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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묵상글 (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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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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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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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36035
2023.10.05 04:30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파견되는 내용으로서 루카 복음에만 있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왜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 파견 얘기 말고도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를 굳이 덧붙이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흔두 제자를 주님께서 더 파견하신 걸까요?
아니면 루카 복음사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얘기일까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의미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선교를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마태오복음은
특히 더 유대인 선교만 생각했기에 열두 사도 파견 얘기만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만을 찾아가라는 얘기까지 하지요.
이에 비해 루카 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열두 사도 말고도 이방인을 위한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말씀을
다른 두 복음과 달리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는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로,
일흔두 제자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유대인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화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대인들만 복음화하는 것은 실제 주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루카의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가거라”라고 하신 것은 가까이서부터 멀리까지,
내 가정부터 가까이는 이웃에게 멀리는 세상 끝까지 가라는 명령이고,
일흔두 제자에게뿐 아니라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입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그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이긴 합니까?
명령이고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데,
명령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리 주님 명령일지라도 나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버티지는 않습니까?
어쨌거나 가라는 명령 앞에서 나는 어떤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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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작업 효율을 높이려고 기술 고문을 초대했습니다. 이 기술 고문은 공장 전체를 돌아본 후에 한 가지 지시 사항을 내렸습니다.
“매일 공구를 정리 정돈하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이 지시 사항에 불만이 커졌습니다. 기술 고문이라고 특별히 초청했는데, 뻔해 보이는 지시 사항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기술자들은 귀찮다고 짜증을 냅니다. 공구 정리 정돈으로 무슨 효율이 높아지겠냐며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일 효율이 20%나 상승했습니다. 일하다 공구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증이 많은 사람,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죄인으로만 만드는 것 같다며 짜증 나서 성당을 멀리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본인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저것 챙겨줘도 잘될까 말까 한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이 전교 여행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은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평화였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장 기본을 열심히 선포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이 있는 반면,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었습니다. 이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돔보다 더 심한 벌을 받을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땅을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자기네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교도들을 저주하는 표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저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받아들이고 있나요?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를 멀리하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주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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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관계는 단지 마주쳐 나눈 이야기로 맺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이 필요하다(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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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민수 11,25). 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 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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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를 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파견받는 제자는 파견된 곳에 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분열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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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변을 보면 제복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는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사에게 신뢰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경찰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와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고,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입니다.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대원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방대원의 차가 지나갈 때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합니다. 소방대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 그 제복이 가지는 권위와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질서와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더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면, 경찰이 모여서 도박을 한다면, 군인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아이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왜 사제복을 입으세요?’ 아이는 사제복에 있는 하얀 칼라가 궁금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별 뜻 없이 ‘그것이 법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신부님이 아이에게 영어로 사제복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클러지 칼라(clerical collar)라고 불리는 하얀 색 칼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헌신과 순결: 하얀 색은 사제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순결하게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자신이 세속적인 생활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제의 정체성: 사제복의 하얀 칼라는 사제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이로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빛: 하얀 색은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빛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저도 신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제복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 -28)"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비난과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 간디의 눈에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례 받는 신앙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박해가 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빛을 잃어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불가능한 것 같지만 열정에 시간이 더해지면 이루어집니다.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열정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도착한 프랑스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눈이 먼 소경을 치유하실 때도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믿음이 약하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믿음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진 건 풍랑이 거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열정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무기력하고 의욕이 사라진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 열정과 믿음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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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이야기 중에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청빈한 모습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제게 큰 묵상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무례함을 가르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인사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의 뜻은 이런 것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제자들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께 집중하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자신이 성취한 것에 취해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늘 하느님께 집중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쉽게 하느님을 잊을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능력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본 사람들과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으로 모시려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느님께 집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언제든 하느님께서 거둬가실 수 있는 것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집중하세요. 그대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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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모아나’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안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보이져(Voyager)’
우리말로 풀면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여행자입니다.
