천’을 가장 먼저 찾는다. 세월이 흐르며 시궁창이 된 실개천은 최근 보존하려는 노력 덕분에 송사리떼가 몰려다니지만, 시인이 노래한 그 실개천은 이미 아니다.

이젠 세월이 변해 시인이 살던 구읍엔 ‘넓은 벌’도 ‘얼룩백이 황소’도 ‘초라한 지붕’의 초가도 없다. 콘크리트 덮인 실개천 둑길을 걷노라면 시에서 얻은 감흥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의 구읍에서 100년 전 옥천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생가에서 남쪽으로 난 사립문을 열고 나가면 도랑에 걸려있는 길쭉한 돌다리가 보인다. 시인 생가 앞의 실개천에 놓여있던 청석이다. 이 청석은 일제강점기 때엔 ‘황국신민서사’라는 글귀가 새겨진 채 신사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 실개천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 생가와 문학관을 잇는 다리로 쓰고 있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시인의 높다란 동상 뒤로 문학관이 보인다. 문학전시실 입구엔 방문객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정지용의 밀랍인형 소품을 마련해 놓았다. 문학전시실에서 시인의 육필원고와 향수 초간본을 구경하고, 영상 위로 흐르는 시를 보며 시낭송도 해본 뒤, 자리를 옮겨 공설운동장 근처의 관성회관으로 향한다.

관성회관 뒤편 언덕엔 정지용 시인의 대표 시라 할 수 있는 ‘향수’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옆엔 시인의 흉상이 옥천 읍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고향땅을 바라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①죽향초등학교 구교사. 구읍에 있는 이 초등학교는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 등이 졸업한 사연 깊은 곳이다. ②옥천 이원면은 묘목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묘목산업 특구로 지정됐다고 자랑하는 글귀가 선명하다. ③구읍에 있는 우편 취급국. 이렇듯 구읍엔 아직도 옛 읍내의 풍광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④배롱나무 붉은 꽃과 잘 어울리는 양신정. 1545년 전팽령이란 분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⑤옥천 장룡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암사. 옥천의 유일한 보물인 쌍 삼층석탑과 어우러진 경내 풍광이 돋보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중략)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 중에서

1932년 발표된 ‘고향’은 정지용 시인의 대표시인 ‘향수’보다 10년쯤 뒤에 쓰였다. 이 두 편의 시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그리움과 상실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외지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에게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와 고향을 이야기 하며 감상에 젖었던 마음은 이즈음에서 잠시 접어두자.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은 삼국 시대엔 삼국이 쟁패를 겨루던 요충지였다. 이 고을에서 발굴된 고성(古城)만 해도 무려 4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옥천읍 서쪽의 관산성은 한반도의 패권을 바꾼 관산성 전투의 현장이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때는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에 패하면서 개로왕이 목숨을 잃자,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올라 임시 도읍을 삼았던 웅진(공주)시대의 백제는 초기엔 국운의 침체기에 들었지만, 무령왕이 즉위한 후엔 다시 중흥을 이루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국내적으로는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으며, 지방통치조직과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성왕은 또 절치부심한 끝에 551년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의 배신으로 빼앗기자 신라 공격에 나서게 된다.

▲ ①옥천읍 서쪽에 솟은 삼성산. 정상에 있는 삼성산성 주변이 바로 관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②올 봄, 관산성 아래의 국궁장에서 열린 백제 성왕 추모제. <사진=옥천군청> ③백제 성왕이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은 관산성 전투의 현장인 구천.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른다.
554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까닭은 이 지역이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백제군은 가야와 왜국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신라를 공격했다. 즉 관산성 전투는 4개국이 맞붙은 국제전이었다.

첫 전투에서 백제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시 왜국에 원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이참에 확실히 승기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 기록을 보자. ‘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동시대 같은 사건을 기록한 신라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다. ‘진흥왕 15년(554년)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4명과 사졸 29,600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백제와 연합했던 가량은 대가야, 아라가야 등을 말한다. 금관가야는 관산성 전투 22년 전인 532년에 이미 신라에 멸망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며,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의 조부다.

