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부산대 강명관 교수에게 감사의 말부터 해야겠다. 그의 책 '조선 사람들,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를 읽으며 신윤복의 풍속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혜원 자신이 살았던 조선조 후기인 19세기 전후 무렵,당시 일상의 세세한 풍속,가령 의습(依習)이나 행태를 하나하나 분석하여 미세한 부분까지 설명해 주고 있어 너무나 흥미롭게 그림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그림 '청금상련(聽琴賞蓮)'의 이해도 이 책 읽기로부터 얻은 정보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청금상련'은 가야금을 들으며 연꽃을 감상한다는 뜻이다. 그림 오른 쪽 위에 제사(題辭)가 있다. '좌상객상만(座上客常滿),주중주불공(酒中酒不空).' 그런데 '酒中酒不空'에서 앞의 '酒'자는 혜원이 잘못 쓴 것으로 '樽(준)'자가 되어야 한다. 고쳐 옮기면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 차 있고, 술단지에는 술이 비지 않는다'이다. 그림에는 술단지가 보이지 않지만 다들 얼굴이 불그레한 걸 보니 술상을 치우고 여흥에 들어갔나 보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 셋으로 짝을 맞추었다. 남자들은 수염 난 정도나 모양으로 봐서 엇비슷한 연배의 친구들 사이지 싶다. 이들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다. 두 사람은 갓을 쓴 정장 차림이고 맨 왼쪽 남자는 갓이 없다. 대신 바닥에 벗어놓은 정자관이 보인다. 이들의 도포 빛깔이나 호박(瑚珀)으로 만든 갓끈,그리고 도포에 두른 자주색과 붉은색 띠로 보아 적어도 당상관 이상의 고급관료들이다.
여자들은 기생이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담뱃대를 들고 있는 여인이 머리에 가리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TV 드라마 '대장금'에서 내의원과 혜민서의 의녀들이 머리에 쓰고 나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의녀들이 기생으로도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림의 장소는 어디일까? 그림의 오른 쪽 소나무 아래에는 기와를 이은 돌담이 있고,위쪽에는 2단으로 축대를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아래쪽에는 연꽃을 심은 호사스런 석축 연못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급 주택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집은 누구의 것일까? 강 교수의 추측으로는 맨 왼쪽 정자관을 벗어 놓고 있는 사람의 집이다. 원래 정자관을 쓰고 집 밖을 나돌아 다니는 법이 없고,저렇게 풀어진 자세로 있는 것으로 보아도 자신의 집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 남자가 기생에게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보면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남자는 자신의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기생을 앉혔다. 그것도 자신의 두 허벅지 위로 기생의 둔부가 올라오도록 오른 손으로 기생의 아랫배 부분을 바짝 당기며 앉혔다. 그리고 왼 손으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일(?)에 몰두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세히 말하기는 좀 민망하다.
조선조가 아무리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일지라도 과연 자기 집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대가족제 하에서 숱한 식솔들이 있을 텐데 친구들과 이런 농도 짙은 수작을 벌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혜원의 그림 '생황부는 여인'을 보면 석축을 쌓아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감상하는 기생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고급 기생집이 존재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 풀어진 양반은 그 집의 단골이라 이런 편한 복장이 가능해진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로서는 더욱 궁금한 것은 사실 그림 중앙에 서 있는 양반이다. 다들 기생을 희롱하거나 가야금 뜯는 소리를 들으며 흥을 즐기고 있는데 이 사람은 홀로 서서 친구가 기생에게 하고 있는 수작을 넌지시 바라만 보고 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서 있는 걸까?
혹 그는 이날 기방에 처음 온 게 아닐까? 그러니 노는 방식도 낯설고 더구나 아직 사대부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듯 그 근엄함을 유지하고자 한다. 눈길은 친구의 손놀림에서 떠나지 않으며 말이다. 한편 짝으로 보이는 기생은 무료한 듯 불퉁해 하며 연신 담배만 피워댄다. 맨 오른쪽 양반은 이제 경험이 좀 있나 보다. 편하게 앉아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제법 기방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다. 그리고 더욱 익숙해지거나 빠지면 체통이고 뭐고 아랑곳 하지 않고 맨 왼쪽 양반처럼 난잡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아무리 고매하고 귀하신 양반이라 하더라도 기생집에 발 들여 놓으면 누구든지 앞서 말한 순서로 향락에 젖어들게 됨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생생한 재현 속의 당사자들,곧 사대부 계층 자신들은 그림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혜원은 다른 그림들에서도 신분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인물들(가령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부상하던 포교나 별감 등의 중인)을 묘사하며 그들의 퇴락을 있는 그대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혜원 그림의 주된 후원자이자 감상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이런 그림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당혹해 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불쾌해 하면서도 내심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았을까?
나는 혜원의 그림 속에서 단순히 당시 에로틱한 풍속의 재현이나 풍자적 해학만을 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이른바 철학적 반성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현대성'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