주인공이라는 말 안에는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자라는 말 안에는 언젠가 시작된 여행이 언젠가 끝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자 여행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으로서의 멋진 삶을 살되, 여행자로서 그 여정에는 끝이 있음을 기억하고 겸손하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찾아 듣고 싶네요 ^^
오늘 하루라는 여행에서 많을 걸 담아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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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주님은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오늘 10월3일은 사대 국경일중의 하나인 제4356주년 개천절로 1949년 국경일로 제정됩니다. 예전 저 어린시절 달력에는 단기와 서기가 나란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참 뿌리깊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입니다. 날마다 기상하면 만세칠창중 빼놓지 않고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를 부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 그대로 될 것입니다.
4대 국경일의 노래 작사가는 일제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교육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였던 정인보 선생으로 고고(孤高)하고 독야청청(獨也靑靑)했던 고전적 선비였습니다. 개천절 노래 가사가 좋아 3절까지 다 나눕니다. 시간되면 개천절 노래 3절까지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새벽 강론 쓰며 어린이들 노래 들어보니 너무 경쾌하고 상쾌합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텃다.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새삼 확인하는 우리 민족의 깊고 깊은 뿌리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뿌리 깊은 우리 전통을 새로이 하는 개천절이요, 이렇게 미중일소(美中日蘇)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으로 번영을 성취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맞이합니다. 남북의 분단도 언젠가는 평화로이 하나로 통일되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42년동안 한결같이 강조하고 살아 온 “주님의 전사”라는 수도자의 신원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너나할 것 없이 영적전쟁중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교회의 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신원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는 교회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공통적 삼중신원입니다. 주님의 전사이자,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라는 삼중신원입니다. 주님 안에서 평생 싸워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형제로 살아가기에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가 창조적 긴장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오늘은 주로 주님의 전사로서 측면을 나눕니다.
역시 선택-훈련-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평화를 선택했으면 끊임없는 훈련으로 습관화할 때, 주님과 깊은 관계와 더불어 내적힘의 증대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전쟁을 훌륭히 수행해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욥의 믿음과 희망이 참 대단합니다. 초인적 인내의 힘이 바로 하느님 향한 절대적 믿음과 희망에서 옴을 봅니다.
얼마나 뿌리 깊은 믿음이요 희망인지요! 희망에 거슬러 희망하는 모습은 그대로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하느님 전사, 욥입니다. 깊은 침묵중에 ‘위로와 함께하기’ 보다는 욥의 부족을 추궁하는 경박한 친구들에게 하소연과 더불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바위에다 기록해 주었으면!...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극한의 고통중에도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간절히 기도하는 하느님의 전사, 욥입니다. 평소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부단히 훈련하여 내공이 깊었기에 이런 기도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믿음이 희망이 사랑이 없이 이런 시련의 고통을 어찌 감당해낼 수 있을런지요! 이미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요 자살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참으로 험하고 거친 광야 인생, 셋중 하나라는 것이 제 지론입입니다. 성인이 되느냐, 괴물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셋중 하나요, 자살로 끝내기도 할 것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들인 욥은 물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하느님께 제대로 미친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총사령관인 예수님께서 72명 당신의 제자들이자 전사들을 세상 영적 전쟁터로 파견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주님의 제자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간청과 더불어 먼저 나부터 솔선수범, 수확할 밭의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전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견되는 세상은 꽃밭같은 세상이 아니라, 생존경쟁, 약육강식, 각자도생생 치열한 영전전쟁터입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서도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소유로 무장하지 말고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평화로, 지혜로, 한마디로 주님의 성령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평상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영성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무소유의 삶이 상징하는 바, 소유의 힘이 아닌 존재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민폐를 최소화하면서 주어지는 모든 것에 만족하면서,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말고,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면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병자들의 치유와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라는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스스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의 전사”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살게 합니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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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는 …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 10,1)
나는 가리라
주님이 가라시니
주저하지 않고 나는 가리라
주님 뜻 새기고
주님 향기 머금고
주님 한발 뒤 제자로서
주님 옆의 벗으로서
주님 한발 앞서 사도로서
몸소 오실 주님
희미하게나마 드러내고픈
희망으로 나는 가리라
주님이 가라시기에
가야만 할 가고픈 길에
짝지어주신 고운 벗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섬김과 나눔으로 하나 되어
우리 품은 하느님나라
벗들에게 아낌없이 나누고자
기쁘게 나는 가리라
주님을 만나고픈
가난하고 작은 벗들
혹여 나로 말미암아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멀어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 정갈하게 가다듬어
오직 주님만을 품고
겸손하게 나는 가리라
아픈 벗들 보듬어주고
갈라진 벗들 이어주고
빗나간 벗들 제자리 찾아주고
만나는 모든 벗들에게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건네며