그렇다면 영명하기로 소문나고,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성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관산성으로 간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겨우 기병 50명만 데리고. 백제의 망명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서기는 당시 전투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흠명(欽明) 15년조의 기록이다.

‘명왕(성왕)은, 아들 여창이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행군하고 침식을 거르는 일이 잦아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 가서 위로하려 했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길을 끊고 쳐 격파하였다. 이에 고도(苦都)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머리를 베게 해주십시오’ 하니 명왕이 대답하기를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맡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고도가 말하기를 ‘우리 국법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도 마땅히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목을 늘여 베임을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인 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일서(一書)에 말하기를, 신라는 명왕의 머리를 수습하여 두고, 예로써 나머지 뼈를 백제에 보냈다. 신라왕이 명왕의 머리를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었다. 이 북청을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성왕이 이렇게 처참하게 전사하면서 백제군은 전의를 상실해 관산성 전투에서 참패했고, 아들 여창은 단기필마로 겨우 전장에서 도망쳐 살아나왔다. 여창은 패전의 책임과 참수당한 부왕에 대한 애도 때문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권유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위덕왕(威德王)이다.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이후 혼란에 빠졌던 백제의 민심을 추스르고 다시 국력을 모아 나간다.


하지만, 신라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난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삼국 중에서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있어 가장 뒤쳐져 있던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국력이 급격히 약해진 대가야를 562년(진흥왕 23)에 이르러서 병합하면서 가야연맹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게 된다. 결국 신라는 경남 일대의 비옥한 토지는 물론이요, 발달된 가야의 철기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된다.

또 당시 선진 지역인 중국대륙과 연결되는 요충지 당항성(경기도 화성시 남양만)도 쌓았고, 진흥왕은 함경도까지 북진하여 그곳에 순수비도 세웠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게 협공을 받으면서도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은 신라는 100여 년 뒤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 ①'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질을 하는 옥천 주민. 만약 투망어업 허가를 받지 않고 투망을 던지면 수백만 원의 벌금을 문다. ②놀림낚시 채비를 한 강태공이 은어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몇 년 전 옥천군에서 대청호에 은어 치어를 방류한 뒤부터 금강과 보청천에 은어떼가 몰리고 있다. ③강가에 대놓은 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④금강변 마을인 동이면 청마리의 제신탑.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이 탑은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신당 유적이다.


지금 삼성산(304m) 서쪽을 적시고 북서쪽으로 흘러가는 서화천 일대가 비극의 현장인 구천(狗川)이다. 옥천 읍내 4번 국도와 37번 국도가 만나는 삼양 사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금산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서화천에 걸린 나지막한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 건너편 물가에 바위벼랑이 보인다.

이 일대가 백제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게 사로잡힌 구천이라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르는데, 이 둘레엔 진터벌, 말무덤, 군전리 등 옛 전장터임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관산성의 위치가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은 관산성을 옥천 서쪽의 삼성산성과 그 주위에 이어진 용봉·마성산·장용산 등의 방어시설을 통틀어 부르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엔 ‘삼성산은 군의 서쪽 5리에 위치해 있고 고성의 터가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도 삼성산 위치에 고성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관산성의 중심을 이루는 삼성산은 높이 300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망대 위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옥천 읍내와 그 너머로 굽돌아 흐르는 금강 물줄기가 펼쳐진다.

삼성산은 덩치로 보면 관산성 전투의 현장으로서는 협소하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전사자 수가 무려 29,600명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연합군과 비슷했거나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연합군의 병력을 합치면 최소 6만 명 이상이 이 부근에서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 안남면 도농리에 위치한 중봉 조헌 선생의 묘소.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렇지만 요즘엔 향토사를 하는 이와 동행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 흔적을 되짚기 어렵다. 이정표는 물론이요, 흔한 추모비도 하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성왕의 죽음은 안타까움만 더한 채 이렇게 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부터 이를 아쉬워한 옥천 주민들은 성왕을 위해 관산성 근처의 국궁장에서 국궁대회를 열고 있다. 또 지난 봄엔 국궁장에서 성왕 추모제도 지냈다.