머물 때에 모든 것이 되어주되
떠날 때는 아쉬움 없이
자유로이 나는 가리라
한걸음 한걸음에
나는 작아지고 없어져
마침내 주님만이 남으시고
그렇게 주님만이 계심으로써
나 영원히 살게 되는 그 날을 향해
기쁨과 고통 보람과 허무
순간순간 연연하지 않으며
더디더라도 쉼 없이 나는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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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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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라는 현판은 신자 가정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그리고 교회 입교하려는 예비자와 오랜 신앙생활을 하신 신자 분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바로 신앙생활 곧 교회를 다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분은 참으로 평화로우며, 삭막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 가정의 현관에 붙어있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마다 성찰해 보십시오. 절의 일주문一柱門의 의미가 본래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집에 들어올 때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는 현판을 보면서 나와 내 집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이지 못하도록 저해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면서 주님의 평화가 머물도록 마음을 되잡는 순간을 갖길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가 참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체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말하고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평화를 체험하고 평화를 살려는 마음을 간직하는 게 파견된 제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는 곧 그만큼 선교지역이 넓어졌고, “수확할 것이 많아졌기”(10,2)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파견한 1차 선교 여정과 거의 동일한 여장 규칙 곧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당부와 함께 파견 임무를 주십니다. 물론 파견될 선교지의 여건은 마치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험악한 곳이며 이런 곳에 파견될 제자들은 어린 양에 비유하신 것은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맡겨진 파견 임무는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10,8)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는 곧 거룩한 활동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대 제자들의 역할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의 파견 소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는 것”(10,5참조)입니다. 그 어떤 집이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한 처지와 상관없이 먼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평화의 인사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과 그 사람 위에 머물 것이다.”(10,6)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의 평화는 바로 자신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의 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자신에 집으로 환영하고 환대한다는 것이기에 이는 곧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평화란 속마음에 갖고 있던 보이지 않은 무장을 해제한다, 는 표현임을 저는 파푸아 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정글에서 만난 원주민을 통해서 체험했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구로 받아들이며 친구 사이에는 분쟁과 불목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견된 제자들에 대한 거부 행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제자들은 단지 거부하는 집이나 고을을 향해 폭력 행위가 아닌 “자신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림”(10,11)으로 끝나지만, 그들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이기에 마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0,12)라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집과 고을에 대해 제자들처럼 평화의 사절로 파견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는 일일지 모르지만, 훗날에 그로 인한 엄청난 심판은 하느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견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끝까지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였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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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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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곳이 아직 많고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파견할 제자가 일흔두 명이나 있어도 부족합니다.
어림잡아 비교한다면 비신자들이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슷할까요?
그러나 신자들이 많아도 일꾼은 많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처음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결국 언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을 때, 일꾼은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그 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다면, 그들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써 그 밭을 돌볼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아 밭에 할 일이 많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고자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일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에서 지금의 처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밭 주인의 마음으로 그 밭을 바라봅시다. ‘밭 주인’은 일꾼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밭 주인’에게서 파견되었음을 생각하며,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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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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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관련 3개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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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연중 26주 목요일
http://www.ofmkorea.org/270274
김레오나르도 2019.10.03 04:40
-받아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뭔 이유인지 모르지만 올해 들어서
줘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 저를 봅니다.
오늘 복음도 내일 프란치스코 축일에 앞서 파견이랄까 가난이랄까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묵상함이 더 적합할 듯싶은데 이 주제들보다는
평화를 빌어주는데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얘기가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참 어리석을 때가 많습니다.
받지 말아야 할 상처는 준다고 받고,
받아야 할 도움이나 사랑이나 평화는 줘도 안 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상처를 많이 받고 누군가 상처를 줘서 받았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주는 사람이 있으니 받는 거지요.
하지만 준다고 다 받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돈을 준다고 우리가 다 받지는 않지요.
받을 돈인지 받으면 안 되는 돈인지 따져서 받아야지요.
받지 않아야 할 뇌물을 우리는 덥석 받지 않고
잘 따져서 탈나지 않고 오히려 득 될 경우만 받잖아요?
그럼에도 득 될 것이 없는 상처는 준다고 다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도움은 주로 자존심 때문에 받지 않습니다.
또 폐를 끼치지 않으려 도움을 거절한다 하기도 하는데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도움을 청하는 것은
그에게 선행의 기회를 주는 거기에 유익을 주는 겁니다.
받는 것 중에서 사랑을 받는 것은 제일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왜냐면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은 받지도 않잖아요.
사랑을 받는 것은 사랑을 받는 나도 너무 충만케 해 좋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충만하고 넘치게 하는 것이기에 좋은 거지요.
평화도 우리가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평화는 우리가 이룩해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받아야 할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룩하는 것과 받는 것의 차이가 뭐죠?
어떻게든 평화를 지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룩하는 평화는 내가 만드는 평화이고 깨지기 쉬운 평화이며,
받는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고 깨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살다보면 간신히 평화를 이룩했는데 말 한 마디에
마음의 평화와 관계의 평화가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혔는데 말 한 마디에 가라앉았던 분노가 되살아나고,
이를 악물고 용서를 했는데 얼굴을 보니 미움이 되살아나
너무도 금방 그리고 너무도 허무하게 평화가 깨지는 경험을 수없이 했지요.
너도나도 약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근본치료가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싸움중지나 미워하지 않기나 무관심 같은 것은 근본이 아니고,
사랑으로만 이룩되는 것인데 그런데
사랑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사랑으로는 어림없습니다.
부활하신 후 여전히 죄책감과 절망감과 허무감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그럼에도 당신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시는 그 사랑,
죽음을 무릅쓰고 이겨낸 그 사랑만이 평화의 근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과 평화를 주시겠다고 할 때 우리는 넙죽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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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연중 26주 목요일
http://www.ofmkorea.org/111893
김레오나르도 2017.10.05 02:45
-내가 가는 것이 아니어야.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셨다.”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말이
<당신에 앞서>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묵상하면서 든 생각은 내가 오늘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러 가든 그것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내가 가는데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니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제자가 가는 것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도로 가는 것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파견되어 가는 것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왜 이런 생각이 제게 들었을까요?
다른 때 같았으면 오늘 복음에서 빈손으로 간다든지,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가야 한다든지 아무튼
다른 주제가 떠올랐었는데 오늘은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파견을 받아 가지 않고 제가 갔으며,
주님에 앞서 간 것이 아니라 제가 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동안 프란치스칸 선교를 강의할 때마다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가 가는 것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파견되어 가는 것이라는 점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그렇게 강조하여 얘기하면서
정작 저는 그렇게 가지 않는다는 것을 반성하였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가 주님의 제자나 사도로 가지 않는다면
가서 복음을 가지고 강의를 하고 성경 공부를 해도
그것은 내가 간 것이고 나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럴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만나고 주님을 만날까요?