옥천문화원에 알아보니 이 행사는 문화원이 아닌 백제사에 관심이 많은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경비를 모아 치른 것이라 한다. 옥천군이나 옥천문화원에도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아 내년 행사가 열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 덧붙였다. 아직 패자인 성왕을 위로할 준비가 덜 된 것일까.

성왕은 비록 패자이긴 해도 백제를 부흥 시킨 인물이다. 또 관산성 전투는 상승하던 국운도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라의 배신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적은 ‘백제 성왕 사절지’라는 비석 하나 세우는 게 뭐 어렵겠는가. 옥천군의 관심을 기대한다.

▲ 중봉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이지당. <사진=옥천군청>
자, 살벌한 전투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금강으로 가보자. 정지용 시인이 복권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옥천은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고을이었으나 그나마 금강 덕에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는 그래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서 내려가다 보면 꼭 쉬어야할 지점에 있기도 했지만, 금강 덕분에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풍치 좋은 휴게소로 꼽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옥천’이라고 하면 어딜까,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금강휴게소’라 하면 아, 그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북 장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충북 영동의 양산팔경을 지나 옥천을 관통하며 굽이돌아 대청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옥천의 9개 읍면 가운데 2/3인 이원·동이·청성·안남·안내·군북의 6개면을 적시고 흐르는 금강은 옥천 자연의 상징이다.

그래서 옥천 여정에서 금강 드라이브는 필수다. 고당리엔 ‘높은벌’이 있고, 합금리엔 정겨운 강마을이 오순도순 펼쳐지고, 청마리엔 삼한시대의 제신탑·솟대·장승이 남아있다. 또 비포장을 지나 지수리에 이르면 독락정(獨樂亭)이라는 정자가 반기고, 그 뒤로 솟은 둔주봉(384m) 정상으로 발품을 팔면 한반도 지형도 감상할 수 있다.

▲ 군북면 석호리 대청호 자락에 세워져 있는 청풍정. 이곳엔 구한말의 개혁가 김옥균과 그를 사모했던 기생 명월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전한다.
만약 금강변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비록 구읍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났다 해도 옥천의 절반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길손은 이번 여정에서 금강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추석을 앞둔 달은 제법 살이 올랐고, 강으로 쏟아지는 달빛은 그야말로 교교했다. 다리 위에선 밤낚시 나온 가족이 견짓대를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고, 강 건너 바위틈에선 사내 하나가 다슬기를 잡느라 랜턴을 들고 강물을 뒤지고 있었다.

투망을 들고 나온 사내는 첫 투망질에 은어 몇 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건 잡고기요” 하면서 강에다 도로 휙 던져버렸다. 그는 쏘가리를 노린다고 했다. 원래 전국의 어느 강이든지 투망은 불법이다. 걸리면 벌금도 수백만 원에 이른다. 이 옥천 고을에선 투망어업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투망질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관광객들의 착오를 막기 위해 항상 ‘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을 던진다.

투망허가 조끼를 입지 않은 사내는 자신의 불법이 찔리는지, 길손에게 괜히 투망을 하면 벌금이 얼만데 자신은 근처가 고향이라 괜찮다는 둥, 그럴 바엔 아예 투망을 만들지 말라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실없이 풀어놓았다. 외롭게 객지생활을 하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이 흘러 달이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사내는 쏘가리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달이 밝으면 고기가 안 나오지요.” 그러고 보니 다리 위에서 견짓대 낚싯줄을 풀었다 감았다 하던 이들의 살림망도 거의 비어있었다. 사내는 달이 너무 밝다며 또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냥 산책만 즐기는 길손에겐 이 달빛이 좋았다. 내일모레가 추석이라 해도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산기슭의 나무이파리들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강물은 화려한 황금비늘을 두르고 있었다.