그렇지 않고 사람들은 성경지식만 쌓거나
주님을 팔아먹는 장사꾼만 만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뽑으시고,
주님께서 나를 임명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파견하셨다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골수에까지 박혀 있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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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연중 26주 목요일
김레오나르도 2013.10.03 05:28
-지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 복음은 내일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가 듣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발견케 한 복음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의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그러더니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는데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이 복음은 프란치스코의 삶의 양식을 바꿔놓은 복음이기에
그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오늘과 내일에 걸쳐 이 복음을 묵상코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점을 특히 묵상코자 합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길 떠나는 주님의 제자들이
지녀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이고 버려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지녀야 할 것을 먼저 본다면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이니 다른 여행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놀러가는 것이라면 그에 필요한 음식이나 도구들을 지녀야겠지만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다른 것은 없어도 복음은 반드시 지녀야겠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지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복음서를 지녀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말씀이거나
복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져야 된다는 그런 허접한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존재가 바로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살아있는 복음으로 우리가 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뜻이고,
우리 존재가 복음에 의해 진정 행복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충만하고 넘치고,
우리의 행위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믿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와 열망을 우리가 지닌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주님께서 다 마련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떠남은
바로 이 믿음에서 가능한 것이고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을 수 있고,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떠날 때 우리의 믿음이 강화된다는 뜻입니다.
실로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어야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의탁케 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그럴 때 은총은 발생합니다.
은총은 성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얻은 것은 성과일 뿐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어야 은총입니다.
나의 성과로 만족하는 삶을 살 것인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하라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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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연중 26주 목요일
당쇠 2010.09.30 04:51
-고통과 결기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돌아보면 얼굴 붉어질 일들이 많지만
젊었을 때, 아니 어렸을 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잘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고통을 하소연해왔을 때 그저 들어주었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 저는 그러기보다 욥기의 친구들처럼
고통이 왜 왔고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등등,
훈수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의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듣고자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해답을 들려주면 정말 고마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훈수를 들으러 오는 것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구나,
함께 있어줄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통을 견뎌낼 만한 사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오늘 한탄하듯 하소연합니다.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이렇게 자기 곁에 있으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줄 사람이 없자
욥은 시선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살갗이 벗겨지고 간장이 녹아내린 그 몸으로
하느님을 꼭 보고 말겠다고,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꼭 보고 말겠다고 이를 악 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결기가 필요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 고통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고,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꼭 만나 뵙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필요합니다.
고통이 값싼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신 것은
그 비싼 대가를 치루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싼 대가로 하느님을 얻어 만나라는 것입니다.
고통도 당하고 얻는 것도 없으면 인생을 잘 못 사는 것입니다.
고통이 너무 크다고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최악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클수록 얻는 것이 더 많아야 합니다.
가장 큰 고통을 당하면 가장 큰 선물인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고통이 억울하지 않으려면
오늘 욥처럼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지니도록 합시다.
제 주변에 요즘 앓는 분, 특히 암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의 매일 기도 주제인데
이 분들이 이런 결기를 가지고 암과 싸우기보다
하느님과 씨름을 하기를 이 아침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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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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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욥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이유도 모르겠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결핍투성이의 존재로서,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있는 이상, 욥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황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며 이런저런 다양한 고통과 시련에 노출됩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이 아니라 욥처럼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통일 경우, 우리는 하느님도 원망하고, 이웃도 원망하고, 나 자신도 원망하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가혹한 나머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이 혹독한 고통 너머에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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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심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하신다.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라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 전파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전하는 사람에게 더 유익하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라고 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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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말 안에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심판’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을 찾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마치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부모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 자체가 하느님이 계심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사용하는 예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원래 영국 철학자 John Wisdom이 제시하고 나중에 Antony Flew가 대중화한 이 사고 실험에서는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지 아닌지를 토론합니다.
아름답고 잘 관리된 정원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한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론을 테스트하는 데 동의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정원사가 잘 관리된 정원 상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두 번째 사람은 회의적이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정원사가 존재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그들은 정원사의 존재를 감지하는 카메라, 센서, 심지어
경비견까지 다양한 도구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방해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정원은 눈에 띄는 어떠한 간섭도 없이 계속해서
번창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원사가 분명히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이제는 정원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어떤 알려진 수단으로도 탐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다음 회의론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정원사가 있는 것과 정원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즉, 정원사의 존재를 어떤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정원사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지구와 화성 사이 어딘가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찻주전자를 상상하는 유명한 비유를 제안했습니다.