새벽 무렵.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물안개. 새벽이 가까워오며 피어오른 물안개는 서서히 달빛도, 산도, 강도 모두 감추었다. “제기랄!” 여명이 밝았을 때 사내는 투망에 묻은 물안개를 툭툭 털어 자신의 트럭 뒤에다 내던지듯 실었다.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밤새 달빛을 받으며 도란거린 사이 아닌가. 재미 좀 봤냐고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빈 살림망을 가리켰다. 사내의 푸념 같은 엔진 소리가 물결 따라 흘러가자 강변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짙은 물안개 때문에 둔주봉에서의 한반도 조망은 포기하고, 중봉(衆峰) 조헌(趙憲·1544-1592) 선생 묘소로 향한다. 조헌 선생은 바로 임진왜란 때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분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은 보은현감에 재직할 때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의 목민관의 모범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 듬치재에서 바라본 안내면 조망. 이 고을은 조헌 선생이 임진왜란 전에 은거하던 인연이 있다.
선생은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이이의 제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가치실용에 중점을 둔 스승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고,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후율(後栗)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분에 대해 풀어가려면 먼저 지부상소(持斧上疏)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지부상소란 ‘제 의견이 옳지 않으면 이 도끼로 저의 목을 쳐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절대 권력인 왕에게 목숨 걸고 바른 말을 하겠다는 의지인데, 조선시대에 지부상소를 올린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중봉 조헌 선생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이다.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인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자 궁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지부상소를 올렸다. 최익현 선생은 1876년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지부소(持斧疏)를 올렸고, 1905년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며 도끼로 뜻을 표현했다.

▲ ①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의 영정. ②매년 표충사에 진행되는 중봉 조헌 선생 추모제. ③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 조헌 선생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였다.
옥천엔 중봉 조헌 선생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군북면 이백리 이지당(二止堂)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後栗堂)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답양리 가산사는 선생의 영정과 영규 대사의 위패를 봉안한 절집인데,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또 안남면엔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매년 가을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중봉충렬제를 옥천문화원이 주관하여 지낸다. 선생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 그런데 어찌하여 옥천에 선생의 유적이 즐비한 것일까.

조헌 선생과 옥천의 인연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84년(선조 17) 보은 현감으로 있던 선생은 당시 반대세력의 모함에 의해 파직 당하는데, 이때 은둔생활을 한 곳이 바로 옥천군 안읍 밤티(栗峙)의 산골이다. 이후 조헌 선생은 이곳에서 지방 선비들과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고 학문을 강론(講論)하며 지냈다.

선생은 1년 반이 지난 후 다시 관직에 나갔으나 당시 조정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선생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이곳에 내려오게 된다. 선생은 생애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발발 소식을 접한다.

이미 왜침을 예견하고 있었던 조헌 선생은 급히 청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했다. 선생은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의병 모집에 나섰다. 옥천은 선생이 은거하며 인연을 맺은 곳이라 문하생과 지인들이 많아서 이들의 도움으로 옥천에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조헌 선생이 의병을 모집할 때 쓴 격문이다.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하여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조헌 선생의 ‘의병이여 일어나라! 왜적을 쳐부수자!’ 중에서)

5월에 거병한 선생은 보은 수리치재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8월1일엔 마침내 의승장 영규 대사와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의주로 북상하기 전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남은 700명을 이끌고 영규와 함께 8월18일 금산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왜군들도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옥천은 선생의 고향은 아니지만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을 논하고 마음을 닦은 곳이자, 목숨을 걸고 구국의 의지를 세운 곳이다. 또 초기 의병 모집처이자 선생의 뼈를 묻은 고을이다. 넓진 않아도 잘 가꿔진 선생의 묘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선생의 강직했던 기상처럼 오늘도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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