이 찻주전자는 너무 작아서 어떤 망원경이나 과학 장비로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찻주전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입증의 책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는 정당화를 하는 것이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부모가 나의 부모임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부모를 보여주어야만 할까요? 또 누군가 DNA 검사를 해서 그 부모가 확실함을 입증한다면? 그런데 그 DNA 검사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중간에 속임수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면 태양 주위를 도는 주전자를 보더라도 홀로그램이라 주장할 것이고, 정원사를 보더라도 그 정도 실력으로 저 좋은 정원을 다 가꿨을 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은 이렇게 외적이고 외적인 것은 속임수가 가능하므로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믿음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나에게 키스해 주었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적인 것은
속임수일 수도 있어서 쉽게 믿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런 증거들이 쌓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간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믿음은 마음 차원의 문제인데 부모의 사랑이 그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 ‘평화’를 줄 때 생깁니다.
제가 어머니를 의심했을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시는 사랑에 결국은 믿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 ‘평화’를 하느님 나라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나의 창조자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평화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그 사람이 아이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온전한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이 평화를 주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때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르쇠르와 펠릭스 르쇠르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저명한 프랑스 의사이자 지식인인 무신론자 펠릭스와 결혼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펠릭스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신앙에 적극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아내의 종교적 신념을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생활 내내 사랑과 인내, 충실함을 유지하면서 펠릭스의 개종을 위해
고통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펠릭스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희생을 기록한 영적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펠릭스는
깊은 회개를 경험하고 도미니키회 가톨릭 신부가 되었습니다.
펠릭스는 후기 저작물과 공개 강연에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이 그녀의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혼 생활 내내 보여준 사랑은 궁극적으로 그가 한때 거부했던 바로 그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엘리자베스와 같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엘리자베스가 쓴 영적 일기입니다.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다른 증거는 펠릭스에게 믿음을 가져다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흘린 피만이 상대의 심장까지 흘러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도록 파견되었고 그래서 교회의 사랑과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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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1-8)”
1) ‘다른 제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다른 제자들입니다.
‘일흔두 명’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민족들의 수를 ‘일흔둘’로 생각했습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은, ‘모든 곳’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면서 준비하는 사람이 적다.” 라는 뜻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제자들(신앙인들)은 그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 활동을 할 때, 즉 선교활동을 할 때,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여기서 ‘일꾼’은 ‘모든 신앙인’을 뜻합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이 일꾼으로 참여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구경만 하다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 때문에 ‘남의 집’이 아니라 ‘나의 집’이고 ‘우리 집’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이고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한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우리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일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꾼들을 모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소주일 같은 때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가리켜서 일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착한 목자는 착한 양들 속에서 나오는 법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3)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어린 양’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 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염려를 나타낸 말씀이기도 하고, 이리 떼 같은 사람들을 양들 같은 사람들로 변화시켜야 하는 제자들의 임무를 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라는 말씀은, 목자만 의지하는 양들의 모습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목자의 보호 안에 있는 양들은, 모든 것을 목자가
알아서 다 챙겨 주기 때문에, 따로 무엇인가를 챙기거나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런 생활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관계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일인데, ‘주님의 평화’를 남에게 전해 주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그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돈 걱정’ 같은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걱정과 참 평화는 반대쪽에 있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었는데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평화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전해 준 사람 쪽이 아니라 거부한 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이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라는 말씀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4)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은(9절), 복음 선포는 ‘말’로도 이루어지고, ‘자비의 실천’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병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치유의 은총’이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에 관한 무서운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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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1-12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둘 씩 짝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고을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그러했듯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며 회개하도록 이끄는 선구자이자 예언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신앙적으로 성숙해있지 않은 이들에게, 아직 주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그분 뜻을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해받고 배척당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무시당하고 핍박받는 일이 잦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물론 때로 자기 신변에 심지어 목숨에 큰 위험이 따르기도 하겠지요.
그런 상황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 자기 생각만 맞다고 여기는 고집과 편견에 찌들어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이들에게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이리 떼 한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임을 다 아시면서, 왜 제자들에게 그 길을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너무나 위험하지 않을까요? 당신 가르침에 따라 용서와 사랑, 평화 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사악한 음모과 계략, 거짓 술수로 단단히 무장한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라고 그들을 보내시는 게 아닙니다. 용서와 이해로 져주라고, 사랑과 자비로 섬기라고 보내시는 것이지요. 물론 처음엔 상처입고 피해당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저렇게 무지하고 고집 센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이리 떼의 먹이가 되라고, 보람도 의미도 없이 개죽음 당하라고 보내신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생활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은총’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으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제자들은 두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세상 것들에 욕심내고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분이니, 그들의 믿음과 의탁은 스스로에게는 기쁨과 희망이 되고,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해 받은 이들이 보이는 반응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베푼 호의를, 내가 먼저 빌어준 평화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 호의나 평화가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베풀고 나누었다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언젠가는 의미가 되고 기쁨이 될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나 선행이 거부당했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듯 훌훌 털어버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실 기쁨과 영광을 희망하며 내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 말씀을 ‘복음’으로, 내 구원을 예고하는 기쁜 소식으로 만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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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루카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열 두 제자 외에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신
대목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히브리 원본에서 외국의 유대인 공동체(Diaspora)를 위한 고대 희랍어 번역을
위해 일흔 두 명의 학자들이 동원되었다는 숫자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각 지파에서 여섯 명의 학자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아리스데아스의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히브리 율법서를 72명의 학자가 모여서 72일만에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서를 원칙적으로는 ‘칠십이 인의 번역본’이라고 해야 하는데 부르기 쉽게
‘칠십인’이라는 뜻인 ‘셉뚜아진따(Septuaginta LXX)라고 했지요.
또한 창세기 10장에 소개된 세상 민족들의 숫자와 연결된다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둘을 파견하실 때와는 달리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는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들에게 이르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제자들을 보내시는 심정이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심지어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주고 그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조건이 더 좋은 것을 이리저리 따지지 말고
대접하는 대로 그 집에서 지내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며 받아들이는 않는 집에서는 떠날 때 먼지를
털어 버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은 사실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 심지어는 여벌의 신발’은 사실 여행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인데도
그것을 챙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하느님 나라 선포하는 데에 는
거치장스러운 짐이 된다는 것이지요.
‘길 가다가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사람에게도 묶이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열한 지파에게는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레위지파에게는 예외로 땅을 주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땅에서 상속 재산을
가질 수 없다. 그들 사이에서 너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네가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은 바로 나다.’”(민수 18,20)
기업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 레위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서 에즈라의 행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규정과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즈 7,11)
에즈라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알려진 율법학자입니다. 그는 원래 사제 출신이었고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4-424)에게 간청해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허
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대사제 가문이면서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쳐줌으로써 교사와 사제 직무를 수행합니다. (에즈 8장)
그는 사제집안이면서도 사제와는 독립되는 율법학자의 위치에서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유배 이후에 축소된 성전의 사제들 보다 율법학자들이 군중의 지지를 더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특별한 권위를 세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제 출신인 에즈라는 율법학자로서 군중에게 율법서를 권위 있게
읽어주는 것입니다.
광장에 모여 율법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손을 쳐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레위인들과 율법서의 관계에 대한 정황을 느헤미야 저자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느헤 8,7-8)
이스라엘의 레위지파는 요셉이 열두 지파에 들어오면서 함께 등장하지만 (창세 35,23-26;
49,5) 그러나 요셉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쎄가 지파의 명단에 들어오면서 레위는
제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시대에 레위는 사제직, 성전의 악사, 성전문지기, 그 외에의 레위인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분깃의 땅을 받지 못했어도 그들을 위해 48개의 성읍이
제공되었고 십일조 일부가 그들에게 돌아 갔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레위인들은 비록 재력에서는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지파와 땅의 경계를
넘어서 활동할 수 있었고 유배 중에서도 하느님의 율법을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귀환 후 에즈라와 사제들은 율법학자의 모습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위들이 땅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또한 어느 지파의 경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신원 때문에 유배 중에서도 율법을 보존할 수 있었고 예루살렘 귀환 후에도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쳐 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는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에 나뉘어 있던 땅과 함께 지파의 정체가 흔들리고
사라졌지만 사제들 그 세력이 약해졌지만 바빌론 유배 후에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레위 지파이며 사제들의 삶이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하느님의 성전과 말씀인
율법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재물에서 가난했지만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고 성실하게 복음선포의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가 재물과 권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 가속을 받은 ‘세속화(世俗化)’의 수순을 밟습니다.
특히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교회의 신원을 변질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레위인들에게 땅으로부터 ‘가난’을 주문하셨고 신약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로부터 ‘가난’을 당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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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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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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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반쪽 신앙이 아닌 바른 신앙을 갖는 삶
<2024.10.3>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7:24~41절)
❝반쪽 신앙이 아닌 바른 신앙을 갖는 삶❞
❚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며 예배해야 합니다.
✔ 바른 신앙은 어떤 삶입니까?
➲ 유일한 참신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입니다(24~26절).
사마리아를 점령한 앗수르 왕은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습니다(24절). 이로 인해 각종 이방 종교들이 함께 들어오면서 혼합종교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땅에 이방인이 들어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일종의 심판의 형태로 사자들을 보내어 그들 가운데 몇 명을 죽였습니다(25절).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정을 앗수르 왕에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그 땅의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땅의 신이 보낸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26절). 이방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한 지역의 신으로 오해하였지만,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을 통하여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게 경배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닌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주관해 가지시는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예배의 대상으로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참신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세상에서 살아갈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과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므로 반쪽 신앙이 아닌 바른 신앙을 갖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삶입니다(27~33절).
보고를 받은 앗수르 왕은 사마리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어 그 땅의 하나님에 대한 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도록 명령합니다(27절). 하나님을 배교한 죄 때문에 추방된 제사장이 이제 하나님의 법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되돌아온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그 제사장은 벧엘에 살면서 이전에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이방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할지를 가르쳤습니다(28절).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타나 약속의 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계시하신 곳입니다. 즉, 이 땅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후에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숭배함으로써 우상 숭배의 본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왕상 12:32,33). 그런데 이곳에 제사장이 다시 돌아와 이방인에게 여호와를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향하고 있음과 약속의 땅에서 올바른 예배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벧엘로 돌아와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제사장이 가르쳤지만, 이방 사람들은 자기들이 거주하는 성읍에서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었습니다(29절). 심지어 새로운 정착민들은 ‘...자기를 위하여...’(32절) 여호와께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을 그들 가운데서 임명하여 세웠습니다. 이처럼 이방 사람들은 여호와도 경외하고 자기 민족의 풍속대로 자신들의 신들도 섬기는 혼합주의적 신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34절).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위하여...’(32절) 세상을 좇아 살아간다면 결국 그것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절대적 가치관 보다 상대적 가치관을 주장하며 혼합주의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 포용력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울러 세상의 풍요와 권력의 유혹 앞에서도 우리 자신들의 정체성에 걸맞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므로 반쪽 신앙이 아닌 바른 신앙을 갖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삶입니다(34~41절).
사마리아에 거주하게 된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제사장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렸지만, 동시에 자기들의 신들도 섬겼습니다. 즉 그들은 지금까지 지켜 오던 풍속대로 그들 민족의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야곱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34절). 하나님은 옛적에 야곱 자손들에게 주신 언약을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즉, 다른 신을 경외하지도, 경배하지도 말라고 세 번이나 강조(35,37,38절)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서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하여 그를 예배하며 그에게 제사할 것을 거듭 명령하셨습니다(36절). 그러면 모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것(39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아니하고, 이전 풍속대로 행했습니다(40절). 결국 자자손손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우상에게도 제사 드리는 불순종의 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41절).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것에 또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기 자신들을 더욱 섬기는 것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섬기는 수단과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공적 예배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형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올바른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혹 편협하고 배타적이라는 비판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믿음만큼은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권자이자 유일하신 구원자로 당당히 드러내며 살아갈 뿐 아니라 순전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므로 반쪽 신앙이 아닌 바른 신앙을 갖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반쪽 신앙이 되지 않도록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위험한 삶을 살지 말고 말씀의 방식대로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7:24~4